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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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벨 황제가 애타게 찾고 있는 에단 암브로시아를 포함한 암브로시아 가문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이곳, 마물의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날 알톤 영지에서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 벤야민과 벨루나,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암브로시아의 모든 것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대륙군과 크롬벨 제국의 진정한 전쟁은 황실이 아닌 이곳, 마물의 숲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탑의 조력으로 대륙군들은 민간인들을 전부 다 학살했다고 판단한 뒤 벌룬 후작 성을 떠났습니다.”
“이번 환상 마법진의 효과는 전보다 더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벌룬 후작 성에 상주한 대륙군이 떠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수하에게 되묻는 에단 암브로시아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에단 암브로시아는 은밀히 마탑과 거래를 했다.
벤야민과 벨루나를 앞세우니 협상은 쉬웠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는 조건이었고, 그것은 에단 역시 바라는 바였다.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환상 마법진을 이용해 대륙군의 눈을 가렸다.
영지를 불태우고 성을 점령하고 온갖 보물을 손에 넣는다.
거짓으로 점철된 승리 앞에서 대륙군의 기세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에단이 허락하는 동안은 유지될 승리였다.
“물론입니다. 벌룬 영지뿐만 아니라 마탑의 마법사들이 각 영지에 상주하며 계속해서 환상 마법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잘해 주고 있군.”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령은 갈수록 날카로운 기세를 더해 가는 주군의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키며 보고를 이어 갔다.
“암브로시아 기사단과 벤야민 님이 블라이트 제국의 수뇌부 몇을 생포해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부상자는?”
“없습니다. 생포 과정에서 다소 마찰이 있긴 했지만, 바로 상황이 정리됐다고 합니다.”
“쯧.”
마찰이 있었다는 말에 에단은 그 상황이 그려지는지 작게 혀를 찼다.
쥐도 새도 모르게 생포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절반만 성공한 탓이다.
이로써 블라이트 제국은 수도로 진격하는 데 주춤하게 될 것이다.
이미 승리감에 취할 대로 취해 경계를 잊은 대륙군에게 다시 한번 위기감을 심어 주었을 테니까.
“보나 마나 벤야민이 열 받아서 소란을 피웠겠지.”
“면목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탓할 생각은 없다. 블라이트 제국에서 분명 협상안을 보냈을 텐데. 뭐라고 하던가.”
“협상안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흥미롭다라. 그걸 잊은 지 오래인데, 과연.”
에단의 눈빛에 희미한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을 뿐, 그의 눈에는 곧 꺼멓게 죽은 피로만이 가득 들어찼다.
수하가 건네주는 블라이트 제국 황제의 서신을 받아 든 에단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현재 온 대륙이 대륙군과 그 동맹국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블라이트 제국 황제의 서신을 이리 태평한 얼굴로 받아 볼 수 있는 자는 에단 암브로시아뿐일 것이다.
[크롬벨 황제는 그대가 전쟁이 두려워 도망쳤다 했지만, 진정한 크롬벨 제국의 황실이 그대의 팔 안에 숨어 있었구려.
‘암브로시아 가문은 영원히 황실의 그림자가 되어 크롬벨을 수호한다.’
내가 황태자 시절에 배운 그 구절이 한때는 부럽다 여겼다오.
하나, 오늘로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비로소 만족하오.
그대가 수호하는 것은 황실이 아닌 크롬벨이었어.
지금의 황실은 크롬벨에 걸림돌이 되어 내 손을 빌린 그대의 손에 제거되는 중인 게지. 내 말이 맞소?
나는 그저 내 충실한 종에 만족할 테니…….]
이어지는 서신을 바라보던 에단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과연 늙은 크롬벨의 황제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였다.
비록 야망은 컸지만 물러설 때를 잘 아는 자이니 아마 전쟁은 곧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단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2황자 일리오르가 포위됐다더군. 순순히 물러설 테니 퇴로를 돌려 달라는 요청이다.”
“2황자를 죽이든 포로로 잡든 주군께서는 이미 퇴로를 내어 줄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에단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현재 대륙군은 압도적인 기세로 크롬벨 황실까지 진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륙군이 승리했다, 어느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 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에 불과했다.
“물론이지. 적어도 저들은 살아서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훗날 클로드가 내 모든 것을 물려받았을 때도 제 주제를 기억하고 몸가짐을 조심하겠지.”
크롬벨 제국에서 에단 암브로시아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렇기에 에단은 한발 물러서서 이곳 마물의 숲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서서히 대륙군의 뒷목을 조였다.
그들이 승리에 한껏 취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정의에 고취되어 이성을 잃을 수 있도록.
그렇게 그들이 크롬벨의 심장인 수도를 코앞에 두었을 때, 암브로시아는 이를 드러냈다.
무방비한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렇기에 에단은 수없이 차오르는 공허함을 힘겹게, 아주 힘겹게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 제안에 대해선 3황자의 의병대가 도착했을 때 의논해 보지. 나가 보도록.”
“예, 주군.”
수하가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전쟁터에서 부지런히 발을 달려온 전령들이 에단 암브로시아의 집무실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전부 다 에단이 보고받고 처리해 줘야만 하는 중대한 사항들을 품에 안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그는 주군과 마찬가지로 꺼멓게 죽은 베론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베론, 주군께서 휴식은 취하고 계시는가?”
“휴식은커녕 식사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베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마 클로드 님과 항상 아침 식사를 함께하라는 밀런 소백작님의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주군께서는…….”
사라가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도 1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들은 여전히 에단과 클로드에게 착실히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식사를 함께할 것.
클로드와의 놀이 시간을 가질 것.
에단은 사라와의 약속을 매일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아무리 바쁘고 긴박한 상황이 닥쳐도 반드시 지켰다.
그 덕에 에단은 조금이나마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저렇게 누워 계셔도 여전히 주군과 클로드 님을 지키고 계십니다. 사라 밀런 소백작님께서는.”
베론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집무실 밖에 있던 모든 인원이 전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몇몇은 벅차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하, 신이시여…….”
“소백작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네주실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의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단을 위해서, 그리고 크롬벨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주 산더미 같았다.
처음 알톤 영지에 일이 생겼을 때부터 에단은 모든 것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알톤 영지는 대륙군이 혹여나 있을 흑마법사들과 마물들을 경계해 피해 가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갈 곳을 잃은 크롬벨 제국민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마물의 숲에 숨어서 크롬벨 제국의 제국민들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것.
암브로시아 기사단은 수시로 마물의 숲에서 마물들을 착실하게 해결하며 영역을 넓혀 갔다.
암브로시아의 정보원들은 대륙 곳곳에 퍼져서 크롬벨 제국민들이 마물의 숲으로 향할 수 있도록 소문을 퍼트렸다.
암브로시아 가문이 마물의 숲에 터를 잡기까지 1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밀런 소백작님이 일어나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마물의 숲에 자리한 암브로시아 저택은 다시 한번 슬픔을 딛고 바쁘게 움직였다.
“아, 베론 님. 3황자님께서 의약품과 병장기 등을 추가로 더 요청하셨습니다.”
“그 정도는 벨루나 님을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꽤 잘해 주시고 있군요. 제국민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나라를 위해 농병기 대신 칼을 든 백성들과 함께 먹고 자며 페넬로아 님과 함께 직접 전장을 누비고 계시니……. 사실, 2황자인 일리오르 님보다 더 신임을 얻고 계시죠.”
황실에서 추방된 3황자 일레온과 페넬로아는 제국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암브로시아의 손길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작은 영지나 마을은 전부 3황자 일레온이 지켜 내고 있었다.
털털한 페넬로아와 황실에서 추방당한 고귀한 황자의 이야기는 전쟁 중에도 로맨스 소설로 만들어져 수도에서도 찾을 정도로 인기리에 판매 중이었다.
“전부 다 잘돼 가고 있는데……. 오직 밀런 소백작님만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시니.”
베론은 안타까운 눈으로 집무실을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가 누워 있는 방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곳에는 영원한 잠에 빠져 버린 아름다운 마법사가 있었다.
클로드는 그런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에단과의 아침 식사도, 놀이 시간도. 전부 눈을 감은 사라의 곁에서 이루어졌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며 오늘도 조잘거리시겠지, 클로드 님께서는…….”
결국 베론은 눈물을 보였다.
사라는 그의 은인이기도 했고, 삭막한 저택에 활기와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사라가 저렇게 된 뒤로 암브로시아는 끝이 없는 깊은 늪에 빠져 버린 것처럼 서서히 잠겨 갔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아 가슴을 두드리는데, 저 멀리서 메이와 론다가 사색이 된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베론!”
“집사님!”
혼이 나간 것처럼 뛰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베론은 와락 미간을 좁혔다.
그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한껏 잔소리를 퍼부어 댈 준비를 마쳤다.
“론다, 메이. 주군께서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걸 몰라서 이렇게…….”
“사라, 사라 님이!”
베론의 말을 메이가 다급하게 막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밀런 소백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흐으, 흐……, 사라 님이 사라 님이…….”
메이의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베론을 포함해 에단의 집무실 밖에서 보고를 기다리던 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메이의 입술 끝을 바라보았다.
“설마, 잘못되신 건…….”
불길한 기분에 베론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벌컥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사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허억, 주군.”
급히 문을 열고 나온 에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해. 사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묻고 있지 않나.”
이를 악물며 대답을 재촉하는 에단의 목소리 끝이 떨려 왔다.
그 모습을 보며 메이와 론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곤 이내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사라 님이……, 눈을 뜨셨습니다. 눈을…… 흑, 뜨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