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15화
아니야, 아니야.
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바닥으로 두 뺨을 아프지 않게 쳤다.
“정신 차려, 사라 밀런.”
당황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휴.”
사라는 길게 숨을 내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짝사랑은 하나의 승부와도 같았다. 상대를 함락시켜야만 하는 승부.
물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승부를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그 어떤 승부에서건 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해낼 자신이 있었다.
짝사랑을 짝사랑으로 끝내지 않는 방법.
그것은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유혹하자. 에단 암브로시아.”
사라는 결심이 선 목소리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 정중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사라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밀런 소백작님?”
“아, 론다.”
론다의 목소리에 굳었던 사라의 어깨가 뭉근하게 풀렸다.
머릿속이 에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순간 그가 그녀의 방으로 따라온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벌써부터 괜한 기대를 하기 시작한 자신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론다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사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이 많이 붉어 보이는데, 혹시 열이 나십니까?”
“아뇨, 조금 더워서…….”
사라는 괜히 손부채를 만들며 론다의 시선을 피했다.
에단을 향한 마음을 자각하니 그의 심복인 론다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색해졌다.
“방 안에 얼음을 좀 가져다 두겠습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되는걸요.”
사라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을 불게 했다.
기분 좋을 정도로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론다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스치고 갔다.
그녀는 잠시 눈을 크게 뜨며 감탄하다가 이내 사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뒤에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저녁 식사라뇨?”
“오늘 주군과 저녁을 함께하시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요?”
“네.”
“공작님과 저녁을?”
“네.”
그랬던가? 사라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해 보았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날 것 같다가도 나지 않았다.
마탑에서 오늘 사람이 오기로 하였으니 저녁을 조금 빨리 먹겠다고는 했던 것도 같았다.
“저녁 식사를 조금 일찍 하기로 했는데, 공작님께서도 그렇게 하시겠대요?”
“주군께는 이미 확인받았습니다. 편하게 식사하시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래 줄래요?”
사라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론다를 바라보았다.
에단 암브로시아를 덮치려면, 아니 꼬시려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주 중요했다.
그리고 원래 혼자 조용히 먹으려고 했던 저녁 식사를 에단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기뻐졌다.
그녀는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론다, 공작님이 좋아하시는 와인을 준비해도 될까요?”
“제게 전해 주시면 식사 때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라는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움직여 주는 론다를 보며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마치 그녀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아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들떠 보이는 사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론다가 귀띔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군께서는 화이트 와인에 해산물을 곁들이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준비할까요?”
“네! 좋아요.”
사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론다는 살짝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께서 저택에 3황자의 식솔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라고 하셔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언제쯤 모셔 오면 될까요?”
“아, 그건 벤야민을 시킬 거예요. 아무래도 암브로시아의 사람이 아니고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3황자 입장에서도 안심이 되겠죠.”
“그렇군요. 그렇다면 밀런 소백작님은 동행하지 않으시겠군요.”
“네. 아, 클로드 님은 함께 보내려고요. 일렉사 님도 마중하고 벤야민이랑 좀 친해지게 할 겸.”
“클로드 님과 벤야민 님이 친하게…….”
론다는 잠시 클로드와 벤야민이 함께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살살 벤야민의 속을 긁으며 약 올리는 클로드와 부글부글한 속을 감추며 툭툭 클로드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벤야민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론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클로드 님이 벤야민을 너무 무서워해서 걱정이지만……. 앞으로 벤야민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좋은 일이죠.”
“그거야 그렇습니다.”
론다와 베론은 사라가 에단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들은 명이 있었다.
앞으로 사라와 에단이 저택을 비울 동안 암브로시아 저택에 홀로 남을 클로드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해 두겠다고.
그중 하나가 벤야민이라면 론다는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의 사이를 중재해야만 했다.
“아.”
그때 론다의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밀런 소백작님, 제가 오늘 클로드 님과 벤야민 님, 그리고 벨루나 님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 볼까요?”
“어머나?”
“밀런 소백작님께서는 마탑에서 온 손님들을 상대하셔야 하니 비교적 빠르게 저녁 식사를 하실 텐데, 클로드 님께서는 규칙적인 식사 시간을 지켜야 하니…….”
론다의 말에 사라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감탄하며 말했다.
“그게 좋겠네요. 앞으로 그 셋이 의지해야 하는데, 함께 식사하는 연습도 해 봐야죠.”
사라가 좋아하자 론다는 등 뒤로 숨긴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로써 그녀는 주군과 사라, 둘만의 식사 시간을 만들어 냈다.
* * *
“사라와 둘이?”
“네.”
론다의 말에 에단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그의 좁혀진 미간을 본다면 얼핏 고심하는 듯했지만, 론다는 알 수 있었다.
“괜찮군.”
에단은 기뻐하고 있었다.
경쾌하게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론다는 회심의 미소를 삼키며 조용히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전 그녀는 문틈 사이로 에단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주군께서 뭐라고 하셔?”
“당연히 좋다고 하셨지.”
“역시…….”
베론은 저가 다 설렌다는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주방이 아주 불타오르겠군.”
“당연하지.”
그들은 자신과 한마음 한뜻인 암브로시아 사용인들을 떠올렸다.
이 저택의 모두가 베론과 론다가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고 있었다.
“왜요? 오늘 특식 나옵니까?”
물론 눈치가 제로에 수렴하는 제이드를 빼면 말이다.
“됐습니다, 경. 주군께서 찾으시니 들어가 보세요.”
“바쁘지 않으십니까? 한가해 보이십니다.”
쌍둥이가 싸늘한 얼굴로 한마디씩 하니 제이드는 금세 풀이 죽어서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론다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오늘 아주아주 할 일이 많았다.
먼저 그들의 가장 작은 협력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클로드 님께 말씀드리고 올게.”
“혹시 서운해하시진 않을까?”
“설마.”
론다는 그럴 리 없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녀의 확신은 클로드의 방에 도착해 소식을 알리자마자 무참히 깨져 버리고야 말았다.
“싫어.”
“네?”
아이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다.
“싫어. 나도 유모랑 먹을래.”
“……클로드 님.”
“나도 아버지랑 유모랑 식사할 거야!”
클로드의 앙다문 입술에서는 질긴 고집이 느껴졌다.
자신이 유모와 아버지가 아닌 사라의 제자들과 식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 줄곧 저러고 있었다.
심통이 잔뜩 난 듯 날 선 눈꼬리와 부풀어 오른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이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아 귀엽기는 했지만, 론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하지만 밀런 소백작님과 주군이 단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인데…….”
“나는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 가만히 숨만 쉬고 있을게. 응?”
“…….”
망했다.
론다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말이었다.
클로드가 거부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밀런 소백작님과 주군께서는 두 분이서만 식사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요.”
“나랑 함께한다고 하면 유모도 아주 좋아할 거야!”
“…….”
“아버지도, 아버지도 좋다고 하실 거야!”
론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시선을 보내는 클로드를 보며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