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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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에서 마법사를 보냈다고?”
1황자 카제르 드 크롬벨은 달갑지 않은 소식에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알톤 영지의 영주, 필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시는군, 황제 폐하께서. 마법사 따위가 내 상대가 될 리 없지 않은가.”
카제르는 콧방귀를 뀌며 제 손에서 넘실대는 검은 기운을 바라보았다.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힘이라, 올리븐이 설명한 대로였다.
처음에는 그저 마물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에 그쳤던 힘이었다.
컨트롤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애를 먹었던 것도 이제 옛날이었다.
카제르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 이제 수십 마리의 마물을 한 번에 도륙할 수 있게 되었다.
카제르가 이제 이 대륙에서 그를 상대할 사람은 없다는 오만을 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파이튼은 한숨을 삼키며 염려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힘을 너무 자주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 흑마법사의 말로는 몸에 무리를 주는 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멀쩡한데 무슨. 괜히 겁을 주려고 한 말인 게 분명하다.”
카제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 위로 힘을 뿜어냈다. 퀴퀴한 느낌이 나는 거무죽죽한 힘이 일렁이자 주변의 공기가 불쾌하게 일그러지며 더운 바람이 일었다.
파이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필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선 그 힘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그는 슬쩍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한숨지었다.
‘일단 1황자에게 승복하는 척해서 겨우 감옥에서 빠져나왔는데……. 아버지께서 정말 1황자의 비위를 잘 맞출 수 있을까.’
대쪽 같은 필립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1황자는 제 입속의 혀처럼 구는 것을 좋아했다.
그와 조금이라도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이유로 마물의 숲에 던져 버린 귀족들만 몇이었던가.
1황자의 뒤를 따라왔던 네이슨 자작 역시 흑마법은 위험하다는 말을 건넸다가 바로 마물의 숲에 내던져졌다.
파이튼이 몰래 가 그를 구해 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마물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1황자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믿는 눈치는 아니던데.’
1황자가 흑마법사들과 함께 알톤 영주 성을 장악하면서,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았었다.
영주 성의 사용인들은 밤중에 몰래 탈출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사용인들이 이탈하자 결국 영지민을 끌고 들어와 시중을 들게 해야 했는데, 투박한 영지민들의 손길에 만족할 리 없는 1황자였다.
‘그대가 날 모시겠다고?’
‘예, 이미 제 아들이 전하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한배를 탄 것과 다르지 않으니 제대로 모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필립 알톤. 그대는 황실에 충성하는 자가 아닌가? 황제에게 칼을 겨눌 나를 모시겠다고?’
‘제가 충성하는 것은 황제 폐하가 아닌 황실입니다. 만일 1황자 전하께서 곧 황실의 주인이 되신다면 지금 제 선택이 옳은 선택이 되겠지요.’
카제르는 필립의 설득에 일단은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쓸데없는 곳에서 의심이 많은 그는 끊임없이 필립을 시험하고 또 시험했다.
“알톤 영주, 그대가 보기에도 내 몸에 무리가 가는 것처럼 보이나?”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카제르가 이렇게 굳이 필립을 콕 집어 질문을 할 때마다 파이튼은 피가 바싹바싹 메말라 갔다.
그런 파이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필립은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태연하게 답했다.
“그릇이 작은 자들이나 거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호라. 그럼 내 그릇은 이 힘을 감당할 만하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오히려 전하께서는 힘을 품고 나서 더 생기가 넘치십니다. 강대한 힘이 좋은 그릇을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들어.”
필립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제르는 킬킬거리며 질 나쁘게 웃었다.
제국의 황자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저열한 웃음소리였다.
원래의 필립이라면 눈썹 정도는 미세하게라도 찡그렸겠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황실에서 보낸 마법사는 언제쯤 알톤에 도착한다고 하던가?”
“일주일 전에 암브로시아 공작가에서 출발했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암브로시아?”
순간 카제르의 눈빛이 돌변했다.
오만으로 물들었던 눈동자에 증오가 깃들었고 만면에 가득하던 여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에단 암브로시아가 마법사와 동행했다는 소리인가?”
“예. 함께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카제르의 입술 사이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드디어 내 치욕을 갚아 줄 날이 다가왔구나. 드디어!”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려 왔다. 희열감에 가득 찬 카제르는 휙 뒤를 돌아 파이튼을 바라보며 물었다.
“올리븐이 지금 어디에 있지?”
“영주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만나러 가야겠다!”
카제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영주 집무실을 향해 뛰듯이 걸었다.
필립과 파이튼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말이다.
차남 파웰이 카제르가 사라진 방향에서 이쪽으로 걸어 들어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1황자가 집무실 쪽으로 뛰어가던데, 무슨 일입니까?”
“올리븐, 그자를 만나러 간다더구나. 너는 알아보라고 한 것은 알아봤느냐.”
“예, 마을마다 많게는 여섯에서부터 적어도 한두 명 정도 실종자들이 있었습니다.”
“실종자들은 찾았느냐.”
“……예.”
파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제르가 지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전부 시체가 되어 영주 성 어딘가에서 하나둘씩 발견되었습니다. 흑마법사들과 1황자 손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 파웰은 두 주먹을 꽉 쥐며 파이튼을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시선을 받은 파이튼은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 때문에 카제르에게 알톤의 모든 것을 넘겨주게 됐기 때문이었다.
황실에 도움을 요청할 시간을 그렇게 허무하게 놓쳐 버린 대가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 일이 해결되기만 한다면 네 처분은 황실에 맡길 것이다. 알았느냐.”
“……예, 아버지.”
파이튼은 뒤늦게나마 자신이 부린 욕심을 후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던 파웰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무얼 말이냐.”
“이대로 1황자와 함께 죽어야 합니까? 우리 알톤이?”
가진 것이라곤 황실에서 주는 알량한 권력뿐이었던 카제르는 힘이라는 것을 맛본 순간 자만심에 빠져들었다.
분명 카제르는 패배하고야 말 것이다. 쉽게 얻은 힘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올리븐이라는 자의 목적을 알아내야만 한다.”
“……그자가 문제로군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그자였다. 1황자를 이용해서 분명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 틀림없어.”
“듣기로는 세니아 공국과 도메룰스 왕국, 그리고 블라이트 제국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자라고 합니다.”
파웰의 말에 필립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흑마법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사체라고 하지 않느냐.”
“예.”
“아무래도 전쟁을 일으키려는 모양이다.”
“……!”
“전쟁터에 즐비한 것이 사체일 테니.”
파웰은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는 것은 수백 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던 이 대륙에서 알톤 영지가 불씨의 씨앗이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1황자는 아주 쓰기 좋은 도구에 불과하겠군요.”
“그래. 그러니 이번에 황실에서 보낸 마법사에게 우리는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협조한다고 해도 그쪽이 믿어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 봐야지.”
필립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카제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리 멀지 않은 영주의 집무실에서부터 카제르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당장 장막을 거두라니까!!”
악을 쓰는 것처럼 고함을 내지르던 카제르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으니 카제르는 이제 손에서 힘을 일으켜 무차별적으로 올리븐을 향해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아아악! 왜 안 통하냐고!”
카제르의 힘은 올리븐에게 닿자마자 힘없이 흩어져 버릴 뿐 그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내게서 나온 힘이 나를 해칠 리 없잖아?”
올리븐은 그런 카제르를 보며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막은 못 거둬. 그건 시간을 벌기 위한 거니까.”
“지금 암브로시아 공작이 이리로 향하고 있는데. 그럼 가만히 지켜보란 소린가?”
“응. 당연히 그래야지.”
올리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 말에 분통이 터지는 건 카제르였다.
“아아아악!!”
그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영주 집무실에 있는 집기를 부수기 시작했다.
“성질하고는.”
날아드는 책상 조각과 종이들을 가볍게 피해 내며 올리븐은 조용히 귀를 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것투성이인데, 저 멍청한 인간은 도움은커녕 사사건건 방해만 할 뿐이니 골치가 아파졌다.
‘스승님께서는 대놓고 저택에 남는 모습을 보여 주셨지만, 분명 직접 이리로 오실 거야. 벨루나를 보내는 척하면서.’
올리븐이 이만한 일을 벌였는데 사라가 얌전히 저택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올리븐은 집무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빛이라곤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장막이 마치 하늘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 장막을 해체할 수 있는 건 오직 스승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로 향하는 마법사가 둘이지? 벤야민과 벨루나를 보낸 건가? 이곳에? 왜? 설마 그 애새끼 때문에?’
올리븐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숨길 수 없는 질투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의 가슴을 지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애새끼 때문에, 이만한 일을 벌였는데도 날 보러 오시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어 봐도 밖에서 암브로시아 일행을 관찰하던 흑마법사들의 보고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올리븐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어 갔다.
“빌어먹을 새끼!”
아무리 난동을 피워도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올리븐을 보며 카제르는 침을 뱉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흑마법사 하나가 들어왔다.
“올리븐, 좋은 소식이 있어.”
“내 인생에 좋은 소식이 어디 있어. 스승님이 날 외면하는데……. 겨우 그깟 애새끼 하나 때문에.”
“그러니 좋은 소식이지. 암브로시아 일행 중에 벤야민은 없던데?”
“뭐?”
“눈속임이야. 파웰에서 3황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봐선 그가 로브를 뒤집어쓰고 마법사 행세를 하는 거겠지.”
“그게 정말이야?”
올리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바로 침울해졌다.
“저택에 있을 애새끼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소중하시다?”
한번 비뚤어진 사고는 계속해서 더 추악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올리븐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그럼 암브로시아 저택에 스승님이 없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