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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1화 (171/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1화

“…….”

에단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맞닿았던 입술이 느릿하게 멀어지고, 붉게 물든 사라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금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라는 조금 웃었다.

“죄송해요. 당황하셨죠?”

“……읏.”

에단은 얼굴을 화악 붉히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토록 무방비한 에단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먼저 에단에게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에단을 보내면 오해를 영영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쨌든 그녀는 박혜연의 몸으로 한 번은 돌아가야 했으니까.

카제르의 힘과 에단의 힘이 충돌하는 이때가 가장 적기였다.

“그렇지만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에요. 사실 저, 공작님을 짝사랑한 지 꽤 됐거든요.”

“사라, 나는…….”

“솔직히 공작님도 어느 정도 예상하셨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 끔찍한 절망과 음습한 집착 사이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는데.

지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대로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녹아 없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

에단이 그렇게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못할 때, 사라는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던 마물들이 이내 이쪽을 향해 슬슬 살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 이 중요한 순간에.”

겨우 용기를 내서 마음을 전했는데, 주변은 로맨틱은커녕 생과 사가 오고 가는 전쟁터였다.

타이밍과 장소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라는 혀를 차며 마력을 일으킨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찰나의 시간을 잡아 둘지어다.]”

시동어를 외움과 동시에 그녀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순식간에 공간을 집어삼켰다.

마물들과 일반 병사들 그리고 알톤 영주 성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블라이트 제국 사람들까지 전부 마법진에 가려졌다.

마치 이 공간에 에단과 사라 둘만 남은 것처럼.

“이건…….”

“애들 장난 같은 이런 일은 이제 슬슬 끝낼까요? 적당히 손봐 줘야 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

사라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카제르가 완전히 타락한 흑마법사로 거듭났다는 걸 모두의 앞에서 보여 줄 필요성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카제르 드 크롬벨은 죽는다.

하지만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그는 카제르를 어떻게 해서든 살리려고 들 것이다.

에단과 사라는 황제에게 어떠한 명분도 줄 생각이 없었다.

“이젠 제가 다 처리해 버려도 되겠죠?”

사라의 말에 에단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떨어진 허락에 사라는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둘만의 얘기를 좀 해요. 아주 잠시면 되니까.”

“……예.”

에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까지 흉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공간을 차단한 마법진 안에서, 이제 두 사람은 오직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끄으으.”

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카제르 드 크롬벨도 함께였지만.

마지막이 이제 얼마 안 남은 듯 카제르는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해서 에단과 사라는 그의 존재를 가볍게 무시하기로 하였다.

“제 고백에 대한 대답은 나중에 돌아와서 들을게요.”

“……!”

“공작님 대답이 듣고 싶어서라도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동그랗게 떠지는 에단의 눈을 바라보며 사라는 눈을 휘며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제가 공작님의 대답도 듣지 못하고 영영 떠날 사람처럼 보이세요? 절대 아닐걸요.”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에단은 억눌린 목소리로 신음했다.

이제야 조금은 돌아오겠다고 하는 사라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사라는 분명 궁금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사라.”

“네에.”

사라는 나긋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대답했다.

에단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입매가 무방비하게 허물어졌다. 그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하지만 점차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은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내 머릿속에 얼마나 저열한 협박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는지 당신은 모를 테죠.”

“안 하셨잖아요.”

“이젠 하라고 해도 못 합니다.”

미움받을까 봐. 방금 저 고운 입술로 흘러나왔던 그 애정을 잃을까 봐.

잃을 게 없을 때는 자포자기하며 그녀에게 족쇄를 채워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그런 에단에게 도리어 사슬을 걸어 버렸다.

이제 손에 쥔 것이 생겨 버린 것이다.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것을 쥐여 주었다.

그러니 결국 이번에도 에단은 사라에게 져 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당신을 놓아주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겁니다.”

“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사라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에단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그러자 에단이 적나라하게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감미로운 얼굴이었다.

심장이 눈치도 없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고백할 때도 떨리지 않았던 심장이 에단의 얼굴을 보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 다시 한 번만 입 맞추고 싶다.

사라는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을 덮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대에게 언제 대답을 들려주면 됩니까?”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던 사라는 에단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사실 정확히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점점 깨어나는 시간이 늘어나서…….”

처음에는 일주일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다음엔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사라는 그때보다 더 강한 암브로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아마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최대한 빨리 깨어날 수 있게 노력할게요.”

“그게 노력으로 되는 문제였습니까?”

“아마도요. 지난 두 번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조금 있거든요.”

“…….”

사라의 대답에도 에단은 조금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는 노골적인 집착을 드러내지 못했다.

사라의 손을 잡고 제 뺨에 가져다 대며 온기를 느끼려 할 뿐이었다

“사라가 보고 싶어지면 어떡하죠.”

에단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그 나직한 목소리에 이번엔 사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늘 함께했던 아침 시간이, 클로드와의 놀이 시간이.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아지면, 그때는 어떡합니까.”

“제가 없어도 함께 아침을 먹고, 놀이 시간을 가지고 서로 대화도 많이 하세요.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제가 갈게요.”

사라는 에단의 뺨에 닿은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그의 뺨을 살살 쓸며 말을 이었다.

“아, 제가 없는 일상에 너무 익숙해지진 말고요. 질투 나니까.”

“익숙해질 리가.”

에단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사라 또한 마주 웃었다.

그때 콰앙, 하고 사라의 마법진이 크게 흔들렸다.

“…….”

“…….”

두 사람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카제르에게선 신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숙주를 완전히 잡아먹어 버린 힘이 이제 사라의 구속을 뚫고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반지, 다시 껴 주세요.”

사라는 아까 에단이 벗어 던지고 간 반지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가 준 반지를 그렇게 매정하게 빼 버리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네요.”

“……명심하겠습니다.”

에단은 사라에게 받은 반지를 원래 있었던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익숙한 평안함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시선이 아주 오랫동안 반지에 닿았다.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반지가 저라고 생각하세요. 아셨죠?”

에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사라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반지부터 체크하리라 결심하며 그녀는 이제 에단의 어깨 너머 일렁이는 구체를 바라보았다.

“……죽었군.”

카제르의 숨은 이제 완전히 멎어 있었다.

눈을 부릅 뜬 채 죽은 그는 끝까지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고, 이미 예정된 죽음이기도 했다.

이 힘을 축복이라 생각했던 역대 암브로시아 공작들 또한 저렇게 죽었다.

쾅,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사라의 봉인 마법구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요동쳤다.

“이제 저 안에 남아 있는 건 순수한 힘뿐이에요. 느껴지는 것만 해도 올리븐이 얼마나 힘을 쏟아부었는지 알 것 같네요.”

“……사라.”

에단은 이제 정말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라의 손을 잡아챘다.

“괜찮아요.”

그런 에단의 손을 사라는 부드럽게 잡아 밀어냈다.

허무하게 떨어지는 에단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그를 보며 사라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다음에는 사랑한다고 말할 거예요.”

“…….”

“그러니 기다려 주세요.”

반칙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미칠 것 같으면서도, 사라의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허물어지고야 만다.

분명 먼저 마음을 고백한 것도 사라고,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사라였다.

하지만 결국 기다리는 것은 에단이었고, 애가 닳는 것도 에단이었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승부였고 에단은 사라의 앞에서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것이다.

“나도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

“지난번 황궁에서 사라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때의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라의 질문에 에단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신은 피를 너무 많이 토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었습니다.”

“아…….”

사라의 얼굴이 죄책감에 흐려졌다.

에단은 손을 들어 사라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직접 입을 맞춰서 기도를 막은 피를 빨아들이는 걸 반복했습니다.”

“……!”

사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며 살살 쓸어내리는 에단의 엄지손가락의 감촉이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번에도 또 피를 토할 테고……. 내게는 좋은 핑계가 생길 겁니다.”

에단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내려 그녀의 입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사라는 그의 시선이 닿는 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라 톡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을까. 낮게 가라앉은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사라의 심장을 그대로 직격했다.

“당신을 욕심껏 탐할 수 있는, 그런 저열한 핑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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