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47화
벨루나의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피해 클로드의 방으로 들어간 벤야민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너 혼자만 즐겁지, 아주.”
“……왜 또 시비래.”
일렉사랑 페넬로아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던 클로드는 벤야민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벨루나 누나한테 혼났구나?”
안 봐도 빤히 보이는 상황에 클로드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에 한 장 남은 바나나 모양의 카드를 내려놓았다.
“아!”
“또 암브로시아 공자가 이겼네요.”
일렉사와 페넬로아의 입에서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카드놀이는 손에 들린 카드와 같은 모양의 것을 내려놓아 들고 있는 카드를 모두 없애면 승리하는 놀이였다.
그리고 클로드는 방금 5번째 연승을 거둔 참이었다.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승리를 곱씹던 클로드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벤야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누나가 뭐래?”
“가는 길에 청소도 좀 하고 너랑 싸우지 말라는데.”
“아저씨가 못하는 걸 시키면 어떡해. 벨루나 누나도 차암…….”
“야.”
“심심해서 시비 거는 거면 여기 앉아서 같이 게임이나 하자.”
클로드는 태연한 얼굴로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벤야민의 심기가 왜 이렇게 비뚤어졌는지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꼬맹이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는.’
고작 여섯 살 난 아이답지 않게 클로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페넬로아와 일렉사가 가끔씩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아무리 마법사인 사라가 동행했다고는 하나, 불길한 일을 조사하러 향한 길이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몰랐고, 누군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페넬로아는 가끔 잠을 못 이루며 복도를 거닐었고, 일렉사는 베개를 축축하게 적시곤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도리어 씩씩하게 제 할 일을 다 하는 클로드가 벤야민의 눈에는 이상해 보였다.
“보통은 아빠 보고 싶다고 질질 짜야 하는 거 아니냐.”
“누가 질질 짰다고 그래?”
“원래 애들은 다 그래.”
벤야민은 클로드를 보며 말했지만, 밤마다 눈물을 흘리던 일렉사가 괜히 양심에 찔려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드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나 지금 울까? 아버지도 보고 싶고 유모도 보고 싶은데?”
“아니.”
“그럼 왜 그래? 어차피 아저씨가 나 달래 줄 것도 아니잖아.”
클로드의 말에 벤야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달래 줄 사람이 없어서 울지 못한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페넬로아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일렉사를 바라보았다.
그래, 일렉사는 클로드와는 달리 기댈 어머니가 곁에 있었다.
“…….”
그렇게 생각하니 제아무리 벤야민이라고 해도 안쓰러운 감정이 미묘하게 들었다.
스승이 그래도 잘 부탁한다고 하고 길을 떠났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기분이 든 것이다.
벤야민은 잠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달래 줄 수도 있지.”
“우엑.”
“야!”
하지만 그런 큰 결심을 담은 벤야민의 말에 클로드는 토가 나오는 척을 하며 화답했다.
“저게 생각해 줘도 진짜.”
“아저씨가 내 생각 해 줘도 안 기쁘거든?”
벤야민과 클로드는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아에서 지내기 시작한 이후로 페넬로아와 일렉사가 가장 많이 본 장면이기도 했다.
“……어머니.”
“응?”
벤야민에게 바락바락 말대꾸를 하는 클로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일렉사가 생긋 웃으며 페넬로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클로드가 이제 안 슬퍼 보여요.”
“그러니?”
일렉사의 말에 페넬로아는 클로드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조금 전 카드 게임에서 연승을 거둘 때보다 더 생기가 넘쳐 보였다.
비록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벤야민의 손을 찰싹찰싹 때리며 공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암브로시아 공자가 저분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맞아요.”
일렉사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갈수록 점점 말도 없어지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지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벤야민이 곁에만 있으면 예전처럼 말도 많아지고 목소리도 더 커졌다.
일렉사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저리 가라고!”
“못 가. 스승님이 네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하셨거든.”
“유모 미워!”
“스승님도 너 밉대.”
“아니거든! 유모는 날 제일 좋아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물론 점점 유치하게 변질되어 가는 말싸움이 살짝 질릴 지경이었지만.
일렉사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에서 시선을 돌린 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어머니, 메이는 어디 갔어요? 집사님이랑 시녀장님도 안 보여요.”
“그러게 말이야. 아까 카드 게임 하기 전까지는 있었는데.”
페넬로아도 일렉사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클로드의 곁에는 론다와 베론이 있었고, 메이도 좀처럼 페넬로아의 곁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 채였다.
“벤야민 님, 혹시 오시는 길에 집사님이나 시녀장님 못 보셨나요?”
“못 봤는데.”
“이상하네.”
페넬로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무런 소식조차 없는 것이 의아했다.
그녀는 방문을 살짝 열고 복도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곤 의아하다는 듯 소리를 내며 눈을 살짝 비볐다.
잠시 눈을 두어 번 크게 깜빡이며 다시 밖을 바라본 페넬로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런 페넬로아의 반응에 일렉사는 쪼르르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뭔가 이상하구나.”
“네?”
“암브로시아 공자 방 맞은편에는 원래 다른 방이 없지 않았니?”
“맞아요.”
일렉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의 방은 2층의 제일 한가운데 있었다.
양옆으로 페넬로아와 일렉사가 거주하는 방과 클로드의 옷 방이 있을 뿐이었다.
페넬로아는 방문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저건 뭐지.”
클로드의 방문을 열면 화사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어야 할 벽에 문이 하나 있었다.
아주 평범한 문이었다. 사용인들의 숙소에 있을 법한.
페넬로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일렉사를 제 뒤로 보냈다.
“물러서렴, 일렉사.”
“베, 벤야민 형.”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렉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벤야민을 불렀다.
“뭐야.”
벤야민은 클로드와 투닥거리다 말고 미간을 좁히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가 있다고?”
“문이……. 복도에 없던 문이 생겼어요.”
“……?”
페넬로아의 말에 벤야민 또한 클로드의 방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사라가 직접 고른 그림이 장식되어 있는 벽만 보일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문이 어디 있다는…….”
벤야민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고개를 돌려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
“…….”
페넬로아와 일렉사가 동시에 창백하게 질린 채 한곳에 시선을 똑같이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진짜 존재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순간 벤야민의 머릿속에 마탑에 있을 때 종종 장난질을 하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는 심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기에 정말 문이 있어?”
“네…….”
“계속 보고 있어 봐. 내가 시선을 돌리라고 할 때까지 쭉.”
“……그럴게요.”
벤야민은 손에 마력을 일으킨 채 스스로의 눈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검붉게 변하며 동공이 새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
마력으로 빛나는 벤야민의 눈에 페넬로아와 일렉사의 눈동자에 비친 것이 선명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벤야민은 그들의 눈동자를 통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클로드가 거주하는 층에 절대 있을 리 없는 평범한 갈색 나무로 만든 문이 생겨난 것을.
“진짜였군.”
그와 동시에 벤야민의 손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복잡한 마법 수식이 나타나 클로드와 페넬로아, 그리고 일렉사를 감쌌다.
“아저씨!”
“꼼짝 말고 있어, 꼬맹아. 거기서 절대로 움직이지 마.”
놀란 클로드가 그를 불렀지만 벤야민은 페넬로아와 일렉사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드디어 움직였군, 미친 자식이.”
빠득 이를 가는 벤야민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