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64화
에단은 덜덜 떨며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수하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사라는?”
“저도 모르는데요.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저는 여기서 주군만 기다렸는데요.”
“지금 시간이 늦었는데. 아침에는 돌아오기로 하지 않았었나?”
“주군도 금방 온다면서 안 왔는데요. 사라 님도 아침까지 오기로 해 놓고 안 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사라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적이 없는데. 혹시 클로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저택의 상황을 생각해 보려던 에단은 아까부터 미묘하게 거슬리던 제이드를 보며 확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하퍼 경. 말투가 조금 건방져지지 않았나?”
에단의 물음에 제이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답했다.
“어차피 주군 손에 죽을 목숨……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죽여.”
“진짜요?”
“그래.”
“약속하신 겁니다?”
“……약속하지.”
에단이 확답해 주자 제이드의 얼굴이 환해지며 자세가 절로 곧게 펴졌다.
그러곤 노골적으로 비굴하게 양손을 슥슥 비비며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어우, 살았다. 세상에 주군, 제가 사신이 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꿈을 꿨지 뭡니까.”
끔찍했다는 것처럼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제이드의 모습은 정말 뻔뻔해 보였다.
“…….”
그 작태에 에단은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했다.
제이드 하퍼.
그는 이 크롬벨 제국에서 사라 다음으로 유일하게 에단 암브로시아의 입을 막을 수 있는 자였다.
“아무튼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이 제이드 하퍼! 주군의 충실한 종으로서 아주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
이런 걸 수하라고 데리고 있었다니.
에단은 잠시 보좌관을 잘못 고른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머리는 좋은데 바보였다. 그러니까 머리가 천재인데 사람이 바보였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제이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아.”
그는 결국 저 경박한 수하를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저 공포의 주둥아리를 가지고 다른 이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2황자와 3황자는? 어떻게 하고 있지?”
“황제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초조한 모양입니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까 봐 말입니다.”
제이드의 말에 에단은 잠시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가 이내 휙 하고 그를 지나쳐 갔다.
황자들이 마련한 처소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에단이 잠시 멈추더니 이내 다른 생각을 했는지 방향을 틀었다.
“일단 사라부터 만나 봐야겠어.”
“아직 안 오셨잖아요.”
“이쪽으로 넘어오게 만들어야지.”
“어떻게요?”
“미인계로?”
“…….”
이게 내가 모시는 주군이라니.
제이드 하퍼는 순간 생각하였다.
자신의 주군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하고 일반인의 범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현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저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얼굴에서 오는 자신감이긴 하지. 그런데…….’
정말 미인계로 사라를 이쪽으로 오게 만들겠다는 저 발상은 대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그게 가능하다면 자신은 이제부터 제이드 하퍼가 아닌 제이드 우퍼라고 생각하며 미래에 우퍼가 될 제이드가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으니 경은 2황자와 3황자 측에 동시에 전해. 이번 일이 끝나는 순간 암브로시아는 손 떼겠다고.”
“……주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손을 떼겠다뇨.”
“말 그대로야. 알톤과 1황자, 그리고 흑마법사들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암브로시아는 가문의 문을 닫는다.”
에단의 선언에 제이드는 온몸에 흐르는 피가 뒷골로 모이는 듯한 기분을 받으며 넘어가려는 몸을 애써 지탱했다.
“어째서요! 지금 다 해 놨는데! 여기서 가만히 떨어지는 것들을 주워 담아서 휘두르기만 해도 황실은……!”
“쉿.”
“…….”
에단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눈빛이 시리게 빛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경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을 알고 있나?”
“처음 들어 보는데요.”
“사라가 알려 준 말이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지.”
에단의 말에 제이드는 ‘주군께서는 밀런 소백작님이 하는 말이라면 다 좋아하시잖아요.’라는 말을 애써 삼키며 물었다.
“그래서 그 말이 지금 가문의 문을 닫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암브로시아는 고래들의 싸움이 끝난 후 터진 새우의 살만 날름 골라서 먹으면 된다는 거야, 경.”
“…….”
제이드의 얼굴에 가득 담겨 있던 의문이 에단의 말에 서서히 경악으로 바뀌어 갔다.
주군의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저 안에서 뭘 보고 오신 겁니까?”
제이드의 질문에 에단은 그저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고래든 새우든 단숨에 저 밑까지 끌어당기는 바다의 심연과도 같아 보여서, 제이드는 몸을 떨어야만 했다.
* * *
대망의 날이 밝아 왔다. 알톤 영지를 위해 수도에서 출발했던 모든 귀족과 군사들이 한곳에 모였다.
2황자가 이끄는 군과 3황자가 이끄는 군은 각각 서로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했으나, 결국 이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흑마법사와 1황자의 손아귀에서 알톤 영지를 구해 내는 것.
“오늘 알톤 영지에 드리운 저 흉악한 장막을 거둬 낼 것이다! 고통받고 있는 알톤의 제국민을 구해 내 크롬벨 제국의 건재함을 온 대륙에 보여라!”
“와아아아아!”
2황자 일리오르가 나서서 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저 장벽이 사라지면 그들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흑마법을 상대해야만 했다.
한평생 살면서 마법사라는 존재도 보지 못했는데, 책이나 오랜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던 악당인 흑마법사라니.
병사들은 물론이요, 각 귀족들이 차출하여 보낸 기사단까지도 일말의 두려움을 떨치기 힘든 상태였다.
“마탑의 마법사가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흑마법사들은 결국 마탑의 불순물일 뿐, 진정한 마법사가 우리 곁에 있으니 오늘의 승리는 크롬벨의 것입니다.”
2황자 일리오르에 이어 3황자 일레온까지 앞으로 나서 그들을 독려했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졌던 사람들의 얼굴에 그제야 자신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제 모든 귀족들과 군사들의 시선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브로시아의 영역으로 향했다.
저곳에서 마법사와 함께 있는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 *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에단은 손수 사라의 로브를 챙겨 들고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사라는 시녀는 물론이고 수행할 사용인을 한 명도 대동하지 않았다.
해서 알톤 영지로 향하는 내내 그녀의 시중을 드는 일은 에단의 몫이 되었다.
사라의 시중을 드는 일이라면 눈을 빛내며 자원할 암브로시아의 기사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들은 서슬 퍼렇게 웃는 주군의 얼굴에 꼬리를 말고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긴장한 모습이 아니군요.”
“저게 뭐 별거라고요.”
사라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는 얼굴로 싱그럽게 웃었다.
그 모습에 에단은 작게 웃으며 챙겨 온 로브를 직접 펼쳐 그녀가 입기 편하게 대 주었다.
처음엔 그의 손길을 어색해하던 사라도 이쯤 되니 자연스럽게 에단이 해 주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머리도 빗겨 줄까요.”
“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로브를 뒤집어쓰면 엉망이 될 테니까…….”
에단의 물음에 사라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핏 보면 놀라 거절하는 것 같았지만, 에단은 웃으며 물러나면서도 은근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귓가에 은근한 붉은색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모르는 척 여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보기 좋게 땋아서 묶으면 말끔할 텐데.”
“그래요?”
“물론입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에단의 말에 사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커다란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로 오세요.”
그는 기쁘게 웃으며 천막 안쪽에 마련된 작은 거울 앞으로 사라를 이끌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에단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라는 이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거울 앞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공작님이 머리를 땋을 줄 아세요?”
“왜요? 불안합니까?”
“아뇨, 사실 공작님이라면 못하는 게 없을 것 같긴 한데……. 조금 신기해서요.”
거울 너머의 사라가 에단의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보니까 조금 익숙해 보이기도 하고요.”
미묘하고도 은근하게 가늘어진 시선이 에단에게 쏘아졌다.
‘거, 우리 공작님 여자 머리 좀 빗겨 보셨나 봅니다? 하긴 그렇게 인기가 많으시니 공작님 손길을 거쳐 간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다 떠오르는 사라의 얼굴을 보며 에단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익숙하긴 합니다.”
“……오, 그러시군요.”
에단의 대답에 사라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그 모습이 불만이 있을 때의 클로드를 닮은 것 같아서 에단은 조금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쓸데없는 오해로 사라의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는 머리를 손질해 주는 이가 없어서 종종 이렇게 직접 빗질을 하고 머리를 땋고 다녔습니다.”
“……공작님이요?”
“예.”
사라의 두 눈이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예쁘게 빛났다.
“어릴 적에는 머리가 길었었나요?”
“힘이 발현된 이후로 다들 겁이 나서 제게 다가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습니다.”
그 당시 에단은 겨우 클로드의 나이쯤이었다.
힘을 조절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고, 그래서 당시 사용인들은 에단의 시중을 드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돌봐 주는 이가 없으니, 에단은 씻고 입고 먹는 것을 스스로 하였다.
머리를 손질해 줄 이도 없으니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길어졌고,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밟고 넘어지는 일도 허다했다.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귀족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쭉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공작님은 긴 머리를 땋고 지내셨다는 거네요?”
“네.”
“……보고 싶다.”
사라의 시선이 지금은 짧아진 에단의 머리로 향했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면 어릴 적 초상화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
에단의 말에 사라의 어깨가 신이 나게 들썩거렸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축 하고 늘어졌다.
“……?”
그 모습에 에단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는 사라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