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34화
페넬로아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일레온이 정말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음?”
“그이가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승산이 있을까요? 이번 일로 1황자님이 돌아온다면 황제 폐하의 마음이 또 어찌 될지 모르잖아요.”
그녀의 질문에 사라는 의아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 할 페넬로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 승산이 있기를 바라며 물어보는 질문이어야 할 터.
하지만 페넬로아의 얼굴에 가득한 불안함과 미묘한 껄끄러움은 그 반대인 것 같았다.
마치 3황자가 황위를 계승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미묘한 감정을 느낀 사라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페넬로아 님은 일레온 전하께서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나요?”
“원해요. 원하고 있어요. 일레온이 바라는 것이라면 뭐든 다 지지해 줄 거니까.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페넬로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려 오고 있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들이 두려우신가요?”
“……!”
사라의 말에 페넬로아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라의 눈빛은 모든 것을 다 품어 주는 푸른 바다처럼 푸르고도 깊어 보였다.
무엇을 말한다고 해도 전부 다 들어줄 것만 같은 자애가 느껴졌다.
어째서 비슷한 또래인 사라에게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페넬로아는 마치 자신보다 몇십 년을 더 살아온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맞아요. 일레온이 황위를 차지한 후가 나는 너무나 두려워요.”
“……페넬로아 님의 신분 때문에요?”
“네.”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페넬로아를 보며 사라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 연약해 보이진 않던데.’
황후가 며늘아기에게 배웠다던 그 찰진 쌍욕들을 생각해 보면 페넬로아는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편은 아니었다.
타국의 노예로 살아온 세월들이 그녀를 더욱더 강인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제 존재 자체가 일레온과 일렉사의 흠이 될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이라는 커다란 벽을 단 한 번도 넘어 보지 못한 것이 페넬로아를 한없이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확실히 저들을 상대하기에 불리하긴 하겠죠.”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고, 이 세계에서는 이 세계만의 법칙이 있었다.
마법사는 순리와 함께 걸어가는 존재, 사라는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법칙을 깨 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힘을 가진 그녀가 관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나비 효과를 불러오니까.
‘힘을 가지고 있기에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하지만…….’
하지만 페넬로아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그녀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작은 변화의 불씨를 앞당길 수 있는 존재였다.
페넬로아의 손에는 명분이라는 것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사라는 다정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
“3황자 전하께서 이미 페넬로아의 신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사랑하셨잖아요.”
“그렇지만 일레온이 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귀족들이 저를 받아들여 줄까요?”
페넬로아의 물음에 사라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페넬로아 님?”
“네?”
“귀족들이 받아 주기를 바라시면 안 되죠.”
“그런……!”
페넬로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받아들이게 만드는 거예요. 그들의 위에 서게 되실 테니까요. 그들은 감히 페넬로아 님의 지위에 대해 말을 보탤 자격이 없답니다.”
이어지는 사라의 말에 페넬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너 따위를 귀족들이 같냐, 라는 식으로 해석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자격지심이 얼마나 크게 부풀어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 일렉사 님이 3황자 전하의 뒤를 잇게 된다면 페넬로아 님은 황제의 어미가 됩니다. 일렉사 님의 모든 것이 페넬로아 님에게서 나왔는데, 그런 당신을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아무도 없어요.”
“……밀런 소백작님.”
페넬로아는 두 손을 모으고 사라를 바라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라가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그리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롬벨은 여자에게 작위가 허락되지 않는 제국이었다.
그럼에도 사라는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작위를 손에 쥐었고,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페넬로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니 부디, 3황자 전하께서 승리하셔서 이 제국의 주인이 되도록 온 힘을 다하셔야 합니다.”
사라의 말에 페넬로아의 얼굴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그전에는 막연한 걱정이 앞서 있었다면, 이번에는 희미한 의지가 엿보였다.
“페넬로아 님의 사람을 하나둘씩 만들어 보세요. 일단 1황자를 제외한 황자들이 황제가 된다면 황태후가 되어 황궁을 이끄실 황후 폐하부터 말이에요.”
“황후 폐하는 제게 다정하세요.”
“전에 만나 보았는데, 그래 보이더군요. 페넬로아 님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던데요?”
사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넬로아가 마냥 여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황후에게 옮겨붙은 말버릇으로 충분히 파악했던 그녀였다.
“황후 폐하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다음은 가문이에요.”
“오를린 후작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오를린 후작가는 폐하의 외척이죠. 황후 폐하는 오를린 후작가가 아닌 다른 가문이 황실의 외척이 되는 일은 피하려고 하실 거예요.”
“그게 제게 다정하신 이유가 될 수도 있겠군요.”
페넬로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황후가 온전히 페넬로아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로 직접 확인받는 것은 다른 느낌이었다.
황후의 입장에서는 혈혈단신인 페넬로아만큼 이용하기 쉬운 것은 또 없다고 여겼을 테니.
페넬로아가 비참한 처지일수록 황후는 더 손쉽게 그녀의 것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시면 안 되죠.”
“네? 그럼…….”
“오를린 후작가를 손에 쥐고 흔들 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오를린 후작가를 감히…….”
자신이 없어 보이는 대답에 사라는 단호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페넬로아를 다그쳤다.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이 일개 귀족 가문 하나 휘두르지 못해서야 어떻게 3황자 전하와 이 나라를 이끄실 생각이세요?”
사라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을 관자놀이로 가져다 대며 말했다.
“페넬로아 님이 장악하기에 가장 쉬운 곳이 오를린 후작가가 될 겁니다. 그러니 욕심껏 하시되, 온전히 페넬로아 님의 편으로 끌어당겨야 해요.”
페넬로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지켜 내야 할 자식이 있었고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금 사라가 제게 해 주는 말들이 전부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해 주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아마도 사라는 그녀에게 보여 준 호의를 모두 거둘지도 몰랐다.
‘귀족들은 가치가 없는 것에는 투자하지 않아. 그러니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가치가 있어야만 해.’
언젠가 일레온이 그녀에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사라에게 있어서 페넬로아의 가치는 훗날 그녀가 황후가 되었을 때, 그리고 클로드와 친구가 된 일렉사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연이었다.
그러니 페넬로아는 사라의 호의에 보답하려면 그 가치를 실현해야만 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주세요. 해낼게요.”
“좋은 의지예요.”
페넬로아의 말이 정답이라는 듯 사라는 그제야 엄한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하세요.”
“당근과 채찍이요?”
“오를린 후작가를 그렇게 길들이시는 거예요.”
오를린 후작가에게 당근은 무엇이며 채찍이 무엇일까.
황후의 가문이자 역대 황실 기사단장을 역임해 온 명문 있는 기사 가문인 오를린 후작가에게 감히 페넬로아가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페넬로아는 사라가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왕 조언을 구할 거 더 뻔뻔해지자고 생각하며 페넬로아는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알려 주세요.”
“어머나.”
사라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고,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달큰한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은근하고도 은밀한 목소리로 사라는 말했다.
“일렉사 님의 유모였던 크라시다 오를린은 지금 후작가로 돌아간 상태죠?”
“아!”
사라의 말에 페넬로아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떠올린 듯 탄성을 내뱉었다.
크라시다 오를린은 유모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무시하고 막말을 한 죄로 후작가로 돌려보내진 상태였다.
“페넬로아 님이 부탁했던 그 약, 조사가 끝났답니다. 크라시다 오를린에게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말이에요.”
페넬로아는 그제야 자신이 휘둘러야 할 채찍과 당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