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30화
두 사람 사이에 누운 클로드는 실실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양옆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알톤 영지에서 돌아오면 매일 이렇게 해 달라고 해야지.’
클로드는 그렇게 결심하며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과 나직하게 깔리는 웃음소리,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들이 온몸의 긴장을 풀어 주며 순식간에 나른하게 만들었다.
“……히.”
그렇게 클로드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스르륵 잠이 들었다.
느슨하게 풀리는 입꼬리와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이내 잠잠해지자 사라는 손을 들어 클로드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잠든 것 같아요.”
클로드가 잠든 것을 확인한 사라가 웃으며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그러곤 순식간에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아이들은.”
사라의 말에 클로드와 함께 눈을 감았던 에단이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우리 클로드가 유독 사랑스럽긴 합니다.”
은근한 자식 자랑이 묻어 나오는 대답에 사라는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맞아요. 우리 클로드 님의 귀여움을 누가 따라잡겠어요.”
사라 또한 클로드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라서 에단이 쿵 하면 짝 하는 것처럼 받아쳤다.
에단은 천천히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사라와 눈을 마주했다.
그렇게 에단과 사라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동안 웃었다.
“알톤 영지로 가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은 전부 끝내신 거예요?”
황궁에서 돌아온 뒤로 알톤 영지로 가는 일정이 너무나 촉박하게 잡혔다.
예상보다 황제가 조급해했기에 에단과 사라는 이렇게 느긋하게 마주 보며 대화할 기회들을 많이 놓치곤 했다.
실은 알톤 영지로 떠나게 된다면 그 기간 동안 내내 붙어 있을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사라였다.
출발하기 전에 모처럼 이렇게 에단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사라는 클로드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일단 급한 것만 대충 처리했습니다. 사라는, 제자들과 이야기는 다 끝냈습니까?”
“네, 필요한 것들은 전부 다 말해 줬어요. 그 아이들이 잘 해내 주길 바라야죠.”
그렇게 말하며 사라는 잠든 클로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클로드 님께서 저와 공작님이 없는 시간을 잘 견뎌 주어야 할 텐데요.”
“……이 과정을 거치면 좀 더 단단해져 있을 겁니다.”
“알아요. 알지만, 단단해지기엔 클로드 님은 아직 많이 어려서 걱정이 되네요.”
사라의 목소리는 씁쓸하게 갈라져 있었다.
아이만 혼자 집에 두고 알톤 영지에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녀와 에단이 저택을 비운 뒤에 노출될 위협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클로드를 위해 사라의 제자들을 저택에 남기고 가지 않습니까. 그들이 잘 돌봐 줄 겁니다.”
“그렇겠죠. 공작님께서 믿어 주셔서 다행이에요. 그 아이들이 실력만큼은 뛰어나답니다.”
턱 끝을 살짝 치켜드는 사라의 얼굴에는 제자들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에단은 그 모습을 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말했다.
“사라가 가르쳤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나. 당연하죠.”
너무나 당연하게 쏟아지는 에단의 칭찬에 사라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에단은 적당히 그녀의 기분에 맞춰 줄 줄 아는 남자였고 그와의 대화는 막힘 없이 유쾌하게 흘러갔다.
사라는 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에단의 다정함 덕분임을 알고 있었다.
“내일 일찍이 출발할 테지만, 귀족들도 그렇고 제국민들도 많이 모여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푹 쉬도록 해요, 사라.”
“네, 그럴게요. 공작님은 여기서 안 주무시는 건가요?”
사라의 물음에 에단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픽, 하고 웃으며 답했다.
“레이디의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 파렴치하지 않습니다.”
담백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라는 은연중에 생각했다.
‘조금은 파렴치해도 좋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그런 속내를 에단에게 들킬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아주 매너가 좋으시네요, 공작님께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담은 말이었지만, 에단에게는 그러니 이만 나가 달라는 말로 들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에단은 한숨처럼 튀어나오려는 아쉬움을 삼키고는 클로드의 머리 밑에 대 주었던 팔을 조심스럽게 빼려고 했다.
“흐응, 으응.”
그러자 깊게 잠든 줄로만 알았던 클로드의 입술 사이로 칭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헉, 아직 깊게는 잠들지 않았나 봐요.”
팔을 빼려던 에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사라 또한 순간적으로 긴장해 목소리를 극도로 낮췄다.
“흐으으…….”
하지만 이미 조금 잠이 깨 버린 클로드는 울먹이며 잠투정을 시작했다.
“우리 클로드 님 착하죠, 다시 푹 주무시는 거예요.”
사라는 냉큼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누였다.
그러곤 클로드의 가슴께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토닥이며 낮고 자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착하죠, 우리 아가.”
“……으응.”
잠깐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뜨려던 클로드의 얼굴이 다시 느슨하게 풀어졌다.
사라는 그 순간 고개를 들었고, 에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꼼짝없이 여기서 같이 자게 생겼어.’
그렇게 생각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자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풉.”
“하하.”
속절없이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다시 잠에 빠지려 했던 클로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흐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졸린 아이의 짜증 섞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튀어나왔다.
* * *
이른 아침부터 암브로시아 공작저 앞에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는 물론이고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잡상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세상에 마법사가 정말 있었단 말이야?”
“그렇다지 않아!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마탑과 협상해 초빙해 왔다지 뭐야.”
“이번에 알톤인가? 거기에 아주 큰 일이 났대. 일단 사람들은 접근하기도 전에 죽는다지 뭐야.”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곳이 되어 버렸다지? 마법사가 간다고 해도 해결이 될지…….”
“이 사람아. 이번에 암브로시아 공작님과 같이 움직이는 게 마법사야, 마법사! 마법사가 못 하는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널리 알려진 이번 사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 바빴다.
암브로시아 저택 밖의 상황은 이러했는데, 그 안쪽의 정원을 넘어 저택 정문 앞에는 또 다른 종류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이번에 인사라도 한번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흠, 그 콧대 높은 마탑의 마법사를 어떻게 불러냈는지……. 폐하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시군.”
“어찌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번에 암브로시아 공작은 마법사와 연이 닿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마법사가 그와 동행하겠지요.”
“맞아요. 두 황자 전하는 뒤늦게 출발하신다면서요?”
“안타깝군, 그래. 둘 중 한 명이라도 이번에 마법사와 동행했더라면 황위 계승권을 좀 더 공고히 했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암브로시아 공작의 차지가 된 건 아닐까요?”
배웅이라는 명목으로 암브로시아 저택 안까지 들어와 모여 있는 귀족들 또한 저 밖에서 수군거리는 제국민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떠들어 댔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자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으나, 그들 역시 마법사라는 존재가 대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체 황제가 어떻게 마법사를 설득한 거지?”
“황제에게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황위 계승을 논하기에는 아주 이른 시기가 아닐까?”
마법사의 등장으로 귀족 사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마법사와 인연을 맺게 될 황실과 암브로시아 공작가에 질투와 경외심을 동시에 느끼며 이번 알톤 영지 사건에 이목을 집중하였다.
“암브로시아 공작님과 마탑의 손님께서 나오십니다.”
그때 암브로시아의 집사 베론이 저택의 정문을 활짝 열며 나왔다.
그의 뒤로는 클로드를 품에 안고 있는 에단과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사라, 그리고 사용인들이 있었다.
“마법사는?”
“왜 보이질 않죠?”
귀족들은 고대하던 마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사라를 넘어서 그녀의 뒤까지 향하며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누굴 찾는 것인지 너무나 명확한 상황에 에단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새로운 얼굴을 찾는 모양이군.”
그러자 뜨끔한 귀족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암브로시아 공작님.”
“그저 알톤 영지로 향하는 길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답니다.”
누가 들어도 그저 겉으로만 체면을 챙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품에 안은 클로드를 내려놓고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대들이 기대하는 사람은 곧 보게 될 테니 그리 티 나게 찾지 않아도 좋아.”
에단의 말에 귀족들이 커흠커흠 헛기침을 하던 사이,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클로드였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
클로드가 손가락으로 어디 한군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모였다.
아이의 손가락 끝에는 서서히 나부끼던 바람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헉!”
“세상에!”
“저, 저게 무슨……!”
귀족들의 입에서 경악 어린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용돌이가 푸르른 빛으로 반짝이더니 이내 발부터 천천히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홀린 듯이 조금씩 등장하는 마법사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사라는 에단의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