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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7화 (177/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7화

* * *

사라, 아니, 박혜연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부릅뜬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흘려 보내던 혜연은 이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였어. 이 몸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도, 사라 밀런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도 이제 다 기억나.”

그녀는 두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두려웠다. 시간을 돌렸어도 에단과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클로드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시간을 돌리기 직전까지 모든 암시를 걸었음에도 그게 두려워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잘했어……, 정말 잘 해냈어, 나.”

하지만 이제 괜찮았다.

클로드는 암브로시아의 힘을 치유의 힘으로 바꾸어 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암브로시아의 힘은 갈망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힘이었다. 아마 그녀를 잃기 싫었던 클로드의 강력한 의지와 갈망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리라.

그 힘만을 가지고 있게 된다면 클로드는 박혜연이 지난번에 보았던 그 끔찍한 미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공작님 보고 싶다.”

다시 돌아간다면 모든 걸 털어놓고 그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아마 다정히 웃으며 사라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해 주겠지.

그 나직한 목소리와 따스한 품이 너무나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전에…….”

그녀는 어느새 품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 올리븐의 영혼석을 꺼냈다.

왜 그녀가 노트북에 ‘뒤지게 패고’ 싶다고 써 놨는지 전부 다 알 것만 같았다.

어째서 말투가 그렇게 걸걸해졌는지도 말이다.

대륙 각지에 흑마법이 남긴 상흔들이 있던 것도 전부 이 녀석 때문이었다.

흑마법은 시간과 섭리를 거스르는 힘. 그렇기에 그녀가 시간을 돌렸음에도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너도 봤을 거야. 내 영혼과 일부를 이어서 이리로 데리고 온 거니까…….”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올리븐의 영혼석이 구슬프게 울었다.

혜연은 침실에 놔두었던 곰 인형의 등을 갈라 올리븐의 영혼석을 넣었다. 그러자 인형의 실밥들이 저절로 얽어지며 갈라진 틈을 메꿨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더 있니?”

그녀는 곰 인형을 바라보며 물었고, 곰 인형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까만 눈 아래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스승님……. 죄송해요, 아아, 아아아아아…….

곰 인형이 털썩 주저앉은 채 절규했다. 올리븐은 사라의 영혼을 통해 그녀의 모든 과거를 보았다.

시간을 돌리기 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로 인해 스승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 얼마나 절망하였는지.

그녀의 영혼과 모든 감각을 공유한 올리븐은 인형의 몸에 가둬진 상태에서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구역질이 났고, 끔찍했고, 맛본 적 없는 절망에 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했다.

-어떻게, 어떻게 제가 스승님께……, 어떻게…….

그저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스승님은 자상하니까, 강하신 분이니까. 이 정도의 투정은 부려도 되겠지. 이 정도는 스승님께 간지러움을 주는 정도밖에 안 되겠지.

여태 내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과 영혼을 공유하며 그녀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끼고 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강대한 힘을 지녔기에 미처 할 수 없는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절망을.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올리븐은 참을 수 없이 역겹고 구역질 났다.

-제가, 제가 무슨 짓을……, 스승님, 제가……! 아아아아아악!

곰 인형 안에 들어 있던 올리븐의 영혼석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삭파삭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에 올리븐은 몸부림쳤으나, 방금 그가 맛본 사라의 절망이 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

혜연은 처절하게 울부짖는 올리븐의 절규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그 절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을 못난 제자를.

“내가 다시 사라 밀런의 몸으로 돌아갈 때, 널 여기 두고 갈 생각이란다.”

-……흐윽, 흐으으윽…….

“박혜연의 몸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때까지 네 영혼의 조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아마도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올리븐은 이제 스승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으니, 올리븐에게 이것보다도 더 끔찍한 형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초래한 스승의 고통을 곱씹고 또 곱씹다가 절망에 무너져 내려도 이를 위로해 주고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사라는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그게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란다.”

혜연이 손을 들어 눈물을 흘리는 곰 인형의 눈을 가렸다.

그러자 절규하던 올리븐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평범한 곰 인형으로 돌아간 인형의 등을 다시 갈라 본 혜연의 얼굴이 무겁게 굳었다.

“…….”

상처 하나 없이 깔끔했던 영혼석은 어느새 여기저기 갈라져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박혜연의 몸이 생을 끝내기도 전에 올리븐의 영혼이 먼저 소멸하고야 말 것이다.

“……그것 또한 네 몫이지.”

혜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올리븐의 영혼석이 든 곰 인형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작성하고 있던 노트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기억의 착오 속에서 일을 진행하지 않아도 돼.’

마지막 문장이 오래도록, 오래도록 그녀의 눈에 콱 하고 박혔다.

이제 그녀는 기다려야만 했다.

클로드와 에단이 다시 그녀를 그 세상에 불러 주기를. 간절히 내가 돌아오기를 원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클로드의 욕망이 치유의 힘으로 변모하였듯 에단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보고 싶어요, 공작님, 클로드 님.”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음성이 씁쓸하게 번졌다. 오랜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막막하지는 않았다.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사라에게는 올리븐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올리븐이 멋대로 익혀 버린 그 오래된 흑마법의 힘이 있었다.

“잠깐 힌트를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 * *

대륙의 평화는 깨졌다.

블라이트 제국을 선두로 한 세니아 공국, 도메룰스 왕국 등이 차례로 크롬벨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들은 대륙군이라는 이름 아래 동맹으로 뭉쳐져 신의 이름으로 크롬벨 제국을 처단하려 하였다.

“그 사악한 1황자의 시체만 넘겨주면 된다는데, 크롬벨의 황제께서 드디어 정신을 놓으신 게 분명하다!”

“겨우 아들의 시체 하나 때문에 크롬벨 제국민의 피를 보겠다는 건가!”

모두가 크롬벨 황제의 어리석은 결정에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었다.

마탑에서는 이와 같은 황제의 결정에 ‘심히 유감’이라는 뜻을 전하며 다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로써 크롬벨은 흑마법을 숭상하는 제국으로서 온 대륙의 공적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평소 교류를 하던 국가들도 차마 크롬벨에 손을 내밀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크롬벨 제국은 부족한 병사 수를 늘리기 위해 무작위로 훈련도 안 된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내 아들은 안 돼……, 안 됩니다, 기사님!”

“제국이 위태로울 때 제국병으로서 크롬벨에 헌신할 수 있음을 영광으로 알아라!”

“내 아들은 이제 겨우 열다섯입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아악!”

“어머니, 아버지!”

곳곳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의 통곡하는 소리가 끓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신분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했다.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황제 폐하의 죽은 아들 하나 때문에 왜 멀쩡히 살아 있는 제 아들이 사지로 끌려가야 한단 말입니까!”

“흑흑, 제 약혼자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아요. 지난번 전투에서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는데! 아아, 주르비 경…….”

“이번에 벨루치 자작가의 차남이 블라이트 제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하더군요……. 벨루치 자작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을 놓았다고 합니다.”

사교계에서도 연일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중한 이를 전쟁터에서 잃은 귀족들의 불만은 당연히 판단력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황제에게 향했다.

“이건 미친 짓입니다. 죄인 카제르 드 크롬벨의 시체를 넘기고 이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3황자 일레온 드 크롬벨은 황제에게 진실한 간언을 올린 죄로 황궁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모든 군의 정권을 2황자 일리오르 드 크롬벨에게 넘긴다. 네 형님의 시체를 잘 지킨다면 이 황위는 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2황자 일리오르 드 크롬벨이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

그토록 고대하던 황위에 누구보다 가까워졌음에도 일리오르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도 어렴풋하게 깨닫고 있었다. 크롬벨 제국은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에 빠졌고, 그 원인은 완전히 미쳐 돌아 버린 황제에게 있었다.

“에단 암브로시아는…… 이렇게 될 것을 알아서 그리 미련 없이 제국을 버릴 수 있었던 건가.”

2황자 일리오르는 그렇게 씁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전쟁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륙 전쟁이 발발한 지도 이제 일 년이 지났네요.”

“어젯밤 대륙군이 벌룬 후작 성을 점령했다고 하더군요.”

“헉, 벌룬 후작 성이면 수도와 가장 가까운 영지인데! 어떻게 벌써!”

“대륙군의 기세가 무시무시해요. 이제 곧 수도까지 함락되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요.”

“저희 가문은 이미 수도를 떠날 계획을 세웠답니다.”

“수도를 떠난다니요?”

“영지까지 버리고 도망 온 처지에……, 수도를 떠나는 것쯤은 쉬운 일이지요.”

수도에 모여든 귀족들은 불안감에 덜덜 떨며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것은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수도로 피난 온 제국의 피난민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륙군의 기세가 아주 맹렬해서 겨우 일 년이 되어 가는 사이에 크롬벨 제국군은 그 기세를 펴지 못하고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암브로시아 공작에 대한 소식은 없나요?”

“마탑에서 대장로를 잃은 복수를 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어머,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황제 폐하께 실망을 한 나머지 다른 왕국으로 귀화했다고 하던데요?”

귀족들 사이에서는 에단 암브로시아의 행방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귀족들의 소문과는 달리 크롬벨의 백성들에게서는 다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수도가 아닌 마물의 숲으로 가. 그곳에 가면 암브로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는구만.”

“그게 정말이야? 하지만 마물의 숲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는 알톤 영지의 바로 옆이 아닌가? 대륙군조차 두려워 피해 간다던데…….”

“그러니 더더욱 그리로 가야 해. 그곳에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님이 전쟁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제국민들을 품어 주신다는 말, 못 들어 봤는가?”

“암브로시아 가문은 실종되었잖아?”

“그분이 어딜 크롬벨 제국민을 버리실 분인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수도, 그렇다고 흑마법을 사용한 1황자를 옹호할 수도 없으니 황제의 눈을 가리고 백성들을 지키는 선택을 하신 거지.”

미처 수도로 향하지 못한 크롬벨 제국의 난민들은 하나둘씩 소문을 듣고 알톤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알톤 영지와 맞닿아 있는 마물의 숲 한가운데.

“아버지, 오늘도 유모가 일어나지 않아요.”

“……기다리자꾸나. 돌아온다고 약속했으니 꼭 돌아올 거다. 사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눈을 뜨지 않는 마법사의 옆을 두 부자가 함께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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