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66화
“주군, 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제이드 하퍼는 타이밍이 나빴다.
에단이 사라에게 무어라 더 말을 해 보려는 찰나에 들어와 오고 가던 대화를 끊어 놓았으니 말이다.
“…….”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불만을 표했으나, 화색이 도는 사라의 얼굴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사라가 저렇게 속내를 내비치다니.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지금의 화제가 그녀에게 달갑지 않다는 것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다 마는 것도 모두 그에게 뜻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이번 알톤 영지의 일이 해결되는 것과는 별개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이고 그것이 그에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곧 가겠다.”
“예. 빨리 오셔야 합니다. 지금 전부 다 장벽으로 뛰어들 기세랍니다.”
“그래.”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 사라의 머리 위에 로브의 모자를 씌워 주었다.
곤란한 낯빛이던 사라의 얼굴이 커다란 모자에 쉽게 가려졌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뒤따라오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에단은 사라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에단의 발걸음이 답지 않게 조급했다.
조금만 더 머물렀다간 그녀를 다그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천막을 벗어나는 에단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공작님, 잠시만요.”
그때 에단의 등 뒤에서 그를 다급히 쫓아 나온 사라가 옷자락을 잡아챘다.
에단은 순간 숨을 참았으나 곧 표정을 관리하며 부드럽게 풀어진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남았습니까.”
“…….”
에단의 얼굴을 마주한 사라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 탓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옷자락을 좀 더 강하게 쥐는 손길을 보며 그는 작게 웃었다.
“저는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걱정을 과하게 했을 뿐이죠.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감히 공작님의 힘을 이용하겠다고 대놓고 말했는데요.”
“당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됐습니다.”
“정말요?”
“예.”
에단은 훌륭하게 제 속마음을 속이고 웃어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멀 것처럼 웃어 보이는 에단을 보며 사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번 일이 끝나면 공작님은 제게 화를 내실 거예요.”
“그럼 말해 보세요. 지금 말해 주면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후.”
언제고 사라가 쉬웠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에단은 생각했다.
에단의 한숨 소리를 들은 사라가 몸을 움찔 떨었으나,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씀드리면 분명 저를 막아설 테니까요.”
“애초에 내가 막아설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꼭 필요한 일이에요. 그래서 이 정도밖에 말씀드리지 못해요.”
사라의 말에 에단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면밀한 사정을 털어놓지는 않겠지만, 그가 막아설 짓을 하겠다고 선전 포고하는 건 또 무슨 의도인가.
솔직한 건 좋지만 절반만 솔직한 사라의 모습이 어쩐지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국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차라리 완벽하게 내게 숨기는 편이 더 편할 텐데요.”
“……이렇게라도 말씀드려야 나중에 화를 덜 내실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니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겠군요.”
“뭐를요?”
“이번에 내가 사라에게 곱게 협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윽.”
에단은 작게 신음을 삼키는 사라의 머리 위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니 어디 한번 내 협조 없이 원하는 바를 쟁취해 보시죠.”
“…….”
에단은 사라의 대답은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제 사라는 그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에단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제이드를 불렀다.
“하퍼 경.”
“예.”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말도록.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 둬.”
“……제가요?”
“그래, 그대가.”
“대마법사이신 밀런 소백작님을 저따위가 어떻게…….”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사라의 성격상 절대 외면하지 못할 테니.”
“알겠습니다.”
제이드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라에게서 뒤돌자마자 무섭게 굳어진 에단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불안이 더더욱 그의 목을 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 * *
한편 홀로 남은 사라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내 심장 진정해. 왜 눈치 없이 뛰고 난리야.”
에단은 비록 전과 같이 아름답게 웃었지만 그녀의 예민한 감은 그가 내내 분노해 있음을 알았다.
화가 났으면서 끝까지 그녀에게 웃어 준 공작을 보며 겁을 먹기는커녕 주제를 모르고 뛰는 심장이 우스웠다.
“화내는 것도 멋있으면 어쩌자는 거지. 내 남자가 되어 줄 것도 아니면서 저러는 건 죄야.”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고소를 해도 백만 번은 했을 거라 중얼거리며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협조하지 않겠노라 했으니 암브로시아의 힘을 이용하기가 꽤 껄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렇게 그녀의 안위에 날을 세우는 에단의 모습이 생각보다 좋았다.
진짜 진심으로 온 마음이 다 설렜다.
‘날 좋아하지 않고서는 저렇게까지 못한다!’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의심하다가 단념하고 의심했다가 그럴 리 없다며 단념해 왔다.
하지만 사라는 지금 이 순간 미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이 비단 일방적인 감정만은 아니라고.
“……어디 두고 보세요, 공작님. 원래 남녀 관계는 먼저 깨닫는 쪽이 더 유리한 법이거든요.”
사라는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 * *
알톤 영지의 장벽 아래에 2황자와 3황자 그리고 암브로시아 공작까지 전부 모였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의 끝이 다가온 것이다.
2황자 일리오르는 애써 긴장을 감춘 채 에단에게 다가가 물었다.
“암브로시아 공작, 진정 이번에 동행한 마법사가 저 장벽을 없앨 수 있다던가?”
“물론입니다.”
에단이 확언하였지만 실제로 마법이라는 것을 겪어 본 적 없는 일리오르는 여전히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만일 실패한다면 대안은…….”
“맡겼으면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3황자 일레온은 에단 암브로시아의 미간이 귀찮음으로 좁혀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대신 대답했다.
마법사의 정체는 물론이고 마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페넬로아와 일렉사의 증언으로 생생하게 들어 알고 있는 일레온은 여유가 묻어 나오는 낯이었다.
“그야 그렇다만.”
일리오르는 탐탁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에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장벽이 해결된다고 해도 저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비단 마물들뿐만은 아니었다.
저곳에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힘을 키운다는 흑마법사들이 잔뜩 있다고 했다.
그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단 한 번도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사에 대한 말들을 익혔을 뿐이었다.
일리오르는 조용히 뒤로 몸을 빼며 일레온의 팔을 툭툭 쳤다.
“일레온.”
“예, 형님.”
“저 안에 있을 흑마법사들에 대한 대비는 하였느냐?”
일리오르의 질문에 일레온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리 노골적으로 약한 소리를 한다는 것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위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이니 일레온이 아는 정보가 있어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 뻔한데, 이리 물어 오는 태도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제 사람들을 잃을 수 없다는 간절함 말이다.
“하였지요.”
“……!”
일레온의 대답에 일리오르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마치 황위 경쟁에 끼어들기 전 함께 뛰놀던 다정한 형님의 모습이 보여 일레온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제가 한 대비입니다.”
“네가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끄는 자들 또한 크롬벨 제국의 백성들이 아니냐. 그러니…….”
“형님을 경계해서 알려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흑마법사들과의 싸움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일레온의 시선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법사에게 향했다.
“저 마법사가 전부 상대할 테니까요.”
“……저 안에 있는 흑마법사가 하나가 아닐 거라고 들었는데. 우리 쪽에는 겨우 저자 하나뿐이지 않느냐.”
“암브로시아 공작이 이리 말하더군요. 마법사들의 세계에서는 승패가 머릿수로 나뉘지 않는다고요.”
일레온의 말에 일리오르는 점차 가까워져 이제 로브 아래 하관이 보이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자신감 있게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입매였다.
일리오르의 눈매가 가늘어질 때였다.
일레온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일리오르는 마법사에게서 겨우 눈을 떼었다.
“저 마법사가 어떤 자인지는 들어 알고 계시지요?”
“그래. 마탑의 대장로라고 하더군. 실질적인 마탑의 주인이라지.”
“그럼 마탑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탑의 주인을 정하는지는 들어 보셨습니까?”
“……그건 듣지 못하였구나.”
일리오르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졌다.
마탑은 전설 속에나 존재한다고 믿는 자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신비로운 단체였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아주 귀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일레온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낸 듯싶었다.
“와아!!”
“마법사다, 마법사가 왔다!”
그때 병사들 사이에서 감탄 어린 함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푸르른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 위로 올라선 마법사가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
처음 보는 경이로운 광경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까지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가 손을 휘두르자 그녀의 손끝에서 신비로운 룬어가 마치 사슬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이 한데 뭉쳐져 마치 하나의 거대한 칼날이 되었다.
“마법이다! 크롬벨을 구할 마법이야!”
그것이 뿜어내는 압박감이 어찌나 강대했던지.
마법을 모르는 자들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저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두두두두.
땅이 진동하였다. 병사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겁을 먹고 날뛰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당황하는 것을 잊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자, 장벽이!”
여태까지 모든 이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던 검은 장벽이, 마치 두려움에 떨듯이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어떻게 한낱 인간이 저런 힘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일리오르의 옆에서 일레온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저자가 어떻게 마탑의 대장로가 되었는지 말입니다.”
“…….”
일레온은 서서히 장벽을 가르는 푸른 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을 전부 무릎 꿇릴 수 있는 자만이 대장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 안의 흑마법사들은 전부 마탑 출신이라지.”
“예. 이미 한번 대장로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자들이란 뜻입니다.”
일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쟤들은 이제 다 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