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5화
“그 새끼가 어떤 짓을 했든 신경 쓰지 않아요. 이참에 하극상이나 제대로 저지르고 콱 뒈져 버렸으면 좋겠네요.”
황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속한 말들을 끊임없이 쏟아 냈다.
“……황후 폐하?”
“아, 미안해요. 놀랐나요? 요즘 속에 있는 말을 전부 꺼내 놓지 않으면 답답해져서 말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양 웃으며 말하는 황후의 모습은 언제 그런 말들을 쏟아 냈냐는 양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사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방금 저가 들은 말이 진정 황후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사라의 모습에 황후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밀런 소백작과 나는 우정을 나눈 사이가 되었으니 앞으로도 이렇게 편히 지냈으면 해요.”
사라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황후가 어둠의 꽃에서도 저런 캐릭터였나?’
그녀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쓴 소설 속 황후의 모습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하지만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간 터라 황후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라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사이, 황후는 나름대로 그녀와 편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평생 죽은 황후를 붙잡고 살아갈 황제와 누가 혼인을 하고 싶어 했겠어요. 심지어 그는 장성한 후계자가 있었고, 늙었죠. 매력이라곤 내게 황후라는 지위를 줄 수 있다는 것뿐이었어요.”
“폐하께서는 그마저도 허울뿐이라고 공언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그렇답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누가 제 딸을 내어 주고 싶어 했겠어요?”
사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황제는 황후를 맞이할 때 이 제국의 유일한 황후는 죽은 제 반려뿐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다.
그저 직위만 황후일 뿐, 제대로 된 황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이번에 황후를 배출한 오를린 후작도 외척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폐하께 유일한 외척은 벌룬 후작 하나뿐이죠.”
“오를린 후작께서는 괜찮다고 하시던가요?”
“모욕으로 점철된 황후가 될 거라는 생각, 왜 하지 않았겠어요? 다만 저도 아버지도 그저 황후라는 지위에 만족하기에는 좀 똑똑했답니다.”
황후는 손수 제 찻잔에 찻물을 부으며 올라오는 향을 음미했다.
그러곤 찻잔을 들어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이 제국의 황후라는 찬란한 자리에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아마 황제는 그것을 평생토록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럼 왜 황후가 되기로 결심하셨나요?”
“모두 1황자 덕분이었답니다. 1황자를 보니 결심을 할 수 있었지요.”
“…….”
“진정한 황후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진정한 이 제국의 황태후는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 새끼가 하는 꼴을 보니.”
황후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당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그 늙은이의 유일한 아드님은 등신이잖아.”
“……!”
우아하기 그지없는 행동으로 저속한 말을 입에 올리는 황후의 모습에는 위화감이 없었다.
놀란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황후는 재밌다는 듯 깔깔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이것도 내 며늘아기에게 배운 말이랍니다. 어찌나 속이 탁 트이는지.”
“페넬로아 님과 의미 있는 교류를 하셨나 보네요.”
“그럼요.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며늘아기예요.”
사라는 일전에 보았던 페넬로아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병색이 짙어 여려 보이기만 하던 페넬로아의 입에서 저런 말들이 나왔다니.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보아선 모를 일이었다.
“내가 어떤 아들을 낳아도 그 새끼보단 잘 키울 자신이 있었거든요. 역시나 내 두 아드님이 그 등신보다 잘 자라 주었고, 이렇게 예쁜 며늘아기를 데려오기까지 했죠.”
“정말…… 잘되었군요.”
사라는 웃으며 황후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역시 밀런 소백작과는 말이 잘 통하는군요. 우린 앞으로 더 자주 만나 보아야겠어요.”
황후는 마치 소녀처럼 맑게 웃으며 좋아라 했다.
사라는 조금 불편해졌지만 그녀는 사라가 조금 더 편해진 듯했다.
“그간 이리 편히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어요. 레이디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그리 편히 하겠어요.”
“황후 폐하께서 저를 너무 특별 취급 해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대는 소백작이니까요. 그저 ‘레이디’는 아니죠. 내가 제국의 안살림을 틀어쥐게 될 것처럼, 그대는 그대의 것을 가지게 될 사람이 아니겠어요?”
“……과연 그렇군요.”
황후의 말에 사라는 어째서 그녀가 이토록 편하게 제 속을 보여 주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이 말버릇 하나에 관심을 가지기엔 그대는 좀 더 많은 것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친우로 삼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죠.”
사라가 소백작이라는 것. 그리고 1황자와 척을 진 입장이라는 것. 일레온의 반려인 페넬로아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사라 밀런은 황후에게 있어서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렇기에 황후는 자신의 방식대로 사라를 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참으로 영광된 자리군요.”
그리고 사라는 그것을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알톤 영지에 다녀온 뒤, 황후 궁에 한 번 더 방문해도 될까요?”
“오, 내 도움이 필요한가요?”
“모두에게 제가 황후 폐하의 영광된 친우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요. 함께 파티를 주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요.”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밀런 소백작. 친우와 함께 파티를 주최하는 것이 제 평생의 소원이었답니다.”
사라와 황후는 서로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마주 웃어 보였다.
각각의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다.
“아주 즐거운 파티가 될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야겠죠.”
황후는 사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손을 아주 친근하게 마주 잡았다.
앞으로 클로드와 암브로시아에게 가장 큰 협력자를 끌어들였으니, 그녀의 작은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리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이제 그만 일어나 보도록 하세요, 밀런 소백작.”
“제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황후 폐하.”
“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는 할 필요 없답니다. 저는 이제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겠어요.”
황후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그러자 티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일제히 들어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문 앞에는 황제의 명을 받고 온 기사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시녀들의 불편한 얼굴을 보아 문 밖에서 그와 언쟁이 조금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티타임치고는 짧게 끝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아주 많아 보이시는군. 나의 폐하께서.”
그 기사의 얼굴을 보고 황후는 서슬 퍼런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밀런 소백작님을 모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황후 폐하.”
“그리하게.”
황후는 관심이 없다는 양 사라에게는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차를 홀짝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기사는 이내 사라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시지요, 밀런 소백작님.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라는 기사의 손을 잡고 티룸을 나서며 황후에게 흔한 작별 인사 하나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처럼 말이다.
사라는 황후 궁을 완전히 나서고 나서야 굳은 얼굴을 풀고 기사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야 좀 살겠어요. 폐하께서 오래 기다리셨나요?”
“황후 폐하께서 밀런 소백작님에게 무례하진 않았을까 걱정하셨습니다.”
“일이 시끄러워지지 않게 처리하기 위한 명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폐하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요.”
사라의 말에 기사는 작게 감탄하였다.
그녀의 말만 얼핏 들어 본다면 황제의 명에 심기가 뒤틀린 황후를 그대로 다 견디고 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과연, 밀런가는 언제나 황실에 충성하였지요.”
약간의 경계가 묻어 나오던 기사의 눈빛이 평안하게 풀리는 것을 확인한 사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더욱 그리해야지요.”
기사는 그런 사라의 얼굴을 보고 은근히 뺨을 붉히며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고는 그전보다 더욱 친근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시 소백작님이십니다. 어째서 폐하가 소백작님을 택하셨는지, 이제야 감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에 힘이 나는군요.”
사라가 적당히 맞장구 쳐 주는 말에도 기사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라가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준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황실에 충성하고 황제가 은밀히 찾을 정도로 현명함을 갖춘 밀런 소백작의 손을 잡을수만 있다면 그의 앞날도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미 사라와 손을 잡고 식을 치르는 것까지 계획을 세워 놓은 기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폐하께서 말씀이 길어지실 듯하니, 그 이후에 제가 암브로시아 공작가까지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나. 친절에 감사하지만…….”
노골적인 사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사라가 웃으며 거절하려던 찰나, 기사에게 잡힌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그러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 대신 거절의 말을 해 주었다.
“사양하도록 하지.”
“암브로시아 공작님?”
“밀런 소백작의 에스코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차지했거든.”
에단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얼굴을 하고선 노골적으로 기사에게 경고했다.
“그러니 물러서. 자네에게까지 돌아갈 기회는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