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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3화 (173/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3화

* * *

대륙에 평화가 지속된 지도 백여 년이 넘어갔다.

피바람이 몰아치고 생과 사를 오가던 기억을 간직했던 자들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크롬벨 제국민들은 핏물로 가득한 역사 속에서 영웅과 로맨스를 찾았고, 하나의 동화로 만들어 소비했다.

그만큼 크롬벨 제국민들은 평화에 익숙했다.

하지만 최근에 그 평화가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크롬벨 제국 역사상 제국민들의 입이 이토록 바빴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햄크스, 자네도 보았는가?”

“물론 보았지! 행상인들이 그러는데 이곳으로 오는 모든 길목의 영지가 전부 암브로시아 공작님을 위해 성문을 개방했다고 하지 않아!”

“수도의 성문이 새벽에 열리는 것은 내 42년 인생 동안 처음일세. 허허, 참…….”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암브로시아 공작님이 아니신가. 그분이라면 황궁 문이라도 열 수 있지.”

서로 농담인 양 이야기를 나누는 제국민들의 얼굴에는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흑마법사들을 물리치기 위해 암브로시아 공작을 포함해 제국의 두 황자가 직접 귀족들을 이끌고 출병했다.

하지만 알톤 영지의 소식이 들려오기도 전에 제국민들은 미친 듯이 말을 달려 수도로 향하는 암브로시아 공작의 행렬을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알톤 영지에서부터 수도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대.”

“세상에! 그게 가능한 일이야?”

“진짜라니까! 새벽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영지의 성문을 부수고서 통과했다는 얘기도 있어!”

“……부서질 만도 했네. 암브로시아 공작님이 열라면 열어야지.”

아주 늦은 밤 수도의 성문을 통과한 암브로시아 공작과 그의 기사단은 무성한 소문을 몰고 왔다.

제국민들은 이를 두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흑마법사를 상대한 암브로시아 기사단이 너무 시시해서 못 다 푼 힘을 여기서 푼 거라는 둥.

2황자와 3황자가 흑마법사들을 다 해치워서 암브로시아 기사단은 할 일이 없어 먼저 돌아왔다는 둥.

흑마법사에게 인질로 잡힌 1황자를 구해 급하게 돌아온 거라는 둥.

아주 많은 소문들이 끊임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만 단 한 가지, 알톤 영지로 향했던 이들이 패배했을 거라는 소리는 없었다.

“혹시……, 누가 죽은 것 아닐까?”

“어허! 큰일 날 소리 하지 말아! 크롬벨 제국의 병사들이 얼마나 용맹한데!”

“맞아, 대륙의 평화를 이끄는 우리 제국이 고작 흑마법사 따위에 당할 것 같아?”

혹시 모를 불길한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던 자들은 주변의 거센 반발에 입을 다물었다.

무의식적으로 크롬벨의 제국민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를 거부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충혈된 눈으로 미친 듯이 수도로 향했다는 암브로시아 기사단의 모습은 결국 제국민들이 외면하고자 했던 불안을 자극했다.

“암브로시아 공작님의 행렬이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가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대! 한참 동안 울음소리만 가득했다고 하지 뭐야.”

“그날 이후로 암브로시아의 사용인들 중 그 누구도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어.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상인들만 드나드는데,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고.”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 가문의 문을 닫겠다고 선언하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거 진짜인가?”

불안함을 감지한 제국민들이 수도에 있는 암브로시아 저택 주위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저택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슨 소식이 들리진 않을까 귀를 기울이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저택 전체를 감싸고 있는 끔찍한 침묵은 제국민들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그때쯤 슬슬 무언가를 목격한 자들의 증언이 하나둘씩 쏟아져 나왔다.

“내 친구의 여동생의 남자 친구의 아는 후배의 동료의 동생이 있는데, 이름은 듀이라는 아이야. 그 아이가 옛날에 암브로시아 공자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수도에서 가장 큰 술집인 베다의 요람선에서도 한 남자가 달큰하게 취한 얼굴로 저가 들은 것을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듀이, 그 친구가 그 뒤로 몰래 저택을 드나들면서 암브로시아 공자의 말동무를 하고 있었어!”

“뭐!?”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저택을 드나들었다는 이야기에 눈을 번뜩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크롬벨 제국의 황제조차 암브로시아의 저택 상황을 모를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암브로시아는 저택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였다.

알톤 영지로 향했던 황자 일행이 수도로 돌아오지도 않았으니 암브로시아에 대한 관심은 아주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 그래?! 그럼 그 친구가 이번에 암브로시아 저택으로 들어갔다가 왔단 말이야?”

“아, 그렇다니까! 마침 공자의 말 상대를 하고 있다가 자고 가라기에 영광스럽게도 공자님과 한 침대를 썼다고 해.”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도 평민과 귀족을 구분 없이 대한다고 하시더니, 그분의 아들인 공자도 같은 성품인가 보군.”

귀족과, 그것도 대귀족의 후계자와 일개 평민 소년이 한 침대를 썼다니.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크롬벨 수도에서 살아가는 제국민이라면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을 익히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암브로시아 공작의 수행원이 타고 있던 말이 지나가던 행인 아이를 칠 뻔하자 공작이 직접 몸을 날려 구해 냈다는 이야기.

암브로시아 저택 앞에서 공작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먼 곳에서부터 왔다는 노파의 손을 손수 잡아 주었다는 이야기.

황궁 행사 때 황제에게 빈민가의 구휼을 위한 자선 모금을 직접 청해 받아 내었다는 이야기 등등이 이 자리에서 오고 갔다.

“암브로시아 공작님이야말로 아주 존경할 만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니! 지금 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아닌데!”

듀이의 이야기를 하려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암브로시아 공작에 대한 찬양을 이어 가려다 이내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에게는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듀이가 마침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을 때를 목격했다고!”

“오오! 그게 정말인가?”

“그래! 다들 알고 있던 그날! 알톤 영지에서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 미친 듯이 밤낮을 달려 저택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날 밤! 듀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야!”

“어허, 어서 말을 좀 해 봐!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남자는 목이 탄다는 듯이 테이블 위를 훑어보다가 이내 커다란 맥주를 집어 꿀꺽꿀꺽 삼켰다.

차마 술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공작님이 오셨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이만 가 보라고 해서 자세한 상황은 못 봤다지만, 저택을 나서려고 할 때쯤에 암브로시아 공자께서 저택이 떠나가라 우셨다지 뭐야?”

“공자께서……? 설마 암브로시아 공작님이 크게 다치신 건가?!”

“말 끊지 말고 들어 봐! 듀이도 혹시 공작님이 다치신 건가 싶어서 몰래 몸을 숨기고 지켜봤는데…….”

“봤는데?”

“공작님께서 피투성이가 된 누군가를 품에 안고 계셨는데, 암브로시아 공자가 그 사람을 ‘유모’라고 부르며 목 놓아 울다가 이내 혼절까지 했다지 뭔가!”

“유모? 암브로시아 공자의 유모라면 그 여자 소백작 아닌가?”

“맞아! 밀런 백작가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졌다.

알톤 영지에서 흑마법을 상대하고 돌아온 공작의 품에 피투성이가 된 암브로시아 공자의 유모가 안겨 있었다?

이번 일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야 할 누군가의 등장에 소식을 전하던 남자에 대한 신뢰도는 밑도 끝도 없이 하락했다.

“쯧, 또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와서는……. 관심받고 싶으면 자네 집에나 가서 받든가!”

“아, 진짜라니까! 게다가 저택에서 마법사 로브를 쓴 두 사람이 막 달려오더니 그 피투성이인 사람에게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손에서는 환한 빛을 쏟아 냈는데 소용이 없다고 했대! 치유 마법을 쓴 거지!”

“그건 또 뭐야. 암브로시아 저택에 마법사가 있다는 소리인가? 마법사는 알톤 영지에 있을 텐데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까지 말해 줬는데도 모르는 건가? 클로드 암브로시아의 유모인 사라 밀런 소백작에게 마법사가 ‘스승님’이라고 불렀다지 않아! 답이 딱 나오지 않나?”

“……무슨 답.”

“사라 밀런 소백작이 바로 이번 알톤 영지로 향했다던 그 마법사인 거지!”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엄청난 사실을 알아낸 것처럼 가슴을 쫙 폈다.

그는 다들 놀라 기절할 거라고 생각하며 좌중을 살폈다.

“…….”

“…….”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그 마탑의 대마법사라는 그 마법사가, 지금 알톤에서 흑마법사에게 당해서, 암브로시아 공작님의 품에 안겨서 왔는데, 그게 공자의 유모이고 사라 밀런 소백작이고……. 그렇다는 건가?”

“그래!”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게.”

술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내 술맛이 떨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당황스러워하는 남자만 두고 전부 다 집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이봐, 어디가! 내 말이 맞다니까!”

“퉤퉤퉤, 재수가 없으려니까. 곧 알톤 영지에서 황자님들이 돌아오시면 입 간수나 해! 헛소문을 퍼트린 죄로 황실 경비단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진실들은 제국민들에게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그의 말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지만 역시나 이걸 믿는 제국민은 크롬벨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이 실로 진실이라는 걸 제국민이 깨달았을 때는 알톤 영지로 향했던 황자들이 돌아온 뒤였다.

[1황자 카제르 드 크롬벨이 바로 사악한 흑마법사였다!]

[알톤 영지의 죽음의 장벽은 1황자가 만든 것이었다!]

[마탑의 대장로인 마탑주는 완벽히 흑마법과 동화된 1황자를 물리쳤지만 큰 부상을 입어 결국 사망하였다.]

[알톤 영지에서 1황자의 손에 죽은 제국민이 흘린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황궁에 보고되어 밑으로 전해 내려온 말들을 묶어 전하는 소식지에서 연일 알톤 영지의 참사에 대해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은 귀족들에게서 그들의 사용인에게, 또 평민들에게까지 전해졌다.

“1황자님이 흑마법사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암브로시아 공작님이 급하게 저택으로 돌아온 이유가 마탑주가 죽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1황자님은 흑마법사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다고 했잖아.”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제국민들은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소식은 크롬벨에 사는 모든 제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블라이트 제국은 신의 이름으로 흑마법을 사용한 크롬벨 제국의 1황자 카제르 드 크롬벨의 신변을 요구한다. 그의 시체라도 신의 이름 앞에 정화하여 죄를 씻어야만 크롬벨 제국은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신국인 블라이트 제국의 공식적인 선언이 크롬벨 제국 황실에 전해진 것이다.

황제는 크게 분노하여 1황자는 절대 흑마법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블라이트 제국에서 보낸 증거물에 이내 태도를 바꾸었다.

[내 아들은 절대 내어 줄 수 없다. 신을 베어 버려서라도 지킬 것이다.]

바야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

크롬벨의 황제는 마탑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마탑은 이번 사태로 인해 대장로를 잃게 되어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러곤 흑마법을 옹호하는 크롬벨 제국에 보태 줄 힘은 없다며 선을 그었다.

이로써 마탑주의 죽음까지 확실해져 마탑의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크롬벨 제국은 이제 온 대륙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롬벨 황제가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려 했던 암브로시아 공작을 찾았을 때.

“암브……, 암브로시아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크롬벨 제국에서, 암브로시아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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