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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68화 (168/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68화

블라이트 제국의 백작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며 혀를 찼다.

신의 뜻을 배반한 자들과 그들에 의해 실험된 마물의 모습이나, 고귀한 황실의 혈통으로 삿된 힘을 뿜어내는 황자나.

“이단이로구나.”

백작은 비틀린 입매를 그대로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크롬벨 황실이 신실하지 못하니 이단의 자식이 태어나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백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크롬벨의 백성들도 이 영상을 본다면 크롬벨의 이름 아래에서 생을 연명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겁니다.”

백작의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 광경은 신의 이름 아래에서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은 명분이 되겠어.”

백작은 씩 웃으며 팔짱을 낀 채 크롬벨 제국의 1황자 카제르를 보았다.

악마와 손을 잡았으면서 감히 신성 제국을 끌어들여 황위에 앉아 보려던 멍청한 놈.

잘만 이용하면 가지고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차고 넘치는 명분을 줄 줄이야.

‘혀에 꿀만 발라 놓으면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줄도 모르는 한심한 작자가 1황자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백작은 이쪽을 바라보는 알톤의 영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똑같이 타국을 끌어들였지만 알톤의 영주가 크롬벨의 황자보다 더 제국을 위한다고 봐도 좋았다.

저딴 황자가 황위에 앉는다면 지금 블라이트에 명분을 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그런 백작의 시선을 느낀 필립 알톤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대, 꽤 탐이 나는 인재야.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알고 있는 게 좋겠네. 크롬벨의 1황자가 멍청하다고는 하나, 의심이 많은 자야. 그런 자의 손아귀에 완전히 떨어진 이 영지를 잘 지켜 내지 않았나.”

“…….”

“귀화를 원한다면 내 권한으로 처리해 줄 수 있네만.”

백작의 권유에 필립은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백작께 무엇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오, 말해 보게나.”

“백작께서는 이미 세례를 받은 신관으로 신성력이 대주교에 비할 만하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필립의 물음에 백작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내게 금칠을 해 주려 묻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대의 자식 중 아픈 이가 있나?”

“저곳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나서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

백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 꽤 유쾌해 보이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비록 크롬벨 제국민이라고는 하지만, 신의 이름 아래에선 다 같은 신의 자식들이 아닙니까.”

“그대가 1황자의 비위를 어떻게 맞출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으니 거기까지 하지.”

“…….”

“영 못 쓰겠군. 좀 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방금 전까지 필립에게 귀화를 권유하던 백작은 흥미를 잃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피가 강이 되어 흐를수록 블라이트의 명분은 더더욱 공고해진다.

그것을 알고 있던 필립은 결국은 에단 암브로시아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작게 웃었다.

‘블라이트의 제국에서 쏟아지는 빈민들은 해결할 생각도 의지도 없는 자들이니. 나불대는 소리야 똑같겠지.’

필립은 에단 암브로시아의 말을 떠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암브로시아의 기사단이 그 누구보다 먼저 더 맹렬한 기세로 파도처럼 쏟아지는 마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마물들이 쓰러졌고, 에단 암브로시아는 그 길을 걸었다.

그렇게 암브로시아 공작은 1황자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손에 쥐어진 칼날의 끝이 크롬벨의 수치를 향했다.

“노골적으로 1황자에게 칼을 겨누는군요.”

“아직 크롬벨 황제가 1황자를 폐하지 않았으니 그는 여전히 제국의 황자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아들을 진정 베어 버릴 생각인가?”

블라이트 제국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황자에게 칼을 겨누는 것은 황실에게 칼을 겨누는 것.

감히 반역죄로 다스릴 수도 있는 행위였다.

크롬벨의 황제는 1황자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모함이라고, 협박을 받고 있을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황제에게 아직 1황자는 죄인이 아닌 황족이라는 뜻이었다.

“……크롬벨 황제는 과연 저자를 반역으로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공신으로 여길 것인가 궁금해지는구나.”

블라이트의 백작은 크롬벨 제국의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크롬벨 제국의 공신이자 황실의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손에 쥐고서도 얌전한 고양이처럼 황제의 명령에 충실하다고 하였지.

참으로 쓰기 좋은 종이 아니냐며 블라이트 제국의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부러움을 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백작이 직접 본 에단 암브로시아는 절대 블라이트 황제가 부러워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내가 황제였다면 반역이라 여길 것이다. 저건 황실에 충실한 종의 눈이 아니야.”

백작이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웃음기 섞인 필립 알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는 크롬벨 제국의 충신이니까요.”

뒤를 돌아보자 필립은 저 멀리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의 시선 끝에 1황자의 공격을 일검에 흘려보내는 에단 암브로시아가 있었다.

“저분께서는 크롬벨 제국에 충실하십니다.”

“황실이 아니라 제국?”

“예.”

자부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필립 알톤, 그대는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자야.’

필립은 다시 한번 에단이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그의 자부심은 바로 그곳에서 비롯되었다.

* * *

카제르 드 크롬벨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막대한 힘의 흐름을 느끼며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검은 힘을 주먹에 두른 채 에단 암브로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하하하! 에단 암브로시아!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예, 진짜 몰랐습니다. 1황자 전하.”

에단은 그런 1황자의 공격을 부드럽게 검으로 받아 흘려 내었다.

까아아앙, 하고 예리한 칼날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다.

평범한 칼이라면 카제르의 힘에 의해 부러졌을 것이나, 에단의 칼은 대대로 공작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암브로시아의 산물이었다.

암브로시아의 힘도 받아 낼 수 있는 칼이었으니, 그것에서 파생된 카제르의 힘이야 당연히 받아넘길 수 있었다.

“과연, 순순히 당해 주지 않는다는 건가!”

카제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알톤에서 힘을 얻은 이후로 그의 일격에 쓰러지지 않는 마물이 없었다.

마물의 숲에서 가장 강하다는 마물도, 흑마법 실험을 통해 힘을 극대화했다는 마물도 모두 그가 검을 휘두르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네놈이 순순히 죽어나면 그것 또한 허무했겠지.”

카제르는 기분 나쁜 웃음을 실실 흘리며 에단을 응시했다.

마치 더러운 것이 닿았다는 듯 칼날을 보며 미간을 좁히는 덤덤한 얼굴을 보니 오랜만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내가 그 모욕을 당한 후로 네놈의 얼굴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어!!”

“저도 차마 잊을 수 없는 광경이긴 하였습니다.”

에단의 시선이 천천히 카제르의 바짓가랑이를 향했다.

그 순간 이곳은 카제르가 바지에 실례를 범했던, 그 모욕적이었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감히 나를 또 모욕하려고 드는구나!”

분명 그때와는 달랐다. 저 괴물 같은 에단 암브로시아의 힘보다 더 압도적인 힘을 손에 넣은 지금,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카제르는 에단의 저 잘난 얼굴을 뭉개 주지 않는다면 이 모욕감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는 심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을 모아 달려들었다.

“죽어라!”

“……쯧.”

에단이 작게 혀를 차며 상체를 가볍게 기울여 카제르의 공격을 피했다.

“힘은 얻는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다룰 줄 아는 것은 둘째 치고…….”

그는 육중해 보이는 카제르의 몸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불어 있었다.

“일단 이리 몸을 써서 달려드실 거라면 운동을 좀 해서 몸을 날렵하게 만들어야…….”

에단은 다시 한번 흥분해 달려드는 카제르를 피하며 발목에 턱 하고 발을 걸었다.

“아악!”

카제르는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균형을 잡아 보려 했지만 결국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그게 어려우시다면 힘을 좀 더 다른 형태로 쓰셔야 상대할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네놈, 네놈이……!”

“제가 그때 1황자 전하의 목을 손 하나 쓰지 않고 조르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마치 가르침이라도 주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카제르의 얼굴이 단숨에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마치 그 힘을 얻고서도 겨우 이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느냐 비웃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비웃고 있는 것은 맞았지만.

“이번 황명은 쉽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1황자 전하께서 이리 협조를 잘해 주시니 말입니다.”

“후회하게 해 주마.”

카제르는 분노로 떨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눈동자의 혈관이 터져 빨갛게 물든 눈은 거의 악귀처럼 보였다.

수치와 분노로 거세게 뛰는 심장이 거대한 힘을 뿜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몸이 단숨에 검게 일렁이는 알 수 없는 마력에 휘감겼다.

“……과연.”

에단은 자신의 손에서 아주 미약하게 진동하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카제르에게서 힘이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에단의 내면에 있던 암브로시아의 힘이 고개를 든 것이다.

암브로시아의 힘이 저와 비슷한 힘을 만나 요동쳤다.

“저주받은 힘을 그 몸에 담았군.”

올리븐은 사라와 함께 암브로시아의 힘을 연구했던 자였다. 카제르에게 저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은 분명 올리븐의 소행이 분명했다.

다만 어떻게 카제르가 암브로시아의 힘을 몸에 담고 사용할 수 있었는지 에단은 알 수 없었다.

“저만 빼고 축제를 시작한 건가요?”

그때 하늘에서 흑마법사들을 얼추 다 처리한 사라가 가뿐한 몸짓으로 떨어져 내렸다.

땅에 발을 디딘 그녀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에단의 반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럴 때 안 불러 주시면 섭섭해요.”

“그 차림을 하고 있을 때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요? 보아하니…… 다들 바빠 보이는데.”

사라는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암브로시아 기사단을 포함한 다른 병사들과 귀족들은 마물들을 상대하기 급급했다.

중간중간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자들은 있었지만, 오고 가는 대화를 듣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알톤의 장벽을 가르고 홀로 흑마법사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처리한 것이 사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 목소리는…… 사라 밀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카제르를 제외하곤 말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1황자 전하. 전하께서 원수를 갚을 상대는 공작님 하나뿐이 아닌데, 저를 잊으시다니 섭섭한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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