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0화 (170/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0화

반지를 벗어 던지자 그동안 억누르고 억눌러 왔던 암브로시아의 힘이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해방감에 몸부림쳤다.

저 멀리서 힘을 분출하는 카제르의 기운에 맞추어 기세를 키우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에단에게서 나온 검은 안개가 다른 이들을 덮치려던 카제르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허억!”

카제르의 공격에 방어 태세를 갖추던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위험합니다, 주군!”

“직접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이 에단을 만류하는 와중에도 마물들은 끝없이 달려들었다.

앞서서 길을 뚫으며 해치고 들어온 탓에 기사단은 이미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아직 다른 귀족들의 병사들은 에단이 힘을 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대들은 다른 병사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해.”

“하지만 주군, 그 힘은……!”

“이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서두르도록 해. 이곳에서 살아나갈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주군의 명에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망설인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그사이 그들은 재빠르게 사라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녀가 에단의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기사단은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따르겠습니다.”

제이드를 선두로 한 기사단이 일제히 뒤로 돌아 퇴로를 뚫었다.

“아하하하!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꼴이라니! 우습구나!”

그 뒷모습을 보며 카제르가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비틀린 입매 사이로 모욕적인 말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주군을 버리고 도망질할 정도로 내 힘이 두려운가?”

카제르는 실실 웃으며 끓어오르는 힘에 전율했다.

울컥울컥하고 손바닥에 끈적하게 고인 힘은 카제르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이 힘만 있으면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암브로시아 기사단도 결국 하찮은 벌레에 불과하다!’

카제르에게서 쏘아진 힘은 마치 채찍처럼 암브로시아 기사단을 향해 날아갔다.

“적당히 하시지요, 전하!”

그때 에단이 힘을 쓰는 것을 걱정한 사라가 재빨리 끼어들어 카제르의 힘을 막아섰다.

그녀에게서 푸르른 마력이 마치 파도처럼 흘러나왔다.

“저를 너무 잊고 계신 것 아닌가요?”

“사라, 밀런!”

제 힘이 가볍게 막히자 카제르는 이를 악물며 힘을 더 쏟아 내었다.

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파괴적인 카제르의 힘과 부드러우면서 강대한 사라의 힘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사라의 푸른 마력이 그대로 카제르의 힘을 삼켜 버렸다.

“……!”

카제르는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는 사라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저 가벼운 손짓에 생겨난 푸른 마력이 이토록 쉽게 그의 힘을 막아 내다니. 직접 보았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어. 내 힘이 겨우 이 정도에서 그칠 리 없다!”

그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끓는 힘을 더 끌어 올렸다.

그러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더니 카제르의 상체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허억!”

여태껏 손쉽게 힘을 뿜어냈던 것과는 달리,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혈관을 타고 흐르는 끔찍한 무언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으으, 으아아악!”

카제르의 입술 사이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순 공기가 압축되는 느낌과 함께 그의 몸에서부터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단과 사라는 동시에 직감했다.

카제르 안에서 조금씩 부피를 키우던 흑마법의 힘이 점차 그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비키세요, 사라.”

“그렇게는 못 해요, 공작님.”

에단이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사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곱게 협조하지 않겠노라, 말했을 텐데요.”

“저는 그저 공작님을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하는 겁니까?”

에단의 말에 사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으나,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시리게 얼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에단은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에단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부드럽게 간질이며 스쳐 가 이쪽을 공격하려는 카제르의 힘만을 매섭게 때릴 뿐이었다.

그 다정한 힘이 어느 때보다 더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나와 클로드의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대는.”

“……!”

“그랬더라면 이런 두려움은 몰랐을 겁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로브 자락 안에 숨겨진 사라의 뺨을 쓸었다.

사라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손바닥 사이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게서 비롯된 힘 때문에 당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겁니다.”

“……공작님.”

사라는 목구멍에서 억눌린 신음처럼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살기를 보내는 카제르에게 닿아 있었다.

“으아아아악!!!”

카제르는 이미 제 힘의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그의 얼굴은 마치 괴수처럼 징그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검은 핏줄이 불거져 있었고, 몇 군데는 그것이 터져 흉한 진물이 꺼멓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머리처럼 꾸물거리다가 이내 다시 카제르의 몸을 파고들었다.

주변의 식물이 빠르게 시들었다.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은 쩍쩍 갈라지며 까만 잿더미처럼 변하였다.

“…….”

과연 압도적이었다.

생명의 빛을 잃어 가는 범위가 점차 늘어나자 에단은 그 모습을 눈에 똑바로 새겼다.

결국은 힘을 탐하다가 저런 괴물이 되어 죽는 것이 카제르의 최후였다.

사라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최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내가 1황자와 다를 게 뭐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엄연히 다른 힘이란 말이에요.”

안타깝다는 듯 에단을 위로하는 사라의 목소리는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사라의 다정함은 독이었다.

사라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모습이 아직도 에단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품에서 힘없이 늘어지던 여린 몸.

끊어질 듯 말 듯 하다가 이내 서서히 멎어 가던 숨.

눈과 입술 사이로 흐르던 검붉은 핏물까지.

‘내가 사라를 그렇게 만든 거야. 이 암브로시아의 저주가 결국 그녀를 죽게 하겠지.’

에단도 알고 있었다. 잠시나마 행복이라는 걸 느껴 보았던 그 시간이 사실 사라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것이라는 걸.

클로드가 예쁘게 웃고, 사라는 옆에서 같이 웃고, 그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희미한 평화를 느꼈던 그 시각.

사라는 그가 모르는 곳에서 몇 번이나 피를 토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암브로시아의 힘을 이용해서 하려고 하는 일이, 나와 클로드를 떠나는 일입니까?”

“…….”

그 물음에 사라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에단은 그의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속이 뒤집히고 머릿속이 빨갛게 물들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에단은 천천히 호흡을 끊어 내뱉었다.

“암브로시아의 힘을 이용해 죽고자 찾아온 거라면……, 나와 클로드에게 그리 다정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사라의 뺨을 어루만지던 에단의 손이 차갑게 떨어져 내렸다.

그러곤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가 폭주하고 있는 카제르에게 다가갔다.

사라가 암브로시아의 힘에 당하도록 두고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공작님, 위험……!”

“사라, 제발.”

그 와중에 그를 걱정하며 손을 다시 붙잡는 사라에게 에단은 괴로운 듯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을 긁으면서 나오는 듯 갈라져 있기까지 했다.

그 서늘하고도 무거운 목소리에 사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 그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저한테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잖아요.”

“관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저는 겨우 저것 따위에 죽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사라가 에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마법사의 맹약을 한 탓에 그녀가 암브로시아의 힘으로 잠깐 박혜연의 몸에 들어갔다 오게 될 뿐이라고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에단은 사라의 말에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그대는 클로드의 유모로 암브로시아의 사람이 되었으니, 가주로서 명하겠습니다. 절대, 나서지 마세요.”

“공작님……!”

답답하고 또 초조했다.

그녀에게도 에단과 클로드가 소중하다고, 이대로 허무하게 떠날 생각은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오해를 해 버린 에단이 맹약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해명을 믿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죄송해요.”

사라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수식을 그려 카제르의 발밑에 마법진을 생성했다.

순식간에 생성된 마법진은 곧 환한 빛과 함께 동그란 구체가 되어 폭주하고 있는 카제르를 삼켰다.

탕, 탕탕, 탕탕탕!

카제르의 몸에서 휘몰아치던 힘이 마법진을 때리는 소리가 강렬하게 퍼졌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저 강렬한 힘이 이곳 전체에 퍼져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을 것이다.

마법진 아래 갇혀 버려 갈 곳을 잃은 힘이 방향을 틀어 숙주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으아악, 아파, 아파, 아파!! 아악!!”

카제르는 어떻게든 힘을 통제해 보려 했으나 이미 봇물 터지듯이 뿜어져 나온 힘을 회수할 수 없었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마법진 안에서 울리기 시작하였다.

저 안에서 흑마법의 힘이 원하는 생명력을 줄 수 있는 건 카제르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양껏 취하고 나면 마법진 안에는 순수한 힘만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사라!”

에단이 이를 갈며 버럭 화를 내었다.

그가 사라가 하는 행동에 진심으로 분노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서지 말라 명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처리하게 해 주세요. 저대로 폭주해 버리면 정말 위험해요. 공작님에게는 치명적이라고요.”

“저 힘이 그대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바로 원하는 바예요.”

에단이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원망과 절망이 한데 섞인 눈이 사라를 바라보았다.

“기어코 내게서 벗어나겠다고……. 진정으로 그걸 원하는 겁니까?”

사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 한쪽 구석이 지끈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에단의 단단하고도 다정했던 눈동자가 무참히 흔들렸다.

서서히 그를 잠식해 가는 어둠이 질척한 집착을 품고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죄송해요.”

미움받을 짓을 했다. 하지만 에단에게 미움받기는 싫었다.

오해라고 해야 하는데.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깨어날 수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데.

그녀가 에단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암브로시아의 힘을 받아 내고 나면 그녀는 또 피를 토하며 쓰러질 테고, 이번에는 깨어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사라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사라는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제가 오늘 이렇게 하는 건 공작님과 클로드 님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라는 고개를 젓는 에단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로브를 거둬 냈다.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사라의 푸른 눈동자와 눈을 마주한 에단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거세게 두들기던 다정한 미소가 사라의 입가에 맺혀 있었다.

“믿게 해 드릴게요. 제가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걸요.”

“어떻, 게…….”

“지금 배경이랑 배경 음악이 영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사라가 두 팔을 뻗어 에단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두 사람의 몸이 확 하고 밀착되었다. 에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점점 다가오는 사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르륵, 사라의 눈이 감기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릿하게 보일 때.

“……!”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과 함께 사라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좋아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