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61화
“그게 무슨 소리세요?”
벨루나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조금 오래라고 했지만 벨루나가 생각하는 기간과 사라가 생각하는 기간은 그 기준부터가 다를 것이다.
“너희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사라의 말에 벤야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마탑에서 스승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때 느꼈던 섬뜩함이 본능적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사라의 손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그러니까, 스승님. 제발…… 무슨 생각인지 알려 주세요. 이번에는 저와 벨루나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란 걸 잘 아시잖아요.”
“…….”
“멋대로 굴었다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만일 이번에도 사라가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벤야민과 벨루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사라도 언질을 준 걸 테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 알았어.”
사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제자들을 보며 결국 작게 웃어 버렸다.
두 사람 모두 아직도 처음 마탑으로 데려왔을 때 각인된 새끼 병아리처럼 사라만 졸졸 따라다니던 모습 그대로였다.
숨기고 입 안으로 삼키고 홀로 감당하려고 했을 때 결과가 더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차라리 도움을 청하고 힘을 빌리고 한 사람의 지혜라도 더 합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고란 말이었다.
“너희도 암브로시아의 힘을 연구하는 데 힘을 보태 왔으니 자격이 있지.”
“……!”
사라는 동시에 환해지는 제자들의 얼굴을 한 번씩 어루만져 주며 말을 이었다.
“암브로시아에 오고 난 뒤 두 번 정도 그곳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어.”
“두 번씩이나요?”
“그래, 아주 잠깐이었지만……. 다녀오고 나니 이쪽의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지 뭐니.”
처음 대한민국에서 잠들어 있는 박혜연의 몸을 봤을 때는 정말 찰나의 시간만 머무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갔을 때는 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지만, 그 시간에 비해 사라 밀런의 시간이 무작위로 흘러가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이 멋대로 행동해 놓은 흔적들이 있더구나.”
“……그게 무슨.”
사라의 말에 벤야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나의 영혼을 나누고 있는 몸이었다. 기억에 공백이 생길 리가 없었다.
벨루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영혼이 둘로 나누어진 걸까요?”
“아니.”
사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됐더라면 그녀가 바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혼이 끊어지거나 일정 부분만 공유되는 느낌이 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생각을 다르게 해 보기로 하였다.
박혜연의 노트북 속 마력으로 이루어진 제국어로 써 놓은 일기 형식의 글.
그건 누가 보아도 사라가 읽어 주길 바라는 글이었다. 그것도 영혼 상태의 사라가.
“내 생각엔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기억이라면…….”
“내 스스로에게 금제를 걸었을 수도 있지.”
사라가 박혜연의 몸과 영혼을 공유하며 살아온 것은 일종의 규칙과도 같았다.
모든 차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
그녀의 영혼 또한 균형을 위해 둘로 나뉘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려고 하면 다른 한쪽에 힘을 더 실어 주어 맞춘다.
“내가 이쪽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균형은 무너지게 돼. 하지만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틴다는 건 다른 쪽의 내가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야.”
“저쪽의 몸이 깨어나지 못하는 걸로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그래.”
사라는 웃으며 기특하다는 듯 벤야민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심각한 벤야민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보통의 대가로는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균형을 깨트려야 하죠.”
“맞아.”
“그럼 균형은 또 다른 대가를 필요로 할 겁니다.”
“그것도 맞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라를 보며 무언가를 직감한 벤야민이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며 물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려고 하십니까?”
“나의 생명력.”
“스승님!”
“……같지만 생명력이 아닌 것.”
“하!”
이어지는 사라의 말에 벤야민이 참은 숨을 토해 냈다.
순간 사라가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는 줄 알고 속이 다 뒤집힐 뻔했다.
“내가 있던 한국에서는 이런 말이 있단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여긴 제국입니다.”
사라는 순간 혼이 빠진 것 같은 벤야민과 벨루나의 얼굴을 보며 깔깔 웃었다.
“나는 여기서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란다. 내 삶을 쉽게 놓아 버릴 순 없지.”
그녀는 진심이었다. 방금 전 클로드와 오래오래 함께 살자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그 약속을 저버릴 생각도 없고, 에단 암브로시아를 아직 꼬시지도 못했는데 허무하게 놓아 버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난 클로드 님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 거야.”
“예에, 제발 그래 주십시오.”
사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벤야민을 향해 찡긋 눈짓했다.
벤야민은 처음으로 스승에게 불경한 눈을 하고선 그녀를 째려보았다.
벨루나 또한 원망이 그득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사라는 결국 두 손을 들고선 열심히 해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쪽으로 넘어간 그 두 번은 전부 다 암브로시아의 힘을 제어하려다가 생긴 일이었어. 그러니까 암브로시아의 힘이 이번에 내가 그리로 넘어갈 수 있는 키가 될 거야.”
“그럼 잠들 것 같다는 말이…….”
“맞아, 이번엔 좀 더 강한 암브로시아의 힘이 필요해. 그리고 더 많은 대가가 필요하고.”
“…….”
“이번 기회에 알아내야겠어. 내가 치르고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세상이 뒤바뀌었는지도 말이야.”
일련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사라는 자신이 알아내야 할 진실이 두 가지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지난번 박혜연의 세상으로 갔을 때 노트북에 남겨져 있던 일기였다.
일기에서 박혜연은 ‘미래’와 ‘어둠의 꽃’을 바꾸어서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소설 어둠의 꽃이 본래 이 세상의 미래고, 그녀가 알고 있었던 ‘미래’가 허구의 세상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올리븐이 익히고 있던 흑마법이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흔적 역시 한두 해짜리가 아닙니다. 최소 백 년 이상은 됐을 겁니다.’
‘이 정도의 흑마력을 익힌 존재가 대륙에 이 정도의 상흔을 남겨 두었을 정도면 저희가 모르고 있었을 리 없습니다. 대장로님 이건…….’
마탑의 마법사들은 아직도 대륙 곳곳에서 흑마법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 사라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지금 이 대륙에서 흑마법을 정식으로 익힌 자는 올리븐과 그가 물들인 다른 마법사들뿐이었다.
다른 흑마법사들은 올리븐에게 흑마력을 전수받아 익혀 가고 있는 단계였다.
하지만 대륙에서 발견된 흑마법의 상흔은 단순히 갓 익힌 자들의 흔적이 아니었다.
이미 흑마법의 절정에 달한 자가 휩쓸고 간 뒤에 시간이 흘러 덮어진 흔적이었다.
최소 백 년 이상은 된.
“올리븐에게서 뽑아낸 이 힘이 도움이 될 거야. 나 대신 대가를 치르기에 아주 충분할 정도지.”
사라는 제 손에서 어쩐지 파르르 떨고 있는 듯한 검은 보석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벤야민과 벨루나의 몸 또한 움찔하고 떨렸다.
“스승님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지?”
“……그러게.”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중얼거리다가 이내 은근한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랜만에 제자들끼리 사이좋게 뜻이 통한 순간이었다.
“그럼 그곳으로 가는 건 문제없지만, 다시 이곳으로는 어떻게 돌아오시려고 합니까?”
“그게 말이야…….”
사라는 비밀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손짓했다.
벤야민과 벨루나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의 손짓대로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사실 몰라.”
“……예?”
“……?”
벨루나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툭툭 털었다.
하지만 민망하게 웃는 사라의 얼굴에서 장난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돌아올 때는 너무 순식간이어서…… 얼마나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고…….”
“스승님!”
“어머나, 놀라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벤야민에 사라가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벤야민이 그녀의 앞에서 저렇게 큰소리를 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제자의 흔치 않은 모습에 사라가 웃으며 재밌어하자 벤야민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가시겠다는 겁니까?”
“돌아올 수는 있지! 당연히!”
“언제요!”
“……으음.”
사라는 곤란한 듯 얼굴을 흐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아.”
그 모습을 보며 벤야민은 깊은 한숨과 함께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예 생각이 없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게 말이야.”
“제가 스승님을 모릅니까? 믿는 구석이 있으니 도박을 하시는 거겠죠.”
“맞아…….”
“말씀하세요.”
사라는 잠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이내 슬쩍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드 님의 힘 말이야.”
“네?”
“너희가 보기엔 어떤 것 같니?”
“…….”
벤야민과 벨루나는 사라의 물음에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이내 한 가지 가설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설마, 설마 스승님…….”
“맞아.”
“아무리 그래도 이론상으론 불가능합니다.”
“원래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암브로시아의 힘이지.”
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회의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현명한 빛을 뿌리며 빛나고 있었고, 입가에 떠오른 자애로운 미소에는 단단한 자신이 담겨 있었다.
“그 힘이 가진 욕망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와 줄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