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59화
저 장막에서 암브로시아의 힘과 유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같은 힘을 만나면 요동을 치던 암브로시아의 힘이 이번만큼은 어쩐 일인지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온전히 같은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에단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손을 밀어 넣었다.
장막은 아주 부드럽게 에단을 받아들였다.
“……?”
제이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사히 통과한 에단의 팔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빠르게 주변을 돌아본 제이드는 지켜보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것 같군.”
에단은 장막 너머로 넘어간 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작은 이질감조차 들지 않았다.
굳이 힘을 두르지 않아도 저 장막을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더 들어가진 마십시오.”
“음…….”
제이드의 만류에 에단은 잠깐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내 크게 한 걸음을 걸어 장막을 통과했다.
“주……!”
깜짝 놀라 손을 뻗던 제이드는 장막 너머에서 멀쩡하게 그와 눈을 맞추는 에단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왜 거기 계십니까?”
“넘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특별하니까?”
“……갈수록 밀런 소백작님을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만, 제 착각이겠죠?”
“착각이 아닌 듯싶어.”
에단은 옅게 웃으며 여태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던 장막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알톤 영지가 나올 것이다. 걸어서 한두 시간 남짓한 거리.
1황자와 내통하는 타국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장막 너머를 파악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암브로시아의 정보원이라고 할지라도 알톤에 대해 파악할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원을 통해 알아내는 것과 직접 알톤에 들어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정보의 질이 달랐다.
“……주군, 그 생각 다시 집어넣으세요.”
“경.”
“제발요.”
“미안하지만…….”
“저 진짜 죽습니다. 주군 혼자 저기 들어가시면 제가 죽어요.”
“비밀로 해 줄게.”
에단의 제안에 잠시 솔깃해하던 제이드가 이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도리질 치며 말했다.
“이게 비밀로 한다고 해서 될 일입니까? 내일이면 밀런 소백작님이 오실 테니 제발 그때까지 기다리면…….”
“언제부터 우리 암브로시아가 사라의 도움이 없으면 이런 문제 하나 해결 못 하는 가문이 되었지?”
“그럼 암브로시아가 이런 장막 같은 걸 상대해 본 역사가 있기는 합니까?”
“그건 없지.”
에단은 처음으로 제이드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경은 갈수록 말솜씨가 늘어.”
“엇, 감사합니다.”
“그런 김에 밤 산책을 좀 다녀오도록 할게.”
“예예, 잘 다녀오십…… 시오, 라고 제가 말할 것 같습니까?”
평소 듣기 힘든 에단의 칭찬에 헤벌쭉했던 제이드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에단은 아까움에 혀를 차며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반지는 빼놓고 갈 테니까.”
“예? 그게 없으면 주군의 힘은…….”
제이드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다가 이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장막 안으로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반대로 저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에단이 저 안에서 어떤 짓을 해도 밖으로 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
제이드는 새파랗게 빛나는 주군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나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 있었던 주군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목에 드리우던 목줄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날이 밝기 전에는 돌아올 테니 그 전까지 경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네.”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시를 들으며 제이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 * *
“에헤헤.”
클로드는 답지 않게 헤벌쭉하게 웃으며 사라의 품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따뜻하게 감싸는 사라의 체온은 클로드에게 엄청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괴물들 사이에서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클로드는 웃으며 자신의 등을 쓸어내려 주는 사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일까지 옆에 있어 주는 거지?”
“그럼요. 내일 아침도 함께 먹을 거예요.”
“……!”
아이의 뺨이 붉어지며 눈동자가 반짝반짝 예쁘게 빛났다.
사실 클로드도 알고 있었다. 제국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와 사라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한시가 급한 일인 만큼 자신이 조금 무섭고 외롭다고 해서 사라가 옆에 있어 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저는 대륙의 평화나 제국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을 뿐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은 클로드 님이세요. 그 어떠한 것도 클로드 님보다 우선시 될 수 없죠.’
사라는 망설임 없이 클로드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피해를 입은 암브로시아 저택을 복구하면서도 단 한 번도 클로드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보고 싶어서 혼났다는 말이 진짜라는 것처럼 사라는 한시도 클로드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사실 그건 클로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고마워…….”
클로드가 수줍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사라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더 고마워요, 클로드 님. 의연하게 버텨 주셔서요.”
“……응.”
“클로드 님은 나중에 단단하고 강인한 어른이 될 거예요.”
“아버지처럼?”
“네, 공작님처럼요.”
사라의 말에 클로드의 눈은 마치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빛났다.
그런 아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라는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순수한 애정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잘 보였다.
“나 조금 행복한 것 같아, 유모.”
“어머나.”
클로드는 사라를 끌어안으며 조금 더 그녀의 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에 사라가 먼저 하지 않으면 잘 해 주지 않는 스킨십을 적극적으로 해 왔다.
사라의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클로드 님,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해서 숨이 막혀요.”
우리 아기 고양이. 사라는 클로드를 끌어안고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뺨을 부비고 냄새를 맡으며 지난 그리움을 달랬다.
클로드 또한 간지러움에 꺄르르 웃으며 자지러지면서도 사라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모랑 아버지랑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저도요.”
클로드는 바로 튀어나오는 사라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난 진짜야. 진짜 유모랑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어머, 저도 진짜예요.”
사라와 클로드는 서로의 말이 진짜라고 주장하며 말씨름을 했다.
클로드의 주장은 대충 이러했다.
귀족 자제의 유모는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젖먹이 유모로 신생아 때부터 육아를 전념하는 쪽.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의 정서적인 케어와 함께 성인이 될 때까지 그 곁을 지키며 보필하는 쪽.
사라는 그 둘 중 후자인 쪽이었다.
그런 경우 모시던 귀족 자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 가문에 가신으로 남아 작위를 받거나, 시녀장이 되어 살림을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밀런 소백작이었다. 그녀가 꾸려야 할 가문이 있었고, 젊고 어렸으니 금방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해 일찍 유모 일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나중에 결혼이라도 하면 유모의 아가는 이제 내가 아니게 될 거잖아.”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클로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에게도 소유욕은 있었다. 그것도 에단을 닮아 아주 많은 편이었다.
사라는 젊고 아름다워 청년들의 구애가 끊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자칫하면 빼앗길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정말 억울하네요, 클로드 님. 제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왜 하나요?”
사라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슬퍼했다.
‘에단 암브로시아라는 남자를 두고 어떻게 다른 남자한테 반할 수 있겠어.’
사라는 요즘 에단 암브로시아 때문에 다른 남자들이 오징어로 보이는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사라가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자신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이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제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그것들을 욕심껏 전부 다 지켜 내고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더 탐이 났다.
“저는 절대 클로드 님과 공작님을 두고 결혼할 생각 없어요.”
사라는 은근슬쩍 제 마음을 흘렸다.
그러자 아이답지 않게 눈치가 좋은 클로드의 귀가 쫑긋해졌다.
“흐으으으음?”
클로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희미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클로드는 아직 너무나 어렸다.
“있잖아, 유모. 그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물어보세요.”
“유모는 나와 맹약을 했잖아. 내가 행복해질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그랬죠.”
“그럼 만약에 내가 행복해지면 유모는 떠날 거야?”
클로드의 물음에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맹약이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클로드의 유모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클로드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해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을 억누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갈까 봐 두려워서 눈앞의 행복에 집중할 수 없다면, 그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네.’
사라가 유모가 아니어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다만 이걸 클로드가 받아들여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을 뿐이었다.
“……클로드 님,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사라는 조심스럽게 클로드를 향해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언젠가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하려니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뭔데?”
비밀이라는 말에 클로드는 귀를 쫑긋하며 달라붙었다.
그런 아이의 귓가에 사라는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저 사실 공작님이랑도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그……, 공작님의 바로 옆자리에서 말이에요.”
사라는 처음으로 제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
그리고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클로드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