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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62화 (162/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62화

* * *

장막으로 둘러싸인 알톤 영지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톤 영지는 폐허가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에단의 눈으로 본 알톤 영지는 엉망이 되긴 했지만 최소한의 생활은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영지민들은 문을 걸어 잠갔지만 굴뚝으로는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거리가 있는 자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은밀하게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영지민들을 돌보는 자가 있었군.”

에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저 멀리 보이는 알톤 영주 성을 바라보았다.

1황자와 흑마법사들에게 장악된 영지의 상태가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면, 분명 누군가가 저 안에서 최선을 다해 최악의 상황을 막고 있다는 뜻일 터.

사라가 아쉬운 한숨과 함께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부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아무래도 제이드에게 약속한 것보다 조금 늦게 돌아가야 할 듯싶었다.

사라가 암브로시아 저택에서 돌아오기 전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소식을 전해 주려면 조금 더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에단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그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골목 너머에서 들려왔다.

“음?”

그는 기척을 지우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놈과 연결이 끊겼다니까!”

“올리븐 님의 연락은 언제나 제멋대로였지 않습니까.”

1황자 카제르의 목소리였다.

흥분한 듯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양되어 있었는데, 그 너머로 은밀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카제르의 곁에는 어떤 남자 하나가 곤란한 얼굴을 한 채 남몰래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이번엔 뭔가 달라. 느낌이 다르다고!”

“어떤 느낌이신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네까짓 게 듣는다고 뭘 알아듣기나 하겠어?”

“죄송합니다.”

남자의 얼굴에 잠시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흥분한 카제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

에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오랜만에 보는 카제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전에는 없던 자신감과 더 불어난 광기로 카제르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하지만 푹 꺼진 눈에 거뭇한 그림자가 눈 밑까지 내려와 있는 얼굴에선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천천히 제 욕망을 태워 죽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잘됐어. 이제 슬슬 거슬리던 참이었거든.”

“전하…….”

“영주 성으로 간다! 이 정도면 쓸 만한 시체도 얻었으니 흑마법사들의 허기를 달래 주기에는 아주 좋겠지.”

카제르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꽤나 높은 수준의 흑마법을 구사하고 있어.’

카제르의 성취가 에단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아 보였다.

제아무리 올리븐이 직접 힘을 불어넣어 줬다고는 하나, 공간 이동 마법까지 할 정도면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사라의 말에 따르면 흑마법은 유독 체질을 많이 따지는 마법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흑마법을 익혀 그것을 체질로 만들어야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1황자의 인성이야 의심할 것도 없지만, 흑마법이 저토록 잘 맞는 체질이라니.”

에단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카제르의 옆에 있던 남자가 카제르가 머물던 자리에 침을 뱉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쓰레기 같은 새끼. 버러지 같은, 짐승만도 못한……!”

남자는 분한 듯 땅을 발로 차며 분개하다가 이내 절망감에 휩싸여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무너졌다.

“알톤을, 알톤을 이리 망쳐 놓고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 괴물 같으니라고!”

에단은 그제야 카제르의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에 주목했다.

그의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던 크롬벨 제국의 귀족 명단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눈을 한번 깜빡였을 그 시간 동안 에단은 남자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알톤 영주의 차남, 파웰 알톤. 미혼. 영지의 후계자로 장남보다 이쪽이 더 적합함.’

언젠가 넣어 두었던 정보는 아주 알기 쉽게 정리되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단의 냉철한 시선이 아직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파웰을 가늠했다.

적인가 혹은 아군인가. 끌어들일 여지는 있는가, 혹은 여기서 바로 처리해야 할 수뇌부인가.

“아아, 신이시여! 제발 우리 알톤을 굽어살펴 주소서.”

파웰은 지금 그의 목에 칼날을 드리운 사신이 목숨줄을 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먹먹하게 울려 퍼지는 기도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에단 암브로시아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나 말이다.

“아, 아아! 파웰 도련님!”

“파웰 도련님이다!”

그때 신에게 울부짖는 파웰의 목소리를 들은 알톤 영지민들이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오늘은 무사한 건가? 방금 1황자가 시체 하나를 끌고 갔는데. 그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어서 내게 말해 주게!”

“흑, 흐흑……. 도련님, 제 아들 마크입니다. 저놈이 식수가 떨어졌다며 구해 오겠다고 나가서는!”

“식수가 떨어지면 창문에 푸른 천을 묶어 놓으라고 하지 않았나! 나와 아버지가 가져다줄 거라고…….”

“가뜩이나 저 악마 같은 1황자의 손아귀에서 영지를 지키려는 영주님에게 그런 수고를 끼칠 수 없다고……, 마크 그 자식이! 어흐흐흑!”

아들을 잃은 노인이 울부짖었다. 절망 어린 파웰의 얼굴에 깊은 죄책감이 떠올랐다.

“알톤의 수호자로서 우리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다. 마크, 마크의 장례는 후하게 치러 줄 테니…….”

“어흐흑, 아닙니다. 파웰 도련님과 영주님이 1황자의 눈을 가려 주시기 전까지는 저놈들이 집 안까지 쳐들어와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지금에서야 집 안에서만큼은 마음을 놓고 사는데…….”

파웰은 무너지는 노인의 몸을 손수 안아 지탱해 주며 눈을 감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영지민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을 넘어서서, 생존이라는 문제 앞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카제르 드 크롬벨이라는 위기에 대처하고 있었다.

‘쓸 만해.’

상황을 지켜보던 에단의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파웰 알톤이라는 인물에 대한 쓰임새가 마치 커다란 그림 속에 작은 장치처럼 나타났다.

그러자 사라가 사랑해 마지않는 에단 암브로시아의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영지민과 대화를 나누며 사태를 파악하고 다시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영주 성으로 향하는 파웰의 뒤를 에단이 조용히 뒤따랐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알톤 영주 성에 가까워질수록 인적은 더더욱 드물어졌고, 쥐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길이 이어졌다.

그러니 그 길 위에서 들리는 발소리라곤 오직 파웰의 것 하나였다.

“…….”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도 섬찟한 느낌에 파웰은 연거푸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

파웰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다 못해 이젠 뜀박질을 시작했다.

탁탁탁탁탁!

딱딱한 바닥을 힘껏 차며 온 힘을 다해 달리는 파웰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뛰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본능적인 감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허억, 헉!”

헉헉거리며 뛰던 파웰의 앞에 무언가가 휘리릭 날아와 탁, 하고 꽂혔다.

“……흡!”

파웰은 급히 몸을 멈추고 딱딱한 바닥에 부드럽게 꽂힌 것을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날이 선 칼날이 가장 먼저 파웰의 부릅뜬 눈을 투명하게 비쳤다.

“저, 저건 암브로시아 공작가의 문양인데…….”

비록 제국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알톤 영지의 차남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또한 크롬벨의 귀족이자 제국민이었다.

그는 단번에 자신의 앞에 날아와 꽂힌 칼이 암브로시아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파웰 알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적의가 없었으나, 완전히 미쳐 버린 카제르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위압감에 파웰은 숨을 삼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파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 암브, 암브로시아 공작님?”

에단의 얼굴을 마주한 파웰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끔뻑이는 파웰을 보며 에단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예전에 황궁 연회에서 스치듯 본 적이 있었지. 그간 평안하였나, 알톤 경?”

지극히 귀족스러운 예법에 의거한 영혼 없는 안부 인사에 파웰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장막 밖에서……, 우리 알톤의 상황을 알아차린 겁니까?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 직접 찾아 주실 정도로.”

감격에 젖은 파웰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파웰은 마음을 놓고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에단 암브로시아의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외모는 마치 하늘에서 신이 친히 내려 준 사자처럼 보였다.

만일 에단 암브로시아의 얼굴로 신의 조각상을 만든다면 파웰은 오늘 당장 전 재산을 헌금할 자신도 있었다.

에단은 자신을 바라보는 파웰의 눈동자가 환희에 잠기는 것을 보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그대, 알톤을 지키고 싶나?”

“물론, 물론입니다. 알톤을, 알톤의 영주민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의지가 묻어 나오는 대답에 에단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파웰과 눈을 맞추며 그는 입을 열었다.

“알톤과 그대의 영주민을 위해 내게 작은 도움을 주었으면 해. 하겠는가?”

“하겠습니다!”

에단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파웰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힘을 잔뜩 주며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이리 세게 잡지 않아도 그 뜻은 알고 있네.”

“아, 예! 죄송합니다!”

미간을 좁히는 에단을 보고 파웰은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자유로워진 한쪽 손을 바라본 에단이 품에서 슬쩍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암브로시아 공작님, 무엇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음?”

“알톤 영지는 사악한 흑마법사가 만들어 낸 장막으로 막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들어오신 겁니까?”

파웰의 질문에 에단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어색하게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는 에단의 모습은 어쩐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았을 때의 사라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잘?”

“예?”

“그냥 알아서 잘, 들어왔다고 쳐 두지.”

“……?”

심지어 어설프게 대답하는 것 또한 사라와 닮아 있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일방적인 짝사랑이라고 해도 닮긴 닮아지는군, 이라고 에단은 막연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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