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57화
사라를 발견한 클로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허공에 두둥실 떠 있던 사라의 발이 땅에 닫자마자 클로드는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유모!”
“클로드 님!”
클로드를 품에 안은 사라가 힘을 주어 아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 오래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클로드가 조금 더 자란 것만 같았다.
아이를 품에 안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야 숨을 편안하게 내쉬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잔챙이들이 아직도 저택 곳곳에 있는데 여기 다 와 계시면 어떡해요.”
사라는 암브로시아 사람들을 돌아보며 가볍게 타박했다.
그제야 암브로시아 기사단은 자신들이 마물들을 처리하다가 이쪽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처리할게요.”
사라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그러자 쿠르릉, 하고 하늘이 울리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그 소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클로드 님, 조금 시끄러울 테니 귀를 막으시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클로드는 두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사라가 가볍게 눈짓하자 페넬로아 또한 일렉사의 귀를 막아 주었다.
“잘하셨어요.”
웃으며 칭찬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사라가 따악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암브로시아 저택 위로 번개가 내리쳤다.
“……헉!”
번쩍이는 번개는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서 동시다발적으로 저택 곳곳에 내리쳤다.
암브로시아를 돌아다니고 있거나 숨어 있는 마물들까지 번개를 피할 순 없었다.
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마물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
“…….”
사라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압도적인 힘을 처음 목격한 이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쉬이 다물지 못했다.
‘벨루나 님이나 벤야민 님이 마법으로 싸우시는 건 봤지만…….’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조차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사라가 가지고 있는 그 힘이 압도적이란 것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할 것은 우리 주군의 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단 암브로시아는 그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 밀런은 완벽하게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두려웠다.
그녀의 앞에서는 귀족의 작위도 황제의 권력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기는 할까.
저 신에 가까운 힘을 가진 사라가 말이다.
“…….”
모두가 사라의 힘 앞에 하나둘씩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할 때.
저택 안에 있는 모든 마물이 처리된 것을 확인한 사라가 웃으며 클로드를 둥개둥개 얼러 안았다.
“많이 놀랐죠? 괜찮으세요? 우리 클로드 님 얼굴이 못 본 새에 반쪽이 됐네, 속상하게.”
“유모, 유모오…….”
다정한 사라의 목소리와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그동안 꾹꾹 참아 왔던 클로드의 서러움이 터져 버렸다.
“흐어어엉……, 나 무서웠단 말이야. 벤야민 형도 다치고, 나 때문에 일렉사도……. 흐어어엉.”
클로드는 엉엉 울며 더듬더듬 사라에게 모든 걸 일러바쳤다.
얼마나 무서웠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는데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사라의 얼굴을 보자 클로드는 이제야 마음을 놓고 양껏 칭얼거릴 수 있었다.
“에고, 우리 클로드 님. 그렇죠, 무서우실 만해요.”
“응……. 나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울지 마세요. 이제 제가 있잖아요. 응?”
“흐으으응.”
클로드는 사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울었다.
드디어 아이가 제 나이에 맞게 울음을 터트리자 사라는 도리어 안심했다.
“이런 상황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클로드 님. 다신 이런 일 없게 할게요.”
“응, 으응…….”
“잘 견뎌 줘서 고마워요.”
클로드의 머리칼에 뺨을 비비며 사라는 맑게 웃었다.
아이의 몸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듬어 안는 사라를 보며 암브로시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느껴 버린 두려움을 조금은 내려놓았다.
‘밀런 소백작님이다.’
클로드 앞에서 언제나 그들이 보아 왔던 상냥한 밀런 소백작이 되어 있는 사라를 보고 안심한 것이다.
‘하……. 미친, 죽을 뻔했네.’
잔뜩 긴장했던 페넬로아도 클로드에게 웃어 주는 사라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겨우 숨을 길게 내쉬며 힘을 풀었다.
“벤야민,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그 전에 꼬맹……, 아니, 클로드가 괜찮을지 걱정입니다. 지난번에는 힘을 발현한 뒤 바로 쓰러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클로드 님은 괜찮아 보이는구나.”
사라는 클로드를 안은 채 벤야민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고생해 주었구나. 고마워.”
“……네, 스승님.”
벤야민은 얌전히 스승의 손길을 받았다. 오랜만에 머리칼에 닿는 따뜻한 체온이 좋아서, 그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허, 참.”
“와아…….”
사라의 앞에서 눈가를 붉히며 온순해진 벤야민을 본 페넬로아와 일렉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벤야민이 한껏 내숭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그렇게 스승의 칭찬을 즐기던 벤야민은 이내 이쯤 되면 툴툴거리며 시비를 걸어야 할 누군가가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
벤야민이 시선을 들어 스승의 품에 안겨 있는 클로드를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스승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칭찬받고 있는 벤야민을 보더니 이내 귓가를 붉히며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흥.”
소심하게 흥흥거리는 클로드를 보고 벤야민은 피식 웃었다.
사라의 옷자락에 슬쩍 얼굴을 비비는 것으로 보아 무어라 하고 싶은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창피한 것 같았다.
“……저어, 나도.”
그때 페넬로아의 품에 안겨 있던 일렉사가 꼬물거리며 사라를 바라보았다.
일렉사는 페넬로아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치를 살피면서 살며시 두 팔을 벌렸다.
“일렉사 님도 이리 오세요.”
사라는 웃으며 일렉사에게 남은 한 팔을 벌렸다.
순간 환하게 밝아지는 일렉사를 보며 페넬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자 일렉사는 울 것 같은 눈망울을 하고선 웃으며 사라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나도, 나도 무서웠어.”
“네에, 일렉사 님도 고생하셨어요. 페넬로아 님도요.”
사라는 페넬로아에게도 미안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안전하게 지켜 드리려고 암브로시아 저택으로 모셨는데, 이렇게 되어 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도 확실하게 보상하실 거라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마물들의 공격에서 지켜 주셔서 감사했어요.”
페넬로아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사실 암브로시아에 머물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일렉사의 유모였던 크라시다는 사실 오를린 후작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입양아였다.
그녀는 자신이 후작가에서 쫓겨나기 전에 먼저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아마 3황자가 마련해 준 저택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의 눈을 피해 크라시다가 어떤 술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직 오를린 후작가를 휘두르기엔 힘과 명분이 부족한 페넬로아에게 크라시다를 막아서기란 쉽지 않았다.
암브로시아의 그늘 아래 숨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제가 도움받은 것도 있고, 앞으로도 기댈 것이 많아요. 그러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무례는 무례지요. 찾아오신 손님이신데…….”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기사단을 포함한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공작님께서도 페넬로아 님과 일렉사 님을 저택에 머물게 하면서 암브로시아의 힘에 대해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셨습니다.”
“주군께서 말입니까?”
“네, 이 자리에 제이드 경이 있으셨더라면 자세하게 설명을 들으실 수 있겠지만…… 지금은 공작님 곁을 비울 수가 없어서요.”
암브로시아의 힘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은 절대적인 금기였다.
일전에 10년 동안이나 저택에서 일했던 1황자의 끄나풀을 냉정하게 끊어 내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평생을 다 바쳐 암브로시아의 비밀을 지켜 온 그들에겐 아주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사라는 페넬로아와 일렉사가 그 사실을 안 순간 예민하게 반응한 암브로시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3황자님께서 황위에 오르시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일입니다. 페넬로아 님과 일렉사 님이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신다고 해서 암브로시아가 흔들리진 않아요.”
“밀런 소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암브로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페넬로아 님.”
“암브로시아에서 앞으로 지내시는 데 결코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베론과 론다는 언제 위협을 했냐는 듯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암브로시아 기사단도 조용히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괜찮아요, 이미 암브로시아 공자가 우리를 감싸 주었으니까.”
페넬로아는 불편한 기색을 지우고 웃어 보였다.
암브로시아 사람들이 어찌했든, 그들의 주인인 클로드가 페넬로아와 일렉사에게 호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작은 클로드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그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페넬로아는 충분했다.
“아마 내일이면 3황자께서도 암브로시아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크롬벨 제국의 황제가 되려는 자는 그 힘을 견딜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 말은,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 일레온을 차기 황제로 생각하신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사실 그녀는 에단이 차기 황제로 2황자인 일리오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에단은 일리오르를 급격하게 꺼려 하며 3황자를 차기 황제감으로 점찍어 놓았다.
어쨌든 그녀가 아는 미래와 소설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3황자였으니, 사라 또한 달가운 일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래의 황후 폐하.”
“저야,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페넬로아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척하며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페넬로아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인 사라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클로드 님의 힘이 이런 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빨리 공작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도 무언가 짚이는 점이 있고…….”
클로드에게 일어난 변화를 좀 더 면밀하게 알아볼 때가 왔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라는 잠시 이들의 곁을 떠나 있어야만 했다.
점차 하나둘씩 쌓여 가는 의문점들을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라 님, 그럼 지금 바로 다시 가 보셔야 하는 거예요?”
메이의 물음에 사라의 품에 안겨 있던 클로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울먹울먹한 눈으로 사라를 바라보는 클로드의 눈에는 간절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유모, 벌써 가?”
“그게…….”
“갈 거야?”
사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클로드와 눈을 맞추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항복하며 말했다.
“조금 더 클로드 님 곁에 있다가 돌아가도록 할게요. 급한 건 처리했으니까요. 알톤은 공작님께서 잘 지키고…… 아?”
클로드를 달래던 사라의 말이 천천히 멎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암브로시아에 넘어오기 전 에단과 함께 있었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앗,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 허락도 안 구하고 와 버렸는데…….”
뒤늦게야 깨달았다.
분명 에단과 함께 거울 아티팩트를 통해 암브로시아의 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올리븐의 도발에 열 받아서 뛰쳐나와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 에단만 두고 와 버렸다는 것 또한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저어, 주군.”
“조용.”
같은 시각. 제이드는 심기가 불편한 주군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티팩트를 통해서 상황을 해결해 보겠다던 사라가 거울 속으로 아예 들어가 버린 후로 줄곧.
“……사라는 날 잊은 건가.”
에단의 좁혀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