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3화
* * *
사라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두 팔을 벌려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맞이했다.
“암브로시아에 오신 걸 환영해요, 페넬로아 님.”
“……밀런 소백작님.”
페넬로아는 암브로시아에 오기 전보다 두 배는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사라의 환대를 받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일렉사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일렉사는 잡고 있던 클로드의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고개만 까딱 숙여 보였다.
아이의 얼굴에도 페넬로아와 같은 피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와 벤야민의 모습을 보던 사라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감탄했다.
“어머나.”
클로드는 심통이 가득 난 얼굴이었다.
두 뺨은 붉어져 있었고 입술은 삐죽이며 앞으로 나와 있었다.
옷차림은 무슨 일인지 흐트러진 채였으며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
벤야민의 꼴도 말이 아니었는데,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진 채였고 뺨에는 손톱자국을 달고 있었다.
사라는 잠시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두 사람 많이 친해졌네요.”
“뭐가!”
“아닙니다!”
사라의 말에 클로드와 벤야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그와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더니 이내 흥, 하고 고개를 반대로 돌려 버렸다.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내가 할 말을 대신 해 주니 아주 고맙군 그래.”
“멍청한 아저씨.”
“맹랑한 꼬맹이.”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페넬로아와 일렉사는 익숙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귓가를 문지르며 그간 벤야민과 클로드의 말다툼으로 피로해진 귀를 달래 주었다.
사라는 굳이 묻지 않아도 페넬로아와 일렉사의 고충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제 옆에 서 있는 론다를 소개시켜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여기 시녀장이 두 분의 방으로 안내해 줄 거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론다입니다. 암브로시아에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차질 없이 모시겠습니다.”
론다는 아주 정중하고 깍듯했다. 은연중에 암브로시아라는 이름에 눌려 긴장을 했던 페넬로아의 어깨가 안심한 듯 느슨하게 풀렸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암브로시아의 영광으로 기억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론다의 말에 페넬로아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사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넬로아가 무슨 신분인지, 또 누구의 사람이고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
암브로시아의 시녀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날 믿어, 페넬로아. 너와 일렉사의 존재는 내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 어머니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모르게 될 거야. 그것이 설사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러니 안심해.”
그녀는 자신을 안심시키던 일레온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모르긴 개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페넬로아는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론다에게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론다는 잠시 들려선 안 될 단어가 들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아니려니 하고 제 본분을 다했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페넬로아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며 일렉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일렉사.”
“네에…….”
일렉사는 여전히 벤야민과 투닥거리는 클로드를 바라보다가 지친 얼굴로 하품을 하며 어머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드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아주 바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사라의 앞에 쪼르르 달려가 서로를 일러바쳤다.
“유모! 아저씨가 괴롭혀!”
“스승님, 저 꼬맹이가 절 구박합니다.”
두 사람은 사라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클로드는 울망울망한 눈을 하고선 사라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 님?”
“유모오.”
사라가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자 클로드는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말꼬리를 늘였다.
이제 승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말이다.
“멍청하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우셨어요?”
“응?”
“제가 알려 드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 험한 말을 쓰세요.”
“아니, 그건…….”
“예법에 걸맞은 말투는 아직 무리라는 건 알지만, 조금 더 귀족다운 단어를 사용하려면 수업이 필요해 보이네요.”
사라의 말에 클로드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편을 들어 달라고 했다가 괜히 지루한 수업을 하나 더 듣게 생긴 것이다.
“흥, 꼴 좋군. 새파랗게 어린 게 못 하는 말이 없긴 했지.”
그 모습을 보던 벤야민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려 웃으며 클로드를 비웃었다.
하지만 사라는 그런 벤야민을 보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가만 보아하니 클로드 님이 그런 말을 쓰는 건 네가 원인인 것 같구나.”
“예? 아닙니다, 스승님. 그건 저 맹랑한 꼬맹이가 스스로…….”
벤야민은 황급히 변명해 보려 했지만 그의 입에서 꼬맹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감히 내 앞에서 내가 모시는 분을 꼬맹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네 태도를 보아하니, 내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말을 입에 올릴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아.”
“그건!”
“클로드 님께 예법 수업을 할 때 너도 참관하도록 하렴.”
“제가 예법 수업을 말입니까?”
“그래. 배움이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필요해 보이는구나.”
“……예.”
벤야민은 클로드를 비웃으려다가 도리어 예법 수업에 참관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클로드의 입가에 고소하고도 통쾌한 미소가 걸렸다.
클로드는 벤야민보다 총명한 구석이 있어서 손으로 입가를 가려 사라에게 들키지 않도록 했다.
‘바보.’
물론, 사라가 보지 않을 때 가린 손을 반만 들어 벤야민에게만 보이게끔 입 모양으로 그를 약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벤야민은 영악하기 그지없는 클로드를 보며 이를 까득 물었다.
“저 망할 꼬맹이…….”
“벤야민!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승님.”
다만, 그는 클로드보다 약게 굴지 못해서 금방 사라에게 들키고야 말았지만.
클로드는 사라의 잔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벤야민을 두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럴 땐 먼저 빠져 주는 쪽이 덜 혼난다는 걸 본능적으로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 * *
암브로시아가의 마차가 황후 궁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보통 황후 궁의 궁문 앞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거나, 황후의 상징이 그려진 마차를 따로 보내 그것으로 갈아타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암브로시아의 이름 덕에 사라는 굉장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사라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는 에단을 바라보았다.
“감사해요,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괜찮았는데.”
“황후가 드물게 여는 티 타임에 홀로 초대되지 않았습니까. 보는 눈이 많을 텐데, 내가 에스코트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지금 공작님이 이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걸요. 누가 에스코트 같은 사소한 것을 가지고 떠들어 댈 수 있겠어요?”
에단 암브로시아가 알톤 영지에 가게 될 거라는 소식은 사교계에도 널리 퍼졌다.
그래서 그의 앞으로 알톤 영지 상황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 전에 처리해 주어야 할 일들이 아주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
지금 사라를 에스코트해 주고 있는 이 마차 안에서도 서류를 들여다보고, 밖에는 전서구가 끊임없이 날아다닐 정도로 바빴다.
에단은 사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고 있던 서류를 잠시 내려놓았다.
“사라.”
“네?”
“그대를 에스코트할 시간조차 만들어 내지 못할 만큼 무능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덜컥, 하고 마차가 멈추었다.
“……물론 그러하시겠지요.”
사라는 에단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순간 멈춘 것이 마차인지 아니면 자신의 심장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다행히 멈춘 것은 마차여서 그녀는 에단이 이끄는 대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에단은 능숙하고도 부드러운 손길로 사라를 이끌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후와의 티 타임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그녀가 그리 순순히 협조하진 않을 겁니다.”
“황제와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 게 아니었나요?”
“그렇다고 한들, 어쩌겠습니까. 황제가 원하는 것은 조금씩 훼방을 놓는 것이 황후의 취미인 것을.”
“저런…….”
사라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정말 끔찍하게 나빴다.
황후는 황제를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하였고, 황제는 그런 황후를 공기와 다를 바 없이 취급하였다.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 맺어진 부부라는 것이 그러했다.
“아마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는 제게 기대도록 해요.”
“저를 에스코트해 주신 뒤에 황제 궁으로 가셔야 하는데 어떻게요?”
“어디든, 암브로시아의 눈과 손은 있습니다. 그저 작은 도움을 요청하기만 한다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공작님…….”
“지켜보고 있을 테니. 무사히 잘 넘기고 오십시오.”
사라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빛냈다.
에단이 암브로시아 공작이라는 게 이토록 든든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