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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22화 (122/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2화

* * *

한차례 이야기를 끝낸 뒤, 끝까지 웃으며 장로들을 배웅한 사라는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에단을 보며 물어보았다.

“벤야민과 클로드 님은 사이가 좋아져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글쎄요. 벤야민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벤야민은 다른 사람들은 다 싫어해도 어린아이들, 특히 남자애들에게는 그나마 친절한 편이거든요.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요?”

“특이하군요.”

남자애들에게 친절한 편이라니.

에단은 누군가에게 친절한 벤야민을 상상해 보려다가 관두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소년병이었거든요. 보육원에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게 된.”

“저런.”

소년병. 그 단어만으로도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크롬벨 제국에서는 금지되었지만 타국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보통 그런 경우 용병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목숨을 부지하기 마련인데, 용병들에게 소년병들은 목숨이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 유일한 화풀이 대상이기도 했고 유희 거리이기도 했죠.”

“그리고 그곳은 용병들이 소년들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인되는 전쟁터라……. 이해가 가는군요.”

제국에는 크고 작은 전쟁터가 있었고, 벤야민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단검 하나도 제대로 들기 힘겨워했던 아이가 어느새 용병들도 치를 떠는 악바리로 자라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라는 그런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앞두고 내면에 숨겨 왔던 재능을 본능적으로 발현한 벤야민을 발견했다.

“맞아요. 그래서 벤야민은 그때 자기 나이 또래 소년들만 보면 조금은 친절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때의 자신이 생각나서일까.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벤야민일지라도 그 또래의 아이들 앞에서는 두 번, 세 번쯤은 참고 넘어가는 인내를 보여 주었다.

“지금 수도에 용병들이 올라와 있다죠. 알톤 영지의 일 때문에 다들 용병들을 많이 고용했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알톤 영지까지 가야 하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니 기사들의 수가 부족해진 거겠죠.”

“걱정이네요…….”

벤야민이 용병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라는 걱정을 감추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잘하고 있을 겁니다. 클로드가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클로드 님이 있으니까 괜찮겠죠?”

사라는 어쩐지 어린 클로드가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이 우스워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곤 소파에 등을 푹 기대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

그런 사라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사라.”

“그럼요.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사라는 굳은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고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앞으로는 매우 바빠질 것이다.

일단 황후의 티 파티에도 참석해야 했고, 그 뒤에 황제를 알현해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알톤 영지로 떠나게 되겠지.

하나같이 전부 쉽지 않은 일투성이였다.

“모든 것이 정말 쉽지 않네요.”

“마음이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

“한때 믿었던 제자였으니, 이번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 같은 에단의 말에 사라는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내 일에만 열중했어요. 제 곁에서 그 아이가 그렇게 어둠에 먹혀 가는 것도 몰랐으니.”

이 세상이 ‘어둠의 꽃’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채 암브로시아의 힘을 연구하는 데만 몰두했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으로 인해 비틀린 이 세상을 바르게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미쳐 있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도왔던 제자의 속이 비틀려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대체 언제부터 올리븐이…….”

언제부터 그녀를 배신할 생각으로 흑마법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사라의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겁고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사라.”

에단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

커다랗고 따뜻한 그의 손에 시야가 가려지자 절로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늑한 어둠이 찾아오고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감쌌다.

“이미 흘러가 버린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만 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

“사라는 잘해 주고 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될 겁니다.”

“공작님.”

“그러니 지금은 눈을 좀 감아요. 오늘은 그대의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냈어.”

에단은 제 손바닥 안에서 파르르 떨리는 사라의 속눈썹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아까 사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암브로시아와 클로드를 제외하곤 당신 머릿속에 그 무엇도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투가 심한 편이라서요.”

“……!”

농처럼 흘러나오는 말에 사라의 눈이 에단의 손바닥에서 번쩍 뜨였다.

“조금 눈을 붙여요, 사라.”

에단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뭉근하게 눌렀다.

그 손길을 따라 사라는 소파에 쓰러지듯 가로누우며 생각했다.

‘내가 공작님을 유혹하려고 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나만 유혹당하겠어.’

사라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두 주먹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그 모습이 자기 싫어서 심기가 비뚤어진 클로드 같아서 에단은 작게 웃었다.

* * *

결국 에단에게 잔뜩 유혹만 당한 채 방으로 돌아온 사라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공작님은 너무해.”

에단 암브로시아는 사라에게 너무 지나칠 정도로 너그럽고 자상한 면이 있었다.

미치게 좋았지만 그게 또 심장에 미칠 정도로 나빴다.

“날 좋아해 줄 거 아니면 유혹하지 말란 말이에요.”

사라는 분한 마음에 이불을 발로 팡팡 찼다.

죄가 많은 남자였다, 에단 암브로시아는.

이런 식으로 군다면 그에게 빠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암브로시아 공작님과 말 한마디 섞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공작님께서는 굉장히 귀족다운 매너로 레이디의 춤 신청을 매몰차게 거절하실 분은 아니지만요.’

‘하지만 정중하지만 냉정한 목소리로 그 이상을 바라지 못하게 만들겠죠.’

‘그 선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가고 싶은, 그런 충동에 시달리게 하네요. 아예 말조차 걸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말이에요.’

사라는 칩거하기 전에도 레이디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던 에단에 대한 평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사라 밀런의 삶도, 박혜연의 삶도, 마탑의 대장로로서의 할 일도 너무나 많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지금 이렇게 에단 암브로시아에게 휘둘리다 보니 옛 사교계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내 눈에 잘생겼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잘생겼을 텐데!”

사라는 에단 암브로시아를 노렸던 수많은 레이디들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내가 더 유리해.”

그녀는 앞으로 에단과 단둘이 가게 될 알톤 영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오직 에단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클로드를 며칠간 보지 못할 거라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알톤 영지라…….”

사라는 알톤 영지에 생긴 장막을 떠올리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둠의 꽃’은 이미 아주 많이 달라졌다.

클로드는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았고, 절망하지 않았고, 예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에단 암브로시아 또한 ‘미래’와는 달리 홀로 외롭게 미쳐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박혜연의 몸으로 내가 그런 일기를 노트북에 쓴 거지?’

마치 그녀에게 보란 듯이 마력으로 쓰여 있던 글.

그곳에서 ‘어둠의 꽃’과 ‘미래’를 바꾸어 말하고 있던 박혜연.

“아무래도 피를 한 번 더 거하게 쏟아 봐야겠어.”

잠시나마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피를 엄청나게 쏟아 낸 뒤 정신을 잃었을 때였다.

몸에 그 정도의 충격을 주게 된다면 이번에도 또 박혜연의 몸으로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뒤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네.”

암브로시아의 힘을 상대하고 나면 피를 쏟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에단이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아마 그녀는 엄청난 후폭풍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사라는 어쩐지 그것이 매우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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