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6화
“……!”
기사는 화들짝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황궁 기사인 그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검집 위에 손을 올렸던 기사가 천천히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암브로시아 공작님, 어떻게…….”
“여기부터는 내가 밀런 소백작을 에스코트할 테니, 자네는 먼저 가서 폐하께 곧 밀런 소백작이 도착할 거라고 말을 전해 주면 좋겠군.”
기사는 놀라 커진 눈을 깜빡이다가 에단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예, 옙! 암브로시아 공작님.”
그는 순순히 뒤를 돌아 가면서도 힐긋, 사라의 손을 잡고 이끄는 에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라 밀런에게 정신이 팔려서 에단이 다가오는 기척을 읽지 못했던 것이리라, 여기며 말이다.
기사가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사라는 그제야 에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황제와 함께 있는 줄로만 알았던 에단이 제 눈앞에 나타났다.
그를 조금 더 일찍 보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사라는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아직 황제 궁으로 가려면 멀었는데.”
황제 궁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남아 있었다.
기존에 있던 황후 궁은 황제 궁과 거리가 가까웠으나, 그것은 죽은 황후의 것이었다.
현 황후가 거처하는 황후 궁은 황제 궁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둔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먼 거리였기에 사라는 조금 더 걸어가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탈 예정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마중 나왔습니다.”
“기다리시면 제가 갈 텐데.”
“서로 오면,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에단의 말에 사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맞는 말인데 그 말에 제 심장이 떨려 오는 것은 아마 그녀가 에단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미치게 좋았다.
“황후와의 만남은 어땠습니까?”
“아,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좋은 친우가 되기로 했죠.”
“……황후와?”
“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어요.”
사라의 말에 에단의 눈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황후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군요.”
“……앞으로 그리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는 사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황제와 황후 중 어느 쪽을 더 동정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입니다.”
에단의 말에 사라는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황제와 황후를 동정하고 있었던가.
그녀가 질문에 담긴 의미를 가늠해 보고 있을 무렵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만일 이번 알톤 영지의 일을 올리븐이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도 사라는 아마 황궁에서 황후를 만난 뒤 황제를 보러 갔을 것입니다.”
“……맞아요.”
사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이번 일이 올리븐의 짓이 아니었더라도, 아마 그녀는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을 것이다.
“크롬벨 제국의 귀족으로서 그대가 가지고 있는 의무, 그 이상의 것을 베풀고 있지요.”
“그건…….”
“암브로시아에게도 마찬가지고.”
사라의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그제야 에단이 건넸던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질투를 하고 있었다.
사라를 독점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궁금해집니다. 그대의 자비가 어디까지일지.”
사라는 에단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단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라와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웃었다.
“화나셨어요?”
“조금.”
에단은 다시 사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다시 걸음을 옮기며 사라는 기분 좋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눌렀다.
“암브로시아가 독점하기에는 그대의 자비는 제국을 덮고도 남을 정도니까.”
에단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독점욕이 묻어 나왔다.
그것이 은은하게 느껴져서 사라의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글쎄요.”
그녀는 은근히 대답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 눈길을 모른 척 받아넘기며 사라는 해사하게 웃었다.
“아까 황제와 황후 중 누굴 더 동정하냐고 물었죠?”
“그랬습니다.”
“둘 다 아니지만, 굳이 한 명을 뽑자면 저는 황제를 동정하는 쪽이에요.”
“……?”
사라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는 에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제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 * *
황제의 비밀 집무실에 에단 암브로시아와 사라 밀런이 나란히 섰다.
“드디어 그 귀한 얼굴을 보여 주는 건가, 밀런 소백작.”
황제의 눈가는 꺼멓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라를 보는 시선 끝에는 마치 시리게 번뜩이는 칼날이 달려 있는 듯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카제르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지도 모르는데…….”
황제는 두통이 극심한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것이 밀런 소백작의 탓은 아니지요, 폐하.”
에단이 황제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희미한 원망을 지적했다.
황제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미안하군.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한탄이라고 여겨 주게, 밀런 소백작.”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진심으로 저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답니다.”
사라의 말에 황제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직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마탑의 장로들과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마탑이 나섰단 말인가?”
사라의 말에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탑이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흥미롭겠지만, 한 나라의 지배자에게는 그 흥미가 아주 남달랐다.
“마탑이라……. 그래, 그대 역시 마법사이니 마탑과 연관이 있겠지.”
사라는 자식 걱정을 앞세운 아비의 눈빛을 지우고 지배자의 눈을 하고 있는 황제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이번 일은 마법사들의 영역이니만큼 마탑에서 처리하고 싶어 합니다.”
“알톤 영지는 제국의 땅이야. 제국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내 눈과 귀에 들어와야 한다는 건 모르지 않을 테지.”
“물론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폐하의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오, 그대가 마탑과 황실의 연결 고리가 되어 주겠나?”
황제의 얼굴에는 금방 화색이 돌았다.
알톤 영지에 대한 상황은 크롬벨 제국이 비밀에 부치긴 했지만 암암리에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대륙의 일인자인 크롬벨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이 작은 균열로 인해 다른 국가들에게 무언가 명분을 쥐여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슬기롭게, 현명하게, 깔끔하게 처리해 내는 것이 제국의 위상을 보여 주는 일이리라.
“마탑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크롬벨에서는 그 어떠한 대가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네. 그렇게 전해 주게.”
황제의 머릿속에는 이번 기회를 어떻게 잡고 휘둘러야 할지 여러 방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머나.”
사라는 황제의 말에 입가를 가리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마탑에 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
“음? 그럼 밀런 소백작 그대 혼자 이 일을 처리하겠다는 건가? 그게 마탑의 뜻인가?”
방금 전까지 부풀어 있던 황제의 야망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미간을 한껏 좁히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사라 밀런이 마법사라는 점은 알고 있으나, 일개 마법사 하나가 나서는 것과 마탑이 나서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사라를 제국의 귀족으로 잡아 두기 위해선 그녀의 동의 없이 마법사라는 것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주변에서 크롬벨을 노리는 세력들 몰래 조용히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설마 마탑에서는 그대가 크롬벨의 귀족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건가. 그대의 도움은 제국의 귀족으로서 마땅히 이행해야만 하는 의무야.”
“그렇지요.”
“그렇다면 제국에서 마탑에 내어 줄 대가 또한 없어. 이 또한 모르지 않겠지?”
“그 또한 알고 있지요.”
사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말에 수긍하였다.
황제는 해사하게 미소 짓고 있는 사라의 얼굴에서 그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밀런 소백작.”
“예, 폐하.”
“정녕 내가 진정으로 묻기 전까지 그리 입을 다물고 있을 텐가?”
황제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은은한 노기가 묻어 나왔다.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그녀를 사용하려 하는 황제의 태도에 잠깐 작은 심술을 부려 보았던 사라였다.
그녀는 이제 그만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 말은 폐하께서 마탑을 필요로 하시면 굳이 저를 통해 전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제가, 곧 마탑이니까요.”
평안하게 흘러나오는 사라의 목소리에 잠시 그 뜻을 헤아려 보던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