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56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벨루나와 벤야민은 클로드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힘이 크게 일렁이며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매우 익숙한 힘이었다.
“클로드 님!”
눈조차 쉽게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에 메이가 눈을 부릅뜨며 더듬더듬 클로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손을 뻗어도 뻗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메이가 속으로 욕을 삼키는 사이, 저 멀리서도 무언가를 느낀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클로드에게서 흘러나오던 빛이 일시에 사라졌다.
“……크, 클로드 님.”
메이가 빛으로 인해 뿌옇게 번지는 눈을 애써 깜빡거리며 클로드의 몸을 더듬었다.
다행히 아이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고,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정신을 잃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신도 차린 채였다.
“……아.”
본인도 많이 놀랐는지 클로드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런 아이의 눈에 벤야민의 모습이 서서히 들어왔다.
“흑마법에 당한 상처가…….”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부상을 입었던 벤야민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창백했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고 피로 물든 몸도 깨끗해졌다.
옷이 찢어지면서 드러난 몸은 오히려 전보다 더 탄탄해 보이기까지 했다.
“벤야민, 너 상태가 어때.”
“……아주 좋은걸.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올리븐 녀석을 상대할 때보다 더 좋아.”
벨루나의 물음에 벤야민은 손에 검붉은 마력을 피워 보았다.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고 깔끔하게 마력이 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생생했다.
마치 스승이 가끔씩 마법 훈련을 하고 난 뒤 몸을 정화해 준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좋았다.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흉터도 보이지 않는군.”
벤야민은 작게 혀를 차며 옷자락을 살짝 들어 복부 쪽을 보여 주었다.
전쟁 용병의 뒤를 따라다니며 온갖 상처를 입어 흉터로 너덜너덜하던 몸이 깨끗해져 있었다.
“남겨 두고 싶었는데.”
벤야민은 아쉬운 듯이 혀를 찼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을 잊지 않기 위해 영원히 남겨 두려 했건만.
하지만 벤야민은 이내 픽 웃으며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클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고맙다, 꼬맹아.”
“내가 한 거야?”
“그래. 네가 날 치료한 거다.”
“내가?”
“어.”
“진짜?”
“그렇다니까.”
클로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손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관도 이렇게는 못할 텐데.”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론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벨루나에게 물었다.
“벨루나 님, 이건…….”
“암브로시아의 힘입니다. 틀림없는.”
벨루나의 대답에 모여든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예전에 황궁에서 처음으로 클로드에게 힘이 발현되었을 때, 그 힘이 사라를 치료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에단도 사라도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암브로시아의 힘은 생명력을 탐하는 파멸의 힘.
그 힘을 타고난 클로드가 신관보다도 더 강한 치유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암브로시아의 힘이 이런 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건……,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흥미롭군요.”
벨루나의 눈이 작게 반짝였다. 마법사는 힘을 탐구하는 자였다.
지식 탐구에 관한 욕망은 마법사를 따라갈 자들이 없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단의 지원을 받아 암브로시아의 힘을 연구하면서 그녀의 욕망을 서서히 채워 가던 차였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클로드에게 발현된 힘을 마주하니 또 다른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암브로시아의 힘이 파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어.’
벨루나는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작고 귀엽고 착하고 멋지고 예쁘고 이젠 흥미로운 힘까지 발현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클로드는 축복의 아이였다.
그때 이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일렉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암브로시아의 힘?”
그러자 암브로시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일렉사에게 향했다.
그간 페넬로아와 일렉사에게 한없이 친절하던 암브로시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딘가 낯선, 새파랗게 곤두선 시선으로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
페넬로아가 황급히 일렉사의 입을 틀어막고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눈치가 빠른 페넬로아는 암브로시아 사람들 사이의 공기가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게 말이다.
“아, 외부인이 있는 줄도 모르고 떠들었군요.”
벨루나가 낭패라는 듯 미간을 좁히며 사과했다.
외부인. 페넬로아와 일렉사는 아직 암브로시아의 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사라가 마법사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제자가 알톤 사태를 만들어 낸 원흉이라는 것뿐이었다.
에단 암브로시아가 허락한 정보는 거기까지.
그 이상은 가주인 에단의 허락 없이는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교육이 누구보다 잘되어 있는 것이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이었다.
“…….”
“…….”
베론과 론다가 시선을 교환했다.
암브로시아 기사단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긴장하며 손에 쥔 칼을 고쳐 들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저와 일렉사는…….”
“그걸 판단하는 것은 저희의 몫이 아닙니다.”
페넬로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단호한 론다의 목소리에 잘려 나갔다.
3황자의 숨겨진 연인과 자식. 암브로시아의 도움이 없다면 황위에 오를 수조차 없는 몸.
에단은 3황자 쪽으로 마음이 기운 듯했으나, 암브로시아의 힘에 대해 그들이 알게 된 순간부터 어떻게 판단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클로드의 힘이 지금 전해져 내려온 암브로시아의 힘과는 다르게 발현된 상태였다.
신관보다 강한 치유의 힘. 그것도 마법사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흑마법에 당한 상처까지 완벽하게 치유할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제아무리 3황자라고 해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이득을 취하려고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시죠.”
“…….”
순식간에 변한 상황에 페넬로아는 입술을 깨물며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왜, 왜 그래?”
순식간에 변한 공기에 클로드가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어쩐지 일렉사와 페넬로아에게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을 한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이 낯설었다.
“아저씨…….”
클로드는 주춤주춤 벤야민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곤 말려 달라는 듯 그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어떻게 좀 해 봐.”
“하……. 네 집안일에 내가 어떻게 간섭하냐.”
“그치만.”
벤야민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클로드의 시선을 피했다.
암브로시아의 비밀에 있어서 벤야민 또한 외부인이었다.
그저 가주인 에단 암브로시아로부터 연구하는 것을 허락받았을 뿐이었다.
“……씨이.”
클로드는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벤야민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벨루나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일렉사는 내 친구야.”
클로드는 단호하게 말하며 벤야민의 품에서 내려와 일렉사와 페넬로아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런 둘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작은 몸을 부풀리며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다들 그만해. 내 친구를 괴롭히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클로드의 경계 어린 시선이 아직도 칼을 쥐고 있는 기사단에게 향했다.
기사단은 냉큼 칼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럼에도 클로드가 경계를 풀지 않자 기사단은 한숨을 내쉬며 세 발자국쯤 뒤로 갔다.
그제야 클로드의 어깨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클로드 님, 이건 암브로시아에겐 중요한 문제입니다. 외부인이 알게 해서는…….”
베론이 클로드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렉사는 외부인이 아니야. 내 친구란 말이야!”
고집이 가득 느껴지는 말에 이번엔 론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클로드를 달랬다.
“그걸 판단하시는 건 주군입니다. 주군께 알리기 전까지 잠시 신변을 저희가 확보하려는 것일 뿐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나쁘게 판단하시면? 그래도 안 해칠 거야?”
“……!”
클로드의 대답에 베론과 론다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 아버지는 훌륭하니까.
언제나 노랫말처럼 말하던 클로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클로드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비의 자비는 언제까지나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란 걸.
조금이라도 수틀린다면 페넬로아와 일렉사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치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아이가 조금은 더 순수하게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암브로시아 사람들의 얼굴이 대번에 복잡해졌다.
“아버지가 그랬어. 아버지가 안 계시면 내가 곧 암브로시아라고. 그러니까 다들 내 말을 들어야 해.”
“클로드 님.”
“내 친구를 해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예의를 지켜.”
클로드의 청록색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암브로시아의 위엄과 긍지, 그리고 위압감이 그 작은 몸에서부터 피어났다.
마치 에단이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클로드에게서 에단의 모습을 본 암브로시아 사람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따르겠습니다.”
가장 먼저 메이가 앞으로 나서서 클로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나가 먼저 나서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저희 또한 따르겠습니다.”
“암브로시아의 뜻이라면…….”
베론과 론다, 그리고 암브로시아 기사단까지 천천히 클로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린 주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그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
클로드는 얼결에 모두를 무릎 꿇게 만들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이 전부 자신의 사람들임을 알았지만, 그 전에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만 들을 뿐 자신은 그들을 움직일 힘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제야 저들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람도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암브로시아 공자.”
클로드의 뒤에 서 있던 페넬로아가 혼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아마 클로드는 몰랐겠지만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향했던 시선 중 희미한 살기도 있었다.
암브로시아의 힘이 알려지기 전에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종류의 살기였다.
‘개무서웠네, 진짜.’
페넬로아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안도했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듣기 좋은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공작님이 없는 저택에서는 우리 클로드 님이 곧 암브로시아죠. 다들 그걸 잊고 있었던 건가요?”
깔깔 웃는 웃음소리가 이제 아주 가까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생글생글 웃는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