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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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는 가끔 무력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사라는 한 명의 인간이었고, 인간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픈 욕망이 있었다.
그렇기에 가끔, 혹은 아주 자주 사회라는 것이 형성한 권력에 순응해야 할 때가 오곤 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래야만 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어서 들어요, 밀런 소백작. 그대가 좋아한다고 했던 라즈베리 잼을 듬뿍 얹어 구운 쿠키랍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사라는 이미 배가 불렀지만 내색하지 않고 황후가 권하는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황후의 시선이 사라의 손끝에 닿았다.
“부디 입에 맞았으면 좋겠군요.”
황후의 목소리는 아주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두 황자의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세월의 흐름이 담뿍 담겨 있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황후의 목소리에는 권력의 정점에 선 자들 특유의 위압감이 뚝뚝 묻어 나왔다.
사라는 황후의 시선을 느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쿠키를 입에 넣자 와삭하고 부서지며 고소한 버터 향과 함께 라즈베리의 상큼한 달달함이 혀끝을 간질였다.
분명 사라의 입맛에 딱 맞는 쿠키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앉은 자리에서 한 접시는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들어요?”
“……예.”
이 쿠키가 황후가 권한 여덟 번째 디저트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흠.”
부드럽게 웃은 황후는 그녀가 권한 쿠키를 입 안으로 밀어 넣는 사라를 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단정하게 다물려 있던 입가가 찻잔으로 가려지고, 차향을 음미하는 듯 반쯤 가려진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다.
“…….”
사라는 황후와 마찬가지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생긋 웃어 보였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만약 황후가 심술을 부리고 싶다면 사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전부 다 받아 줄 것이다.
그것이 황후를 압박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사라가 황제를 알현하게 될 명분만 쥐여 주면 되는 티타임이니, 시간을 끌면 황제의 사람이 곧 이곳까지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황후는 그것을 아주 끔찍하게 싫어했다.
“듣던 대로군요, 밀런 소백작.”
결국 황후의 찻잔이 먼저 내려갔다.
그녀는 이전과는 달리 입가에 한결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황후 폐하의 귀에 어떤 말이 들렸을지 몰라 두렵네요.”
“아주 칭찬 일색이었답니다. 어찌나 입이 닳도록 그대의 칭찬만 하던지. 내 귀가 녹아내릴 지경이었지요.”
“어머나.”
사라는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황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누가 황후의 귓가에 사라 밀런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일 수 있을까.
“누가 황후 폐하께 제 이야기를 그리 좋게 해 주었나요?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네요.”
사라의 은근한 물음에 황후의 입가에도 그녀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 며늘아기에게 들었답니다.”
“……!”
황후의 말에 일관된 미소로 그녀를 대했던 사라의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
그 모습을 본 황후는 그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드디어 밀런 소백작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되는군요. 훨씬 더 아름다워요.”
깔깔 웃으며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는 황후를 보며 사라는 그녀가 일부러 페넬로아의 존재를 언급했다는 걸 확신했다.
“페넬로아 님의 존재를 알고 계셨군요.”
“모를 리가 있을까요. 내 아들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아이인데. 어미인 내가 알고 있어야 마땅하지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3황자님께서 직접 그 존재를 알리셨나요?”
“물론이지요. 내 앞에서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온전히 눈이 돌아가서는……. 그 모습이 폐하와 똑 닮았더군요.”
페넬로아가 타국의 노예 출신이라는 것은 하등 상관없다는 양 황후는 3황자 일레온에 대한 서운함만을 내비쳤다.
황자의 반려가 노예 출신이라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아주 아비와 똑같이 컸어요. 내가 그리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말이에요.”
황후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입 안이 쓴지 사라에게 권했던 쿠키를 와삭와삭하고 씹어 넘겼다.
“그래도 다행인 건 페넬로아, 그 아이가 내게 순종적이라는 거예요.”
“…….”
황후의 말에 사라는 그제야 그녀가 왜 페넬로아의 신분에 관해 어떠한 불만도 갖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그럼 일레온 전하께 더 마음이 가시겠군요.”
사라의 말에 황후는 정답이라는 듯 생긋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일리오르는 절대 내게 순종적인 며느리를 데려올 아이가 아니니까요.”
“…….”
“황위에 힘을 실어 줄 외척, 현명하게 제국을 이끌어 나갈 기개, 제국민의 어머니가 되어 줄 만한 책임감. 그 모든 것을 고려한 여인을 반려로 삼겠지요.”
“일리오르 전하께서는 그리하실 것 같더군요.”
“그렇죠? 마치 나 같은 여자와 혼인을 하고, 나 같은 여자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겠죠.”
황후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답니다.”
제국의 황제가 바뀐다면 황후는 황태후가 되어 권력에서 한걸음 뒷전으로 물러나야만 한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후는 페넬로아가 엄청난 신분 차이로 인해 감히 그녀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못 한다는 것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며늘아기가 마음에 들어요. 아, 이 말은 페넬로아가 알려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란 곳에서는 아들의 부인을 이렇게 친근하게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밀런 소백작의 교양이야 아주 뛰어날 테니 말이에요.”
“이곳저곳을 떠돌며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을 뿐입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세상에. 겸손하기도 해라.”
황후는 사라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이전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런 소백작과 아주 돈독한 사이가 되고 싶어지는군요. 물론 친우로서 말이에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황후 폐하.”
“내가 나이가 조금 많지만 우정 앞에서는 그런 것쯤은 가볍게 무시해도 되니까요.”
황후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서 있던 황후 궁의 시녀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티타임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를 치우기 시작했다.
사라는 자신을 괴롭혔던 디저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작게 안심했다.
“미안해요, 그 늙은이가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을 보고 싶어서 밀런 소백작을 괴롭게 했네요.”
“이해합니다, 황후 폐하.”
“고마워요.”
황후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시중을 드는 시녀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 나가 있거라. 밀런 소백작과 더 깊은 우정을 나눠야 하니 말이야.”
“예, 황후 폐하.”
황후의 말에 시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티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치우던 시녀장이 은근한 눈빛으로 사라를 한번 바라본 뒤 뒤를 돌아 나갔다.
사라는 그 찰나에 스쳐 간 시녀장의 눈빛을 보며 에단을 떠올렸다.
‘……황후의 시녀장이 암브로시아의 사람이었어?’
그녀는 작은 도움만 요청하면 된다는 에단의 말의 의미를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이제야 좀 밀런 소백작과 편히 대화할 수 있겠군요.”
황후는 마치 오랜 친우를 대하는 것처럼 편한 자세를 취하며 다 비운 찻잔을 손가락에 걸어 까딱거렸다.
교양과 기품 따위는 저 멀리 날려 버리겠다는 태도였다.
제국의 황후가 아닌 그저 여인 대 여인으로서 이야기하겠다는 뜻이었다.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요.”
사라는 황후의 뜻에 맞추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황후는 사라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어 보였다.
그녀가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말이다.
“밀런 소백작은 어쩜 이렇게 사리가 밝고 눈치가 좋은지. 내 며느릿감이 아니라는 게 속상해지는군요.”
“그 영광을 제가 어찌 감히 다 누리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 가문에 만족할 따름입니다.”
“호오, 그래요? 우린 아주 좋은 친우가 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황후는 사라의 말에 아주 만족한다는 양 시원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희미한 경계를 사라가 훌륭하게 잘 피해 갔기 때문이었다.
눈치도 좋고 황후의 뜻을 바로바로 알아차려 원하는 답을 척척 내어놓는다.
황후는 대화가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것에 크게 만족해했다.
“일리오르에게도 그리 전해 주길 바라요. 그대와 내가 아주 절친한 친우가 되었다고 말이에요. 우리의 우정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는 말도 함께.”
“……그리하겠습니다.”
사라는 뜬금없이 나온 2황자의 이름에 잠시 의아해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황후는 은근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우리 황제 폐하께서 애가 타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 나와 함께 있어 줄래요?”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황후는 황제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는 것을 기어코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자식이 둘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황후 사이의 골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어 보였다.
“그 늙은이가 이리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양을 보니, 1황자의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예, 황후 폐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니. 황제 폐하께서도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내 도움을 받아서까지 밀런 소백작을 찾는다는 말은, 그대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열쇠가 있다는 건가요?”
“황제 폐하께서 그리 바라고 계실 뿐입니다.”
“저런.”
황후는 고개를 내저으며 눈을 잠시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주 날카로운 위압감이 스며 있었다.
“그럼 그 늙은이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그대가 나를 기만하는 건가요.”
“폐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조언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상황일 뿐, 제게 그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의 대답에 황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런 소백작. 나는 오늘 그대에게 우정을 말했어요, 폐하께서는 그대에게 무엇을 말할 것 같나요?”
황제와 알현을 하기 전, 황후가 사라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황제의 고민이 깊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일 사라가 황제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면, 황후의 적은 황제뿐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황후 폐하의 우정만은 못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라는 그런 황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둠의 꽃’에서 황태후의 자리에 올라 황후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의 눈 밖에 굳이 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래에 클로드를 위해서라도 황후의 도움은 필요했다.
“……날 기쁘게 하는 대답을 잘 알고 있군요.”
“감사합니다.”
황후는 그제야 다시 한번 사라에게 평안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한 꺼풀 그 경계를 벗겨 낸 목소리로 말했다.
“1황자 따위 알게 뭐람. 뒈져 버리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