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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27화 (127/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7화

“그대 설마……!”

“굳이 폐하께 고할 필요가 없기에 그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마탑의 대장로입니다.”

사라의 두 눈에는 푸른빛이 일렁였으며, 황제에게 고하는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서서 황제를 내려다보는 사라의 모습은 평소 온화하게 그의 명을 받던 밀런 소백작이 아니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힘을 쥐고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압도적인 절대자의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마탑의 대장로라니……. 설마 마탑의 주인이 그대란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진 황제의 눈은 희미하게 떨려 오고 있었다.

“마탑은 대장로인 제가 이끄는 것이 맞고 저는 탑주라고도 불리니, 그렇습니다.”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황제의 머릿속에 온갖 계산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황제의 입꼬리가 천천히 휘어 올라갔다.

“하, 하하……, 하하하! 그대가 굳이 거짓을 입에 올릴 이유가 없으니. 정말 마탑주겠군.”

들뜬 황제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희열이 묻어 나왔다.

“드디어 이 제국이 마탑을……!”

“폐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마탑의 대장로와 사라 밀런은 다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밀런 소백작.”

“애석하게도 저는 마탑에서의 저와 사라 밀런을 철저하게 구분했으니까요.”

사라의 말에 금방이라도 대륙을 삼킬 수 있을 것처럼 웅장하게 피어오르던 황제의 야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마치 철저하게 선을 긋는 듯한 사라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달래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크롬벨 제국의 소백작이야. 그 직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마 모르진 않겠지?”

“물론 사라 밀런으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마탑의 대장로로서는 그리 의미가 없지요.”

“밀런 소백작!”

황제가 노성을 터트렸으나 사라는 오히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두려워해야 할 황제의 진노가 그녀에게는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하.”

황제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지금 바로 눈앞에 존재했다.

여태껏 황제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한없이 충실한 태도로 제국을 위해 나서 주었던 사라 밀런이라는 존재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마탑에서 제가 사라 밀런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장로들과 그들을 따르는 몇몇 마법사들 뿐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도 알게 되셨으니 그리 소수라 부를 수도 없겠군요.”

“내가 그대의 정체를 밝힌다고 하면 어떡하겠는가. 제국의 귀족이 마법사라고 공표하는 것만으로도 크롬벨이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아.”

“그러하다면 곧 그 마법사가 제국을 떠나 마탑에 틀어박혔다는 소식도 이어서 공표가 되겠지요.”

“진정 내게 이럴 것인가? 이것이 밀런 백작가의 뜻이란 말인가!”

“이것은 마탑주의 뜻입니다.”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

사라의 말에 황제가 입술을 깨물며 진노했다. 그러자 옆에서 느긋한 얼굴로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제국 내에서 밀런 소백작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암브로시아가 유일합니다.”

“암브로시아 공작!”

“밀런 소백작은 제 아들의 소중한 스승이자 유모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으니, 폐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정체가 밝혀지면 그녀가 제국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말이었다.

암브로시아는 그런 그녀를 잡아 두기 위해 입을 다물 것임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암브로시아의 도움 없이는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황제는 분통을 터트렸다.

“자네마저 이럴 것인가!”

“폐하께서 과욕을 부리시니, 신하로서 충언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에단은 황제에게 다가가 서류 한 장을 내어 주었다.

마탑과 황실과의 계약서였다. 공란 밑에는 마탑을 뜻하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여기 있는 마탑주와 협상을 하신 뒤 제국에서 필요한 것은 취하시고, 마탑에 내어 줄 것이 있다면 내어 주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거래지요.”

“지금 내게 마탑과 거래를 하라고 하는 건가, 공작? 제국의 귀족이 제 의무를 하지 않고 있는데?”

늙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톤 영지에 사랑하는 유일한 자식이 갇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황제는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에단은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허리를 숙여 황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은근하고도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밀런 소백작이 앞서서 설명했지만, 저희는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도, 마탑주라는 사실도 어느 것 하나 증명하지 못합니다.”

에단의 말에 황제는 서슬 퍼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라 밀런이 마법사라는 것은 비밀로 한다. 그 대가로 사라 밀런은 황제가 원할 때 마법사로서 도움을 준다.

그것이 그들의 계약 조건이었다. 사라가 밀런 소백작이라는 직위를 받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제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귀족의 의무로 묶어 두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 조건의 허점을 지적했다.

“알톤 영지의 일은 누가 보아도 마법사들의 영역입니다. 밀런 소백작이라는 귀족 하나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비공개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에 그녀를 끌어들일 순 없으십니다.”

“그럼 지금 1황자가 그곳에서 죽어 가는 것을, 감히 이 제국의 영지가 무너지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그러지 않기 위해 지금 마탑을 대표한 마탑의 대장로가 이곳에 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제국에게 받아 낼 대가는 마탑에서 확실하게 챙겨 가겠다는 걸로 들리는군.”

“역시 현명하십니다.”

황제는 바로 에단이 말하고자 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라 밀런에게 마탑주와 같은 영향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황제에게 정체를 밝힌 이유는 그저 원활한 협상을 위한 것이지, 그에게 마탑의 힘을 내어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탑주가 아닌 사라 밀런의 도움은 기대해 볼 수 있겠지.”

“밀런 백작가는 언제나 황실에 충성할 것입니다.”

황제가 한발 물러나자 에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금 허리를 폈고, 사라는 얼굴에 충실한 종의 가면을 썼다.

“오늘 폐하의 청을 받아 비밀리에 알현한 것은 마탑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해 보게.”

“마탑은 이번 일이 흑마법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흑마법? 그것은 몇백 년 전에 명맥이 끊겼지 않나.”

황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흑마법은 대륙의 공적이었다.

신전과 제국군, 그리고 왕국군들이 연합하여 그 뿌리를 뽑아냈다는 기록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크롬벨 제국에서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좋지 못한 신호였다.

“그래서 알톤 영지에서 흑마법의 잔재를 다시 한번 뿌리째 뽑아내려 합니다.”

“신전은 알고 있는가?”

황제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직은 모릅니다. 암브로시아에서 철저하게 신전으로 가는 정보를 차단하고 있습니다만,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요.”

“신전까지 알게 된다면 골치 아파져.”

“그렇겠지요.”

흑마법은 신전이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이다.

국교가 없는 크롬벨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신전은 아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황제의 얼굴이 아주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사라는 그 모습을 보며 매우 애석하다는 듯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흑마법사가 1황자에게 접근했던 정황이 있는 바, 마탑의 장로들은 1황자가 흑마법사에게 협조를 했다면 마탑의 법으로 처리하려 합니다.”

“마탑의 법이라니?”

“흑마법을 사용한 자는 마나의 고리를 부순 뒤 버린다. 이것이 마탑의 법이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것까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1황자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면 마탑이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 가겠다는 말인가?”

“어머나, 그렇게도 들릴 수 있군요.”

“밀런 소백작!”

그전에 진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황제의 분노가 사라에게 쏟아졌다.

한평생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의 살기가 묵직하게 그녀의 온몸을 짓눌렀다.

피부를 쿡쿡 찌르는 서슬 퍼런 한기에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사라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사라는 마력을 감싼 손을 한 번 휘둘러 황제의 살기를 가볍게 넘겨 버리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감히 내 앞에서 제국의 황자가 흑마법을 썼다고 모함을 해? 제정신인가?”

“물론 제정신입니다, 폐하.”

사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자 황제는 뒷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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