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67화
“……?”
일레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묘하게 천박하고도 시원한 말에 일리오르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일레온, 너…….”
“보세요, 형님.”
일리오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일레온은 턱끝으로 장벽을 가리켰다.
병사들이 일제히 흥분해 환호성을 터트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알톤이 보인다!”
“저 안쪽 너머가 보여!”
“마법사님이 알톤의 장벽을 없애셨다!”
마법사가 만들어 낸 칼날이 완벽하게 장벽을 갈라 낸 후 장벽은 힘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장벽이 생긴 이후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알톤의 땅이 이제야 겨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연 마법사라는 건가.”
일리오르는 약간의 허탈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저것을 목격한 그 누가 저 마법사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 여기겠는가.
‘마법사들이 세상에 나오면 대륙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될 거란 말이 이래서였군.’
마법사들이 권력에 욕심이 없고,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일리오르는 저 마법사를 마탑에서 끌어냈다는 암브로시아 공작을 바라보았다.
“…….”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모습이 드러난 알톤 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마법사가 보여 주는 신비롭고도 압도적인 광경에 무언가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지만, 에단 암브로시아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양 익숙해 보였다.
일리오르의 눈가에 희미한 경계가 서렸다.
“암브로시아 공작은…….”
“이 제국의 충신이지요.”
하지만 그런 일리오르의 중얼거림을 일레온이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는 양 잘라 내었다.
“너는 그리 여기느냐.”
“이리 여겨야 그리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형님.”
“……그렇지.”
일레온의 말에 일리오르는 저 멀리서 검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에단 암브로시아를 경계하는 것은 오늘 이곳에서 살아남은 뒤에 생각해 봐야 했다.
“마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흑마법사들입니다. 과연 탁한 기운이 여기까지 흘러넘치는군요.”
장벽이 거둬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마물들과 흑마법사들이 저 안에서 살기를 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 보려 했던 일레온과 일리오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아무리 황자라고 하지만 결국은 그들이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쟁터에선 고귀한 혈통도 신분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제 한 몸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형님께서는 얼마나 지켜 내셨습니까.”
“여섯 정도. 어제 부관을 내 손으로 죽였다. 폐하의 사람이었으니.”
“저도 제 호위 기사를 베었습니다. 암행 나갈 때도 날 지키던 자였는데, 오늘만큼은 그럴 계획이 없던 모양이더군요…….”
황제는 두 황자를 죽이기 위해 알톤 영지로 향하게 했다.
일레온과 일리오르는 이곳에서 믿었던 자들을 떠나보내야 했고, 믿고 있는 자들을 황제의 손아귀에서 지켜 내었다.
그들의 심복 중에 황제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 최후의 최후까지 충복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들의 옆에 있었을 이들이었다.
그런 황제의 사람이 가면을 벗었다는 것은 그들의 쓰임이 여기까지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죽을 테니까.
“우리는 끝까지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 주지 못하겠구나.”
“살아서 돌아갈 테니까요.”
일리오르와 일레온이 동시에 칼을 쥐었다. 번뜩이는 눈빛에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타올랐다.
“후우…….”
긴장감이 섞인 일리오르의 숨이 새어 나올 때, 허공에서는 이미 마법사들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아악, 살려, 살려!!”
“대장로가 왔어, 대장로가……!”
흑마법사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화려한 룬어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흑마법사들은 어쩐지 공포에 질린 것처럼 방어를 하기 급급했다.
마법을 모르는 이들도 눈치챌 만큼, 이쪽의 마법사가 홀로 저 많은 흑마법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항복하겠습니다, 대장로님!”
[안 받아.]
“아아아악!!”
한 흑마법사가 항복을 입에 올렸다가 까맣게 타 먼지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대마법사는 일말의 자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쾅, 콰앙, 쿠구구궁.
하늘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마력을 담은 룬어들이 마치 새 떼처럼 날아다녔고 벼락처럼 땅 위의 마물들에게 내리쳤다.
흑마법사들이 이쪽을 공격해 시선을 끌려고 하면 바로 투명한 방어막이 생겨나 인간들을 보호했다.
이쪽을 공격한 흑마법사가 커다란 마력으로 이루어진 푸른 창을 맞고 추락했다.
“……마법사들의 싸움이야.”
누군가가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저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닌 마법사들의 싸움이었다.
모두가 하늘에서 벌어지는 신비롭고도 치열한 전쟁을 바라보고 있을 때, 냉철하게 상황을 살피는 자는 이곳에서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1황자는 어디 있지?”
에단 암브로시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훑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신체가 기묘해 보이는 마물들은 모두 개발된 실험체들이었다.
저것들을 조종하는 자는 분명 1황자, 카제르 드 크롬벨이다.
“저 안쪽에서 안전하게 숨어 있을 것입니다. 저쪽도 흑마법사가 확실히 밀리고 있다는 걸 보고 있을 테니 쉽게 나오려 하지 않겠죠.”
“……쯧.”
제이드의 보고에 에단은 혀를 차며 칼을 뽑아 들었다.
“암브로시아는 길을 뚫는다.”
“예!”
주군의 명에 암브로시아 기사단은 일제히 발검하며 선두에 섰다.
“1황자에게 향하는 길을 뚫어라.”
“주군이 걷는 길에 마물의 침방울 하나라도 튀면 니들이 죽는다.”
“주군의 걸음이 잠시라도 멈춰선 안 된다!”
에단의 손짓에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일제히 앞으로 뛰어들었다.
하늘에서는 마법사들이, 그리고 땅에서는 인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저 쓸모없는 것들……. 올리븐은 어디 가고 저런 잔챙이들만 남았단 말이야.”
1황자 카제르는 아득바득 이를 갈며 저 멀리서 번쩍이는 흑마법사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으로 이쪽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상대편 마법사의 손짓 한 번에 흑마법사들이 후두둑 아래로 추락했다.
올리븐에게 힘을 받은 카제르는 희미하게나마 저 마법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귀찮은 날벌레들을 쳐 내듯 적은 힘을 쓰는데도 흑마법사들이 손도 쓰지 못하고 죽어 갔다.
“저런 자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올리븐!”
카제르는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굴렀다.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입에서는 씁쓸한 피 맛이 돌았다.
올리븐은 결국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흑마법사들 중 가장 정예라는 자들을 이끌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저자들에게 당한 건 아니겠지?”
“진정하시지요, 어차피 전하의 손에 죽을 자들입니다.”
“맞습니다. 저 흑마법사들이야 말 그대로 잔챙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전하의 힘에 비하면 말입니다.”
카제르의 옆에서 알톤 형제가 나란히 달콤한 말로 그를 진정시켰다.
“올리븐 님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전하의 힘은 일반적인 흑마법사들과 다르다고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암브로시아 공작에게 가장 치명적인 힘이라고 했습니다. 암브로시아 공작만 없다면 저자들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 겁니다.”
“전하께서는 그런 저자들을 한입에 꿀꺽 삼키면 될 일입니다.”
그동안 카제르의 비위를 맞춰 왔던 파웰과 파이튼은 아주 능숙하게 그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 주었다.
그 덕에 희미하게 떠오른 불안을 진정시킨 카제르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래, 암브로시아. 에단 암브로시아만 죽이면 돼. 암브로시아만.”
살기로 달아오른 눈이 바쁘게 에단 암브로시아를 찾았다.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멍청한 마물들이 일으키는 흙먼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것들……!”
카제르는 욕설을 뱉으며 서서히 몸에서 힘을 일으켰다.
불쾌하고도 꿉꿉한, 그러면서도 파괴적인 힘이 검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카제르의 전신을 휘감았다.
“…….”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파웰과 파이튼은 조용히 몸을 뒤로 물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암브로시아를 죽이는 것에 카제르가 정신이 팔린 틈에 현장에서 벗어나야 했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마물들이 일으킨 흙먼지를 정리하는 카제르를 뒤로하고 파웰은 조용히 영주 성을 향해 신호했다.
“……아이들에게서 신호가 왔군요.”
알톤의 영주 필립은 영주 성 꼭대기에서 반짝거리는 아들의 신호를 보고 뒤를 돌아보았다.
크롬벨 제국의 의복이 아닌 신관복을 입고 있는 남자 셋이 필립과 눈을 마주했다.
“이제 여기서 감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정말 크롬벨의 황자가 사특한 힘을 쓰는 것을 기록해도 된단 말인가.”
“예.”
필립 알톤은 고개를 끄덕이며 친히 자리를 양보했다.
전장이 훤히 보이는 명당 중 명당이었다.
“그대는 변절자가 되어 황제에게 처단당할 걸세.”
“반역자가 될지 공신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요.”
“알톤 영주. 대대로 황실에 충성을 바친 그대가 이리 구는 것은, 지금의 황제는 따를 가치가 없다는 뜻인가?”
“블라이트 제국에서 관심을 보일 만큼 그리 대단한 충심이 아닐 뿐입니다.”
필립 알톤은 단호한 목소리로 블라이트 제국의 재상의 말을 끊어 내었다.
“신을 수호하는 블라이트 제국이 저 사악한 흑마법사들을 앞에 두고 크롬벨 제국의 황실에 더 관심을 표하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우리는 언제나 신의 뜻에 반하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애를 쓸 뿐이네. 다만 그자가 하필 크롬벨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자라, 내 마음이 다 아프군.”
블라이트 제국의 황제에게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다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매끄러웠다.
그는 천천히 필립을 스쳐 지나가 그가 안내한 자리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왜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지경이군.”
힐끔 알톤 영주의 얼굴을 살피자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묵직한 표정을 하고선 조용히 서 있었다.
드디어 블라이트의 오랜 염원이던 크롬벨 황실의 약점을 잡는 순간이었는데, 왜 다 차려진 만찬에 포크 하나만 얹는 느낌인 건지.
“……쯧. 영상 수정구를 준비해라. 최대한 많이, 최대한 긴 것으로.”
“예, 백작님.”
그는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찝찝한 느낌을 애써 털어 냈다.
블라이트 제국의 신성한 뜻에 따라, 오늘 이후로 카제르 드 크롬벨은 대륙에 둘도 없을 악마가 되어 신의 이름으로 처단당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