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40화
“……!”
“아직 모르고 계신다……. 영지 관리에 대한 일은 모두 내게 맡기고 마물의 숲에서 살육을 일삼고 있으니.”
“……만나게 해 주십시오.”
“위험하다니까!”
1황자의 광기 어린 모습을 떠올린 파이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버린 형님의 모습을 본 파웰은 1황자가 대체 어떻게 변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졌다.
하지만 그가 이 지하실에 갇히기 전까지 1황자가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한다면 파웰은 자신 있었다.
그 단순하고도 급한 성미를 잘 이용할 자신이.
“1황자가 이곳에서 불편함 없이 지내려면 형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아닙니까! 이쪽에서도 협조를 해 주겠다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
파이튼은 말없이 동생의 뒤에 서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없이 굳은 얼굴로 파이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단단하게 맞물린 아버지의 입술을 보고 파이튼은 그가 동생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았다. 얘기해 보마.”
결국 파이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을 때, 다물렸던 필립의 입술이 열리고 서릿발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당장.”
“……!”
“아버지!”
파이튼은 물론이고 파웰 또한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1황자를 만나 보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알톤의 영주다.”
“그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내 영지가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
“당장!”
필립의 목소리는 단호하였고, 며칠 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것과는 달리 알톤 영지의 영주답게 단단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 아버지의 앞에서 한없이 죄인이 된 파이튼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
“…….”
파이튼이 나간 뒤 지하 감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던 파웰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는 필립에게 다가가 말했다.
“1황자는 생각보다 단순한 자입니다. 그의 권력을 확인시켜 주고 복종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줄 겁니다.”
“…….”
“절대로 1황자의 앞에서 바른 소리를 하시면 안 됩니다. 눈앞에서 영지민이 죽어 갈 수도 있고, 제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절대 1황자와 맞서려 하시면 안 됩니다.”
파웰은 아버지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직한 나무와도 같아서 절대 꺾이는 법이 없었다.
특히나 크롬벨 황실을 향한 충성심은 더더욱 그러했다.
제국의 황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손댄 1황자의 행동은 필립의 기준을 넘어섰다.
충심으로 감싸 줄 수 없는 일에 대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불 보듯 뻔했다.
“눈앞의 것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을 봐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늘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해 주세요.”
파웰은 진심을 다해 그를 설득했다.
그 대쪽 같은 성미를 보이게 된다면 1황자가 어떻게 나올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파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필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마.”
필립의 대답에 파웰은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영지의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황실에 도움을 요청할 방법을 알아봐야겠죠.”
파웰의 말에 필립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황실은 안 된다.”
“아버지?”
평소 황실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충심을 가지고 있었던 필립의 입에서 황실을 부정하는 말이 나왔다.
파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였다.
“황제는 1황자가 정말 흑마법을 사용한다면 대륙을 모두 적으로 돌릴 사람이다.”
“설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는 황제를 몰라. 그러니 그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필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롬벨 제국을 향한 충심은 그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황제가 아닌 황실에 대한 충심이었다.
이 크롬벨을 올곧게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충심이었다.
황제는 비열한 자였다.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절대 놓지 못하고 끝까지 제멋대로 휘두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필립은 황실에 충심을 바칠 수 있었다.
황제라면 절대 다른 이가 이 크롬벨 제국을 넘볼 수 없게 만들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이 제국보다 제 아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황제의 아들은 이 제국에 단 하나뿐이지.”
“그게 1황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다른 두 명의 황자는요?”
파웰은 필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1황자만을 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그를 실각시켜 알톤 영지에 처박아 두었겠나.
이는 다른 두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내가 황제라면 그 두 아들을 아마 알톤 영지로 보낼 것이다. 1황자가 정말 흑마법을 사용한다면, 그 두 황자를 살려 보낼 리가 없지.”
“……지금 그럼 황제가 두 황자를 모두 사지로 내보낼 생각이란 말씀이신가요?”
“그래.”
필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1황자와 흑마법사. 이 조합을 황제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황제는 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고 절대 1황자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황제의 손아귀에서 알톤이 희생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만 했다.
“분명 1황자를 실각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자가 황실에 있을 것이다. 황제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 그자를 찾아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필립의 말에 파웰의 머릿속에 이전에 들었던 소식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 1황자가 실각하게 된 계기는 한 여인과 아이를 칼로 위협하고 중태에 빠뜨렸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를 암브로시아 공작이 직접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했다고요.”
“……암브로시아 공작? 에단 암브로시아를 말하는 거냐.”
“예! 평소에도 광증을 보였던 1황자를 겨우 그 이유로 실각시켰다기에 의아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암브로시아 공작이 황제를 압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암브로시아는 황제의 번견이다. 우리 알톤이 그러했듯 암브로시아 역시 대대로 황실에게는 충성했었다.”
현 암브로시아 공작은 늙은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귀족이었다. 전대 암브로시아 공작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황실과 암브로시아 사이에는 다른 귀족들은 알아차릴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런데 황제가 암브로시아 공작의 압력에 못 이겨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1황자를 실각시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암브로시아는 황위 다툼에서 중립을 지키던 가문. 겨우 불의를 참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1황자에게 칼을 겨눌 리 없다.”
1황자의 실각은 황제와 암브로시아의 마음을 동시에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그 둘에게 영향을 줄 만한 인물이 하나 더 있을 것이다.
“1황자가 중태에 빠뜨렸다는 여인은 누구냐.”
“아……, 그 평범한 귀족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듣기로는 황제가 직접 작위를 수여했다던…….”
“밀런 소백작 말이냐?”
“아, 예! 맞습니다. 레이디가 작위를 받은 일로 몇 년 전에 아주 떠들썩하지 않았습니까.”
“밀런 소백작, 밀런……. 그렇구나.”
필립은 잠시 밀런 소백작이라는 말을 곱씹다가 이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녀구나. 밀런 소백작. 그녀가 황제와 암브로시아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밀런 소백작이 말입니까? 그녀는 아직 백작위를 받지 않은 소백작에 불과합니다. 설사 밀런 백작이 된다고 해도 정계에는 진출하지 못할…….”
“파웰.”
“……예.”
“그녀가 왜 밀런 소백작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자가 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파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밀런 소백작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에 황제가 그녀를 소백작으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사라 밀런, 그녀에게 알톤을 구할 수 있는 열쇠가 있을지도 몰라.”
“사라 밀런…….”
파웰은 그 이름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직도 필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아야만 했다.
“사라 밀런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기회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1황자의 앞에서 그 이름은 금기여야 할 것입니다.”
“알고 있다. 나도 알톤의 영주다. 알톤을 위해서 내가 못 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
파웰은 필립의 말에 크게 안심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그때, 사라는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크게 고개를 젖히며 재채기를 했다.
“으엣취!”
차마 재채기를 속으로 삼킬 겨를도 없었다.
그 우렁찬 소리에 사라는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누가 내 얘기 하나?”
재채기 같은 것은 안 한 지가 오래였던지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사라, 역시 너무 무리한 게 아닙니까?”
그녀의 기침 소리를 듣자마자 밖에서 에단이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밀런 소백작님! 여기 담요 있습니다.”
“손수건입니다!”
“따뜻한 물입니다!”
“곧 약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감기에 아주 그냥 딱입니다!”
암브로시아의 기사단이 앞다투어 마차 안으로 온갖 것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마차를 둘러싸라! 찬 바람이 한 줌이라도 마차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마!”
“밀런 소백작님이 감기에 걸리셨다! 약재란 약재는 다 가지고 와!”
“침대를 들여와! 뭐? 산속이라서 없어? 만들어서라도 가져와!”
“밀런 소백작님을 지켜라! 마물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해!”
마차 밖이 아주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