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9화
“안 될 것은 없지만…… 공작님에게도 여쭤봐야지요.”
“아버지는 좋다고 했어!”
“네?”
“내가 미리 다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하셨어!”
클로드의 대답에 사라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공작님이 괜찮다고 하셨다고요? 저랑 함께 자는 거라고도 말씀드렸어요?”
“응!”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클로드의 말에 사라의 동공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그러니까 클로드의 손을 잡고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동의했다는 건가?
에단 암브로시아 그 남자가?
사라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갈 때 클로드가 웃으며 덧붙였다.
“유모만 괜찮다면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유모도 좋다고 했다고 전해 드렸어.”
“네?”
클로드의 말에 사라는 잠시 아이의 말을 곱씹었다.
에단에게 클로드가 미리 말을 해 놓았는데, 사라도 좋다고 했다며 미리 대답을 해 놨다는 게 아닌가.
어딘가 순서가 이상하게 꼬여 있었다.
클로드가 먼저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하고선 말했다.
“유모 나랑 같이 자는 거 싫어?”
“아뇨,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 괜찮은 거지?”
클로드의 눈은 마치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서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기에 사라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기는 한데…….”
“좋아! 그럼 기다리면 아버지도 오실 거야.”
“공작님이 오실 거라고요?”
“응, 유모 방에서 잘 거라고 했거든.”
사라는 순간 헛숨을 삼키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공작님이 그럼 지금 여기로 오실 거라는 말씀이세요?”
“응, 그렇다니까?”
클로드는 뭐가 잘못됐냐는 듯 사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의 천진한 얼굴에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던 사라는 급히 방 안을 살펴보았다.
매번 사용인들이 깔끔하게 청소해 주는 방이지만 에단이 올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자꾸만 다급해졌다.
“일단 이것부터 치우고…….”
사라의 손짓에 방에 놓인 물건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닥에 내려놓은 마법과 관련된 서책부터 사용인들은 건드릴 수 없는 개인적인 물건들과 가방들까지 전부 다.
“와아!”
클로드는 방 안의 물건들이 푸른빛에 감싸여 떠오르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아이는 이제 침대에 앉아서 대놓고 사라가 급히 방 정리를 하는 걸 구경했다.
“방이 너무 더러운데……. 공작님은 언제 오신대요?”
“몰라? 이제 곧 오시지 않을까?”
“아아, 정말!”
클로드의 대답에 사라의 손짓은 더욱 다급해졌다.
서랍장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 서책들이 쑤셔 박혔고, 드레스 룸의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사라가 자주 쓰던 액세서리들이 처박혔다.
사용인들과 카드 게임을 하느라 꺼내 놓았던 카드들도 한 장씩 줄을 서서 정리함에 들어갔다.
“안 치워도 될 것 같은데.”
클로드는 지휘를 하는 것처럼 바삐 움직이는 사라의 손짓을 보며 중얼거렸다.
“안 돼요, 너무 더럽단 말이에요.”
“그전에는 신경 안 썼잖아.”
“그때는 그때고요.”
“흐응……, 지금은 아니란 말이지?”
사라의 대답에 아이의 눈이 다시 한번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예전에는 에단이나 클로드가 방에 들어갔을 때 신경도 쓰지 않던 것이 신경 쓰인다는 건, 사라의 심경에 변화가 있다는 뜻 아닐까.
그것도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쪽으로 말이다.
“있잖아, 유모.”
“네.”
“지금 그 차림으로 잘 거야?”
“음?”
사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제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가벼운 소재의 이브닝드레스 차림에 반투명한 숄을 걸치고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어야지!”
“그야 그렇지만…….”
사라는 잠시 고민했다. 에단과 함께 한 침대에 눕게 될 텐데 어떤 잠옷을 입어야 할까.
평소대로 슬립만 걸치기에는 부끄러웠고, 그렇다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잠을 청하기엔 불편했다.
“으음.”
고민하던 사라가 가볍게 손짓하자 닫혔던 드레스 룸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잠옷이 허공을 날아 사라와 클로드 앞에 촤라락 펼쳐졌다.
“어떤 게 좋을까요?”
“음, 나는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쁜 것 같아!”
클로드는 손수 사라의 잠옷을 골라 주며 맑게 웃었다.
사라는 아이가 왜 저렇게 좋아라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마침 에단이 사라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사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헉, 잠시만요!”
사라는 금방 울상이 되어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유모, 저거, 저거!”
“이거요?”
“응!”
“알았어요!”
다급하게 발만 동동 구르는 사라를 보며 클로드가 결국 잠옷을 골라 주었다.
옅은 베이지 색의 실크 원단으로 이루어진 슬립 원피스였는데 다른 것과는 다르게 긴 팔에 발목 위에까지 늘어져 그리 민망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위에 걸치는 숄은 사라의 머리 색과 같은 밝은 갈색이라서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고마워요, 클로드 님.”
사라가 따악 하고 손을 튕기자 방금 전까지 허공에 떠올라 있던 슬립 원피스가 바로 그녀에게 입혀졌다.
반대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이브닝드레스는 슬립 원피스가 있던 곳에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떠오른 잠옷들은 전부 다시 드레스 룸으로 촤라라락 줄을 지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탁 하고 드레스 룸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에단이 들어왔다.
“클로드는 아직 잠들지 않았습니까?”
“네,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시네요.”
여태까지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클로드는 도로 침대 위에 누우며 이불을 입술까지 끌어 올렸다.
그렇지 않으면 입술이 찢어질 것처럼 웃고 있는 걸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부리지 않던 투정을 다 부리는군요.”
에단은 그런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작게 웃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지만 클로드는 그것조차 좋다고 헤헤 웃었다.
클로드는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매우 좋아했다.
“사라는 괜찮겠습니까? 혹시 불편하다면…….”
“아뇨, 아뇨! 저는 괜찮아요.”
사라는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에단의 시선이 닿자 왜인지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단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은 것 맞습니까?”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저런, 바로 들켰군.”
에단과 클로드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사라는 자신의 뺨에 붉은 홍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로 절 놀리시면 안 되죠.”
“하하.”
에단은 잠시 웃다가 이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클로드의 투정을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전부 다 받아 줄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원래 오래 떨어지게 되면 서운해하는 게 당연해요. 클로드 님이 너무 어른스러우셔서 제가 신경을 못 썼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클로드가 겨우 여섯 살인 걸 잊어버리니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렇게 귀엽게 구신다니까.”
사라는 클로드의 가슴께를 토닥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하는 유모와 아버지의 손길을 동시에 받고 있는 클로드의 두 뺨은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그래도 원하는 걸 잘 조를 줄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전부 사라의 덕이지요.”
에단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지금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두려워해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용인들의 입을 통해 전하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제 그를 찾아와 당당하게 같이 자면 좋겠다는 요구 또한 할 줄 알게 되었다.
에단은 그런 아이의 변화가 달가웠다.
“앞으로도 원하는 게 있다면 주저 말고 말해야 한다. 알겠니.”
“네, 아버지.”
클로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다가 이내 사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모, 빨리 여기 누워. 여기.”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손길에는 기대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여기예요.”
그리고 에단에게도 마찬가지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재촉했다.
양옆에 아버지와 유모를 꼭 함께 눕힌 뒤에야 잠에 들 기세였다.
오늘 딱 그렇게 결심한 클로드의 의지는 아주 대단했다.
“그래.”
에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클로드가 가리키는 옆자리에 몸을 누였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옆에 눕게 된 클로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건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으니 아이의 작은 체구가 더 생생하게 느껴져 그는 은근히 미간을 모았다.
‘클로드의 식단을 좀 바꿔야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머리 아래에 팔을 밀어 넣었다.
“……!”
졸지에 아버지의 팔베개를 하고 눕게 된 클로드는 눈을 크게 뜨며 느리게 깜빡였다.
당황스러움과 좋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이의 얼굴이 퍽 귀여워서 사라는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드는 다시 한번 사라를 재촉했다.
“유모도 빨리!”
“알았어요, 알았어요.”
사라는 결국 웃으며 풀썩, 클로드의 옆에 누웠다.
그러곤 클로드의 옆에 바싹 붙어 아이의 허리춤에 손을 감으며 끌어안았다.
“이러면 따뜻하고 좋죠?”
“응, 좋아.”
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유모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클로드의 입술 사이로 만족스러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클로드의 양쪽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쿵쿵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