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4화 (174/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4화

* * *

익숙한 감각이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았던 몸이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의식이 아주 깊고 어두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헉!’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예전과 같은 풍경이 아니었다.

작은 방 안은 식물들로 가득했다.

아기자기한 가구들에는 다양한 패턴의 패브릭 담요나 쿠션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여행 갔을 때 부지런히 사 모았던 마그넷은 특히 아끼는 물건들만 보관해 놓은 철제 수납장에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미처 청소하지 못한 종이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나기 전 치워야지, 라고 생각하고 발로 툭툭 밀어 놓았던 것들이었다.

‘우리 집이야…….’

눈을 뜨니 박혜연이 살던 집에 와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투명한 영혼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 어디에도 박혜연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 갔지? 지난번에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녀는 부지런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박혜연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사용했던 것처럼, 노트북에는 전원이 켜져 있는 상태였다.

그 옆에 있는 핫초코가 담긴 머그잔에서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어. 박혜연의 몸이.’

어떻게 된 일일까.

사라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하지만 영혼 상태인 몸은 아무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사라 밀런의 몸으로 깨어 있을 때는 박혜연의 시간도 멈춰 있어야 해.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도 안 돼. 그런데 이 상황은…….’

마치 그녀가 사라 밀런의 몸으로 깨어나 있을 때 박혜연의 몸도 깨어나 있었던 것만 같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세계와 차원의 법칙은 그녀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안배해 놓았다.

첫 번째는 박혜연과 사라의 몸으로 번갈아 생을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평범한 삶과 안정적인 균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고.

세 번째는 마치 신처럼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며 너그러워지는 성정을 타고나는 것이다.

이 법칙은 절대적이었다. 마법 또한 그 흐름을 깰 수 없었고 그녀 또한 이를 의식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이 법칙이 깨질 거라고는 의심해 본 적도 없었다.

‘알아내야 해. 두 번은 없어. 이번 기회에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어.’

사라는 고개를 저으며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박혜연의 노트북. 분명 여기에 또 무언가가 적혀 있을 거야.’

지난번 그녀가 두 번째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을 때 보았던 노트북.

박혜연은 마력으로 글씨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것도 제국어로 말이다.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이 세상은 마력이 없는 세계였다. 그렇기에 박혜연의 몸은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마력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박혜연이 노트북으로 기록할 때 썼던 마력은 사라 밀런의 마력이었다.

‘만약 박혜연과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 생활했던 거라면 사라 밀런의 마력을 끌어오는 건 불가능해. 이쪽의 협조가 없더라면 절대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사라는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공백이 있던 시간.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시간선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했다.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것이었다.

‘일단 읽어 보자. 분명 그 뒤에 무언가가 더 쓰였을 거야.’

지난번에는 일기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사라가 암브로시아에 들어가 소설 ‘어둠의 꽃’을 바꿔 나갔던 것을 기록한 일기가.

하지만 거기서 의문이 들었던 것은 ‘소설’과 ‘미래’를 바꾸어서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지금 노트북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뭔가를 더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사라는 노트북 화면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 아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특히 올리븐.

올리븐 그 미친 자식 때문에 이곳에 또 오게 되었다. 황궁에서 감히 암브로시아 힘이 들어 있는 마력구를 터트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노트북에 쓰여 있는 것은 황궁에서 올리븐이 마력석을 터트려 쓰러진 직후의 일 같았다.

내가 두 번째로 이곳에 돌아왔을 때 원인이 되었던 일이었다.

‘역시……, 저건 내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쓴 게 분명해. 그럼 그때 눈을 뜬 박혜연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한 게, 그 몸으로 눈을 뜨기 위해 영혼이 들어간 거였나?’

황궁에서 사건이 터져 이곳으로 왔을 때, 박혜연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과 마주한 순간 사라는 마치 빨려 들어간다는 생각과 동시에 다시 사라 밀런의 몸에서 눈을 떴다.

하지만 만약 저 눈에 빨려 들어간 뒤 눈을 뜬 게 사라 밀런의 몸이 아닌 박혜연의 몸이라면?

그녀의 기억이 진실로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박혜연의 몸으로 움직였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 거라면?

‘박혜연의 몸이 멋대로 움직인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사라는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쪽으로 조금 더 의견을 모으며 노트북의 일기를 마저 읽어 보았다.

[예전부터 올리븐의 머릿속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아니, 내가 말 좀 안 하고 마탑에서 나왔다고 그 정도까지 비뚤어질 이유가 있나?

다 키워 놨더니 여전히 내 치마폭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떼 부리는 것도 정도껏이지…….

그 망할 제자 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뒤지게 패 버려야 할지 고민이다.]

여기까지 읽던 사라는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올리븐의 영혼석을 의식하며 침을 삼켰다.

조금…… 말투가 많이 격했다. 그녀답지 않게 말이다.

‘……기억이 아니라 다른 인격일 수도 있겠다. 그랬음 좋겠네.’

저 말투에서 왠지 모르게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페넬로아에게 물들어 버린 황후의 거친 언사가 저절로 떠올랐다.

페넬로아에게 자신도 물들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선 안 될 것이다.

사라는 애써 저 격한 말투를 외면하며 마저 뒤의 내용을 읽었다.

[아마 내가 다시 깨어나게 된다면 올리븐을 그렇게 만들었다며 자책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나’에게 말해 두겠다.

올리븐 그 자식은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이야.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걸 모르고 거둔 것, 하나뿐이야.

얘는 진짜 과거에도 지금에도 변한 게 하나도 없고 절대 갱생할 수 없을 거야. 그때에도 결국 내 손으로 죽여야만 했으니까.

결국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야.

약간의 조치를 취해 두긴 할 테지만, 다음번에 내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때는 무언가 바뀌어 있으면 좋겠다…….]

‘죽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라니? 게다가 이 글을 읽게 되는 나라니 그게 무슨…….’

박혜연의 일기는 마치 지금 내가 이 글을 읽을 것이란 걸 아는 것처럼 쓰여 있었다.

그리고 이 글에선 그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내가 올리븐을 내 손으로 죽였다니. 사라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지금도 올리븐의 영혼만을 빼내어 두었을 뿐, 그 아이의 몸은 얌전히 잠든 상태로 영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해,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 내가 모르고 있는 일이…….’

가슴이 크게 울렁이며 토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영혼 상태라서 그럴 리가 없었지만, 심장이 크게 뛰고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두려웠다. 사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져오는 두려움을 알아 버렸다.

‘어서, 어서 마저 읽어야 해.’

사라는 애써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기억이라도 온전했으면, 내가 기억을 대가로 삼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그래도 올리븐, 이놈의 자식은 절대 안 변할 거다. 내가 다시 한 번만 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저놈은 거두지 않으리라.]

‘시간을 돌려? 기억을 대가로 삼아?’

절반쯤은 올리븐에 대한 욕이 가득한 일기에 드디어 무언가 실마리가 되어 줄 말이 나왔다.

‘설마, 설마…….’

사라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부정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노트북의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하지만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기를 반복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럴 리 없다고 이렇게 고개를 저어 봐도 실은 그녀 또한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저 노트북에 쓰여 있는 말이 진실일 거라는 것을.

[이제 더 이상 기억의 착오 속에서 일을 진행하지 않아도 돼. 충분한 계기들이 쌓였으니까. 그러니 눈을 떠. 그리고 다시 필요한 조치를 하자. 거의 다 왔어. 에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공작님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노트북에는 저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저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

사라는 조용히 영혼 상태로 박혜연의 방문을 통과했다.

그러자 거실에 쓰러져 있는 박혜연의 몸이 보였다.

무언가를 먹으려고 했는지 바닥에는 깨진 접시와 음식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면서 쓰러진 박혜연의 고개는 이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텅 빈 눈동자가 정확히 사라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뜰 시간이야.’

사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박혜연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러자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 텅 빈 공간에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