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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17화 (117/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17화

* * *

세상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그리고 엄청 좋은 일이 생기면 꼭 그 뒤에 나쁜 일이 생기고는 했다.

“…….”

방금 전까지 사라와 아버지와 함께 꿈 같은 저녁 식사를 마친 클로드는 언제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냐는 듯 죽상을 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도 별로야. 그러니 표정을 좀 푸는 게 어때.”

옆에서 툴툴거리는 벤야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클로드는 다시 한번 인생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아직 이른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아저씨가 별로인 것보다 내가 두 배 더 별로야.”

클로드의 말에 벤야민은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네 배.”

“나는 여덟 배.”

“팔천 배.”

“팔천…….”

클로드는 벤야민보다 더 큰 숫자를 말하려다가 팔만 배를 말해야 할지 그 두 배를 곱해서 말해야 할지 헷갈리고야 말았다.

“훗.”

클로드의 말이 한번 꼬이자 벤야민은 승리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아이 씨!”

“아이 씨? 꼬맹이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나 꼬맹이 아니야!”

“나도 아저씨 아니다.”

“아저씨는 아저씨야!”

“아니라고.”

약이 오른 클로드가 발을 쾅쾅 구르며 쓸데없는 말싸움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그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벨루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사이좋게 다녀오는 게 어때, 벤야민.”

“네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군.”

벤야민은 이번 일에서 빠지게 된 벨루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약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했기에 이번 마중에는 벤야민과 클로드 둘만 가기로 했다.

“저 아저씨가 아니고 벨루나 누나랑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클로드 님.”

두 사람은 벤야민에 비하면 이미 친하다고 볼 수 있었다.

벨루나는 입술을 내밀며 아쉬워하는 클로드에게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추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잘 다녀오시면 제가 스승님이 직접 쓰신 동화책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예, 스승님이 클로드 님과 만나기를 기대하며 손수 만드신 것으로 압니다. 제가 마탑에 두고 가신 걸 챙겨 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우와, 신난다! 약속이야, 꼭 줘야 해!”

“네.”

클로드는 사라와 맹약을 나눌 때처럼 제 새끼손가락을 벨루나에게 내밀었다.

사라에게 배운 약속하는 법이었다.

“감사합니다.”

벨루나는 자신도 모르게 감사 인사를 하며 조심스럽게 클로드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벨루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큽.’

클로드의 손가락이 너무나 작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풍기는 아가 냄새 때문에 벨루나는 스승의 곁에 있는 시간이 조금 더 행복해졌다.

“하, 별꼴을 다 보는군.”

그 모습을 보던 벤야민은 헛웃음을 삼키며 벨루나를 응시했다.

저 또라이 같은 게 클로드의 앞에서 고장 난 목석처럼 구는 것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됐다.

하여튼 스승님이고 벨루나고 저 되바라진 꼬맹이 앞에서는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게 아니꼬웠다.

특히나 저 꼬맹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더욱.

“이만 가지.”

“앗.”

벤야민은 들고 있던 로브를 클로드에게 확 씌워 버렸다.

그 거친 손길에 클로드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벤야민!”

벨루나가 그를 타박하는 듯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벤야민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인적이 드물 때 가려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라고?”

“……클로드 님을 잘 모시는 것에 집중해. 알았어?”

“생각해 보지.”

벤야민은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암브로시아 저택의 비밀 통로를 통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마차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벤야민과 클로드, 둘이서 저택 밖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벤야민.”

“알았다고.”

걱정이 된 벨루나가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자 벤야민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네 짧은 다리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갈 테니 알아서 따라와라, 꼬맹아.”

“내가 어른이 되면 분명 아저씨보다 다리 더 길 거야.”

클로드는 벤야민에게 질세라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그를 앞질러 갔다.

벤야민은 그 작은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벨루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봤지? 잘 다녀올 테니 그 빌어먹을 약이 뭔지나 빨리 알아내라고.”

“……하아.”

벨루나는 성큼성큼 걸어 클로드를 따라잡는 벤야민과 그런 벤야민에게 지기 싫다는 듯 이제 뛰기 시작하는 클로드를 보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스승님, 저 두 사람이 정말 친해질 수 있을까요?”

그러자 허공에 희미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을 타고 반짝이는 빛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푸른색 글자를 만들어 냈다.

[재밌지 않니?]

은밀하게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라의 메시지였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딱 보아도 두 사람 사이가 너무 위태로운데요.”

[그래? 내가 봤을 땐 이미 서로 친해진 것 같은데 말이야.]

사라의 말에 벨루나는 경악하여 되물었다.

“저게 말입니까?”

[벤야민이 말을 저렇게 많이 하는 거 봤니?]

“……스승님 앞이 아니고서야, 필요한 말 외엔 하지 않았죠.”

벨루나는 마탑에 있던 시절,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쉬지 않고 말하던 올리븐과는 달리 과묵한 편이었던 벤야민을 떠올렸다.

언제나 능글맞게 벤야민의 심기를 거스르던 올리븐에게도 언제나 말보다는 힘을 썼던 그였다.

지금 이렇게 클로드와 투닥거리는 모습은 사실 매우 낯선 광경이긴 했다.

[그것 보렴. 벤야민도 실은 클로드 님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게 분명해. 우리 클로드 님이 보통 귀여운 게 아니잖니.]

“그야 그렇지만.”

클로드의 귀여움. 그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벨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귀여운 아기 고양이 앞에서 벤야민이라고 별수 있겠나.

[클로드 님도 벤야민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벤야민 앞에서 아주 생기가 넘치시잖니.]

“……스승님께서 너무 좋게 보시는 게 아닐까요.”

[그건 두고 보자꾸나.]

벨루나는 스승의 메시지에서 그녀가 아주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두 사람의 행보를 마법으로 보고 있을 스승을 생각하며 벨루나는 걱정을 접기로 했다.

“마탑에서는 누가 왔습니까?”

[장로들이 왔단다. 걱정하지 말렴.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죄송합니다. 스승님께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벨루나, 그나마 네가 없었더라면 올리븐은 아마 더 크게 사고를 쳤을 거야. 그건 내가 잘 알고 있어.]

“스승님…….”

[게다가 이번 일 덕분에 그 아이가 뭘 숨겨 왔는지 알게 됐지 않니.]

사라의 말에 벨루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배신감에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흑마법은 생명을 대가로 힘을 키우는 것이다.

올리븐이 흑마법을 익히고 키웠다면, 여태까지 스승의 눈을 피해 수많은 생명들을 취했을 게 분명했다.

그 철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선, 뒤에서 마탑의 마법사들 중 일부와 함께 흑마법을 연구했다니.

“믿을 수 없군요.”

자신도 이런데 스승은 더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벨루나는 그것이 걱정돼 견딜 수 없었다.

“스승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흑마법은 그걸 익힌 것만으로도 대륙의 공적이 될 일이야. 신전에서도 가만있지 않겠지.]

“…….”

[적어도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게 만들 거란다.]

“알겠습니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나중에 내가 없을 때 부디 클로드 님의 곁을 잘 지켜 주렴.]

“명심하겠습니다.”

[믿을게, 벨루나.]

사라는 마지막으로 벨루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그녀를 보고 있던 마력의 실을 끊어 내었다.

“……벨루나 양과는 이야기를 마치셨습니까?”

“네.”

사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궁정 마법사 자리 따위는 쉽게 받아 낼 수 있는 장로들이 사라의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사라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흑마법의 흔적들은 전부 파악해 왔겠죠?”

“네, 대장로님.”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보여 줘요.”

그녀를 배신한 제자를 제 손으로 처단해야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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