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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2화 (172/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2화

사라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에단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단의 입꼬리가 수려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곤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던 손을 내렸다.

“아.”

사라의 입술 사이로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나와 버린 소리에 사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방금 전까지 특유의 당당한 목소리로 고백하던 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은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야 에단은 사실 사라에게도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서 그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럴게요.”

사라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그제야 다른 손으로 꽉 잡고 있던 사라의 손을 놓아줄 수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다녀올게요.”

배웅해 주는 에단에게 인사하는 사라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에단은 그녀가 돌아올 것을 믿었고, 사라는 그 믿음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야 겨우 두 사람의 뜻이 통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우.”

사라는 긴장감을 떨치려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카제르의 힘을 봉인해 둔 구체로 다가갔다.

카제르 드 크롬벨, 한때 제국에서 가장 고귀했을 그는 이제 참담한 꼴로 그 안에서 죽어 있었다.

생기라곤 전부 다 힘에 빼앗겨 풍채 좋던 몸은 빼빼 말라 버린 채였다.

“붕대 푼 미라 같네.”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았더라면 이토록 비참하게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어미인 황후가 죽고 난 뒤부터 카제르의 인생은 달라졌지.’

황제도 1황자도 황후의 죽음 이후로 기묘하게 성격이 뒤틀려 버렸다.

이쯤 되니 사라조차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여자였기에 황제도 자식도 그녀의 죽음만으로 이토록 망가질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는데.”

이번에 박혜연의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알아보자고 생각하며 사라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저 안에서 폭발할 듯 꿈틀거리는 힘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후우.”

그러다 이내 숨을 참으며 자신의 마력으로 봉인했던 것을 서서히 거뒀다.

그와 동시에 두두두두, 하고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울었다.

사라의 손바닥이 닿았던 곳부터 시작해 암브로시아의 힘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윽.”

한 번에 통제하기에는 너무나 큰 힘이었다.

제아무리 그녀라고 할지라도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올리븐……, 내 연구용 마력구를 전부 가져다 쓴 거니?”

이를 갈며 중얼거리자 그녀의 품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던 올리븐의 영혼석이 부르르 떨며 울었다.

정답이었다.

“하.”

사라는 암브로시아의 힘을 담은 마력구를 연구실에 보관한 안일한 자신을 탓하기로 했다.

이미 영혼석에 빨려 들어가 버린 못난 놈을 어떻게 하겠는가.

차라리 내 탓을 하는 게 속은 편하겠지.

“[내게로 오라.]”

사라가 시동어를 외우자 일반 병사들과 마물들에게서 그녀와 에단을 가려 주었던 마법진이 단숨에 거둬졌다.

그러곤 이번에는 사라와 휘몰아치는 힘을 한데 가두기 시작했다.

점차 마법진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사라.”

“이따가 봐요.”

사라는 마지막으로 에단에게 한번 웃어 주고는 이내 완벽하게 공간을 차단했다.

에단의 꽉 쥐어진 주먹 틈 사이로 선홍빛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이 그녀의 눈에 밟혔다.

아마 최선을 다해 참고 있는 것이리라.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빨리 돌아와야지.”

사라는 다시 한번 다짐을 한 뒤 천천히 카제르의 힘을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에단이 이쪽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작업 속도에 더 탄력이 붙었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양껏, 암브로시아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손끝에서 푸르른 마력이 마치 실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곤 미쳐 날뛰는 카제르의 힘을 누에가 실을 뿜어 고치로 만드는 것처럼 감쌌다.

‘암브로시아의 힘과 흑마법을 분리해야 해. 최대한 순수한 암브로시아의 힘만을 정화하고 흑마법은…….’

그녀는 품 안에서 파르르 떨며 구슬프게 울고 있는 올리븐의 영혼석을 꺼냈다.

복잡한 마법 수식이 떠오르다가 사라지고 다시 한번 떠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얌전히 있으렴. 한 번쯤은 내게 도움이 되어 줘야 하지 않겠니.”

상냥하게 흘러나오는 사라의 목소리에 올리븐의 영혼석은 그제야 잠잠해졌다.

“흑마법을 익힌 제자의 덕 좀 보자꾸나.”

흑마법. 그것은 흐름에 거스르는 힘이다.

이 세상의 흐름이라고 하면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역사와 시간, 생명과 죽음, 자연과 생태계.

그중, 흑마법에서 대표적으로 다루는 것은 생명과 죽음이었다.

공교롭게도 흑마법은 치유 마법을 극도로 연구하던 마법사들에게서 시작된 산물이었다.

이미 죽음을 맞이한 자의 숨을 다시 한 번만 더 이어 가고자 했던 이들의 역사였다.

그래서 그들이 시선을 돌린 것이 바로 ‘시간’이었다.

이번에 그것을 이용해 보고자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선에서 박혜연의 몸으로 뭘 했는지 알아야겠어.”

목표를 정한 사라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암브로시아의 힘과 분리한 흑마법은 올리븐의 영혼석으로 흘려보내고 남은 것들은 전부 그녀의 몸으로 받아들였다.

통제를 잃은 힘이 몸으로 흘러들어 오며 익숙한 통증을 유발했다.

“……우욱!”

커헉, 하고 사라는 검붉은 핏물을 울컥하고 토해 냈다.

미처 삼키지 못한 것들이 입술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조금 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이야, 아직.”

어느새 핏발이 선 눈이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한 암브로시아의 힘을 노려보았다.

저것들을 전부 담아내 정화하기 전까지, 아직은 쓰러질 수 없었다.

* * *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였다.

마물의 숲에서 새들이 떼거리로 일어나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새 떼들로 인해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끼에에에엑!”

병사들과 기사들의 칼날을 상대하던 마물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토해 냈다.

그러곤 일제히 뒤를 돌아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어, 어?”

“마물들이 갑자기 왜?”

마물들을 상대하던 인간들이 얼빠진 목소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이 갑자기 끝나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병사들을 지위하던 귀족들조차 알 수가 없어 멍하니 마물들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저기, 마법진이 사라졌어!”

그때 누군가가 어떠한 변화를 감지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모두가 조금 전 마법사가 그들의 시야를 막았던 마법진이 자리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까 1황자가 사악한 힘을 폭발시키며 날뛰던 곳이었다.

그를 막으려 했던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과 마법사가 그 마법진 안에 1황자와 한데 갇혀 있던 곳이기도 했다.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그 마법진을 뚫으려 부단히 애썼지만 철벽처럼 꿈쩍도 안 했던 것이 지금 이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암브로시아 공작님이 살아 계신다!”

모두의 시선이 홀로 우뚝 선 에단 암브로시아를 향했다.

그는 주변이 까맣게 죽어 버린 땅 위에 홀로 서 있었는데, 누군가를 품에 안은 채였다.

“주군!”

누구보다 마법진 가까이에 있었던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사색이 된 채 달려갔다.

아까부터 진동하던 땅의 기운이 불안하게 퍼지고 있던 참이었다.

모두가 저 마법진 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으십니까? 무사하신 겁니까!”

제이드가 가장 먼저 달려와 에단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곤 그의 어깨 너머 처참한 꼴로 죽어 있는 카제르를 눈에 담았다.

제이드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단과 사라가 함께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상식 밖의 힘을 보여 주었던 1황자에게 두 사람이 당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그였다.

다행히 무사히 서 있는 주군을 보니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저렇게 죽어 있는 1황자를 보니 이제 곧 전쟁터로 바뀔 크롬벨 제국의 상황이 그려져 머리가 아팠지만.

“…….”

에단은 말없이 텅 빈 시선으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하였으나, 무언가가 뒤틀린 듯한 모습이었다.

주군의 그런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목격한 제이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군?”

그제야 그의 눈에 주군이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에단의 겉옷에 감싸져 있었는데, 겉옷 사이로 얼핏 보이는 옷자락이 눈에 익었다.

제이드가 손을 들어 눈을 비빈 다음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로브였다.

“설마 밀런 소백작님이십니까?”

에단에게 묻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에게선 살아 있는 자의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툭, 하고 팔 하나가 아래로 축 처졌다.

고운 피부에, 가느다랗고 길게 뻗은 손가락, 핏기는 하나도 없는…….

사라의 팔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에단은 품에 안고 있는 사라를 고쳐 안아 늘어진 그녀의 팔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렇게 완벽하게 그녀를 다시 품 안에 가두었다.

그러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제이드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굳어 버려 뒤를 따라오지 않는 제이드에게 에단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다.

“암브로시아로 돌아간다.”

에단은 암브로시아 기사단을 스쳐 지나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마다 그가 억누르고 있는 참담한 분노가 느껴졌다.

제이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에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목격하곤 이내 흠칫 몸을 떨었다.

“피가…….”

에단이 지나간 자리에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단의 것이 아니었다.

“밀런 소백작님…….”

사라. 사라 밀런의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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