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54화
사라는 귀찮다는 듯이 흐트러진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부모도 내가 걸어가는 길에 허락을 요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이젠 내가 키운 내 제자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별짓을 다 하는구나…….”
언제나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밀런 백작 부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떠올리는 사라의 입꼬리가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밀런 백작 부부가 있기에 사라는 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평범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저 올리븐의 못난 모습이 제 모습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네 힘이 축복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겠지만. 그 힘을 옳은 일에 쓴다면 그건 축복이 될 거란다.’
범상치 않은 힘을 타고난 딸이 마탑으로 향하던 날, 배웅하던 밀런 백작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타고난 것이 있으니 결국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을 걸어갈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 알아주렴. 우리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단다, 내 작은 아기 새야.’
암브로시아의 힘을 연구하기 위해 가문의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고 선언했을 때에도 웃으며 그녀를 안아 주던 품의 온도를 기억한다.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덜덜 떨리던 것을 기억한다.
‘사라 밀런. 내 자랑스러운 딸아. 네가 곧 밀런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언제나 그 명예에 걸맞게 처신하렴.’
한 번쯤은 어린 딸의 그 끝없는 힘에 공포를 느낄 법도 했는데.
어느 날은 백치처럼 허공만 보며 앉아 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 젖은 밤을 보내는 것에 지칠 만도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가 없는 힘에 대해 가르치고, 그 힘의 무게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들이 키워 낸 것이다. 마탑의 대장로를 말이다.
“나는 존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배웠기 때문이지. 너도 내가 배운 대로 가르쳤건만 결국 제 욕심만 채우는 것을 택했구나.”
사라는 실망감이 뚝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
그것이 하나하나 올리븐을 찌르는 것만 같아 그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렴.”
“스승님, 저는…….”
“아아, 나를 위해서였다고?”
서늘하게 흘러나오는 사라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마치 흥미로운 의견을 들었다는 것처럼.
“네가 나를 위해 준 덕분에 내가 얻은 게 뭐니?”
“…….”
“겨우 치워 놓은 1황자는 다시 알톤에서 설치고 있고, 황제는 귀찮게 굴고, 마탑에는 내가 숨기고 싶었던 신분이 드러나고, 네가 저지른 뒷수습도 해야 하고, 공작님은 업무 과다에 시달리고 클로드 님은 울고…….”
하나하나 올리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을 나열하는 사라의 얼굴은 점점 피로감에 물들었다.
입 밖으로 꺼내 놓고 보니 전부 하나같이 귀찮은 일들 뿐이라 새삼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덕분에 저쪽 내 영혼에도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도 알게 됐단다.”
“……그게 무슨.”
“네가 날 위해 내 목숨을 위협해 준 덕분이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어지는 사라의 말에 올리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변명을 해 보고 싶어도 떠올릴 말이 없었다.
스승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 욕심을 채우려 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올리븐은 결국 어떠한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저는 싫어요. 저는, 저는 싫어요…….”
올리븐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스승님께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너무, 너무 많아요. 그것들이 언제고 스승님을 빼앗아 갈 거라고 생각하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그는 마치 떼를 쓰는 것처럼 발을 굴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뻗어 더듬더듬 사라를 찾았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잡아 둘 수 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오직 스승님에게 자신만 남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리븐은 이미 사라의 다른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상태였다.
“자꾸만 내게서 스승님을 빼앗아 가잖아요.”
“나는 한 번도 너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단다.”
“흐윽…….”
“네가 가질 수 있는 온전한 너의 것이 있다면 그건 스스로밖에 없어.”
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올리븐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양손에 푸르른 마력이 마치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올리븐은 끝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는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스승과 마주한 순간부터 올리븐은 자신이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이세요.”
“…….”
“저를 그냥 죽이세요, 스승님.”
“올리븐.”
“장담하건대 저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영원히 스승님의 곁에 있는 것들을 질투하며 끊임없이 그것들을 없애려고 할 테니까요.”
올리븐의 입꼬리가 뒤틀리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태생이 그렇게 태어나 이리 자란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어릴 적부터 버려져 짐승들과 섞여 살아왔다.
소중한 것 따위는 없었다. 그저 언제든 제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산짐승의 온기와 언젠가 그 가죽을 갈라 죽이겠다는 살기와 함께 살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없애야 했다. 얻기 위해서는 오직 나 혼자만이 살아남아야 했다.
사라에게 거둬져 말을 배우고 옷 입는 법을 배우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미 뼛속까지 새겨진 짐승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말이 맞아요. 실은 저를 위해서였어요.”
올리븐의 눈가에 마지막으로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니 제발 그냥 죽여 주세요. 저는 또 언제라도 이렇게 날 위해 스승님을 해칠 거니까.”
“…….”
“스승님께 두 번 미움 받는 건 싫어요.”
사라는 말없이 그런 올리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승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고 있을지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았다.
아마 그녀는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올리븐을 죽여야 끝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스승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녀를 약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의 스승은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았으니까.
‘스승님께서 못하시겠다면 내가 할 수밖에.’
올리븐은 조용히 제 손에 작게 마력을 일으켜 날카롭게 깎아 냈다.
그래, 이것으로 심장을 꿰뚫으면 겹겹이 쌓은 마력 층을 전부 부수고 단숨에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하.”
그때 사라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것처럼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정말 끝까지 한심한 꼴만 보여 주는구나. 내가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이렇게 응석받이로 키운 건가…….”
마지막 말은 거의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스승님?”
“거 조용히 좀 해 보렴.”
올리븐이 사라를 불렀지만 그녀는 이제 그 따위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의 손에 아직도 일렁이고 있는 푸른 마력이 그 궤적을 따라 빛났다.
“사이코패스 교육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건 여기보다 한국이 더…….”
“저기…….”
“아, 그럼 복잡해지는데. 나도 못 넘어가는 마당에 쟤를…….”
“스승님 저기, 저 여기 있어요.”
“저놈을 누가 받아 주기는 하려나. 일단 영혼을 분리하고, 마력이……, 차원을…….”
올리븐은 아예 그를 배제한 뒤 생각에 잠긴 사라를 보며 입을 벌렸다.
그녀가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올리븐이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아직도 올리븐이 쳐 놓은 사고들이 암브로시아 저택 내부에 남겨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그런 것 따위에는 하등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마치 언제든지 그녀가 처리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압도적인 자신감에서 오는 태도에 올리븐은 그제야 떠올렸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지.’
마탑의 장로들이 제자들이 별짓을 다 할 때마다 혀를 차며 했던 말이었다.
“그래, 결정했어. 내게 죽여 달라고 했지, 올리븐?”
그때 환하게 웃으며 묻는 사라의 말에 올리븐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네…….”
“그거랑 비슷하게는 해 주마.”
“……네?”
“걱정하지 말렴. 죽는 건 아니니까.”
“……?”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올리븐에게 사라는 손을 뻗었다.
손에 일렁이고 있던 그녀의 푸르른 마력이 올리븐의 몸을 감쌌다.
“……헉!”
사라의 마력은 마치 덩굴처럼 올리븐의 몸을 서서히 조이며 그를 들어 올렸다.
그 압박감이 상당해서 올리븐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단 내 허락 없이 키운 힘을 거둬 가마. 반항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반항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상관없겠지?”
한쪽 손으로 올리븐을 들어 올린 사라는 다른 쪽 손을 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검지와 엄지를 모은 사라가 손가락을 잡아당기자 올리븐은 내부가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커헉, 헉!”
그러자 올리븐의 입에서 마치 토사물처럼 검은 기운이 울컥울컥 토해져 나왔다.
“허억…….”
흑마법의 힘이었다. 그가 스승 몰래 익히고 축적했던 힘이 사라에 의해 토해 내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간단히…….”
“전혀 간단하지 않단다.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몰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올리븐의 말을 뒤로하고 사라는 그에게서 뽑아낸 흑마법의 기운을 바라보았다.
탁하고 한없이 깊으며 지금도 꿀렁이고 있는 흑마법의 힘은 금방이라도 다시 다른 숙주를 찾으러 갈 것만 같았다.
‘흑마법의 힘은 얼핏 보면 암브로시아의 힘과 비슷하긴 해.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지.’
그의 마음속에 있던 작은 소유욕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도록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욕망이라는 것은 사람의 이성을 잃게 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하니까.
“……꽤 오래된 힘이로구나.”
뽑아낸 흑마법의 힘을 바라보던 사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올리븐은 단기간에 익혔다기엔 꽤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늘 의아했는데, 지금 보니 뽑아낸 힘은 올리븐의 나이에 맞지 않는 세월이 느껴졌다.
“너 이 힘을 어디서 얻었지?”
“……마탑에서.”
“마탑에 이 정도의 힘이 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정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저도 기억은 없어요. 그저 힘을 얻고 난 뒤에 눈을 떠 보니 마탑이었는걸요.”
올리븐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 힘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처럼 찾았고 본능적으로 익혔을 뿐이었다.
흑마법의 힘은 물론이고 사라의 마력이 그의 속을 뒤집어 놓으며 내부도 많이 상했다.
게다가 그의 심장에는 사라의 마력이 핑글핑글 돌며 마치 사슬처럼 감싸고 있었는데, 이것은 마력의 봉인이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 올리븐은 두 번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걸.”
사라는 올리븐을 들어 올리던 마력을 거두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올리븐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상관없지. 너는 몰라도 네 영혼은 알 테니.”
그녀는 다시 올리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력의 언어로 이루어진 룬어가 마치 붕대처럼 올리븐의 몸을 감쌌다.
손과 발을 구속하고 눈과 입을 막았다.
“[같은 영혼을 공유하게 될지어다.]”
그리고 사라의 말과 함께 그의 몸 전체에서 뿌연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가 이내 그녀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흑마법의 기운과 합쳐지기 시작했다.
화아악 하고 마치 무언가 타는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흑마법의 기운은 이내 검은 보석이 되어 사라의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쉬고 있으렴. 절반이라도 말이야.”
따악 하고 사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룬어로 구속당한 올리븐의 뒤로 까만 공간이 입을 벌렸다.
“…….”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올리븐의 몸을 삼키고 사라졌다.
아마 그의 몸은 어딘가의 경계에서 그녀가 허락할 때까지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사라는 제 손바닥 위에 있는 검은 보석을 보며 생긋 웃었다.
검은 보석의 안에 일렁이는 무언가가 그 웃음을 보며 파르르 진동하였다.
그녀는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너 대한민국이라고 아니? 구경시켜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