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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79화 (179/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79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오랜만에 이렇게 혼신을 다해 뛰어서가 아니었다.

벅차올라서. 꾹꾹 눌러 왔던 모든 것들이 벅차올라서.

그래서 에단은 숨을 헐떡이며 달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쩔 때는 온종일 머무르던 사라의 방까지 가는 길이 이토록 멀었던가.

“주군, 주군……!”

에단의 뒤를 따라오는 수하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사라가 잠들어 있는 방에 다 와 갈수록 클로드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번져 왔다.

분명 사라가 깨어났으니 참았던 서러움이 복받쳐 우는 걸 텐데, 에단의 심장에 실낱같은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그는 사라의 방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

방금 전까지 엄청난 속도로 뛰어왔던 것과는 달리, 문고리를 잡은 에단의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식은땀이 그의 턱 끝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아아아, 유모! 유모!!!”

방 안에서 클로드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감격에 젖은 울음소리라기엔 절규에 가까웠다.

“……왜.”

왜 저렇게 서글프게 우는 걸까. 왜 이 문을 나는 열지 못하고 이리 멈춰 서 있는 걸까.

불안을 예견한 에단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하지만 힘을 주어 문고리를 꾹 잡아 문을 열었다.

“아버지!!”

문을 열고 들어온 에단을 발견한 클로드가 단숨에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흐윽, 흐으으윽. 아버지, 유모가, 유모가…….”

순식간에 에단의 옷자락이 아이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에단은 무릎을 굽혀 클로드를 안아 주면서 무거운 고개를 들어 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여전히.

“유모가 일어났었는데, 일어났는데……! 분명 그랬는데…….”

사라가 눈을 뜬 걸 보고 메이와 론다는 그 길로 방을 뛰쳐나갔다.

눈을 뜬 사라와 조금의 대화라도 해 본 것은 오직 클로드 혼자뿐이었다.

“다시 잠들어 버렸어요!”

클로드와 눈이 마주친 사라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당겨 웃어 주었다.

곧 자신이 다시 눈을 감으리란 걸 알고 있는 미소였다.

클로드의 얼굴은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클로드. 괜찮다. 괜찮아…….”

에단은 그런 아이를 보듬으며 천천히 사라에게 다가갔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틀림없이 깨어났었다는 증거였다.

사라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는 에단의 손이 덜덜 떨렸다.

숨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쉰 에단은 클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라가 남긴 말은?”

“흐윽, 흐으윽. 유모가……. 보고 싶었다고…….”

클로드는 울며 사라가 남기고 간 말을 에단에게 들려주었다.

‘내 아가님이 여기 계시네…….’

‘유모……?’

‘보고 싶었어요, 정말 많이. 너무 보고 싶었어.’

‘으윽, 으…… 흑!’

감격에 젖은 클로드는 우느라 사라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고, 유모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에 너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사라는 저 말들만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유모가 이대로 영영 못 일어나면 어떡해요?”

마지막으로 사라에게 우는 모습만 보여 줬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클로드는 사라가 깨어나지 못한 그 1년 동안 칭얼거리지도 않고 의젓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먹고 많이 웃으려 했다.

사라가 그러기를 바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오늘 클로드는 참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버렸다.

“무서워요, 저 너무 무서워요. 아버지…….”

에단의 품에서 펑펑 우는 클로드의 모습은 혼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 클로드를 연신 토닥이며 에단은 사라의 머리칼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고 그녀의 뺨을 한번 쓸어 보았다.

“따뜻해.”

온기가 없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시체처럼 차가웠던 몸에, 이제 산 사람 같은 따뜻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에단의 중얼거림을 듣고 클로드가 그의 품에 파묻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모가 따뜻해요?”

“그래.”

클로드는 에단의 품에서 빠져나와 꾸물꾸물 사라에게 덮어 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착 붙이고 짧은 팔로 한껏 사라를 끌어안았다.

“오늘 일어났으니까, 또 일어날 거야. 유모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또다시 보러 올 거야.”

클로드의 중얼거림은 절절한 소원에 가까웠다.

사라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아이는 이제야 느껴지는 온기에 슬프게 미소 지었다.

“…….”

그런 아이의 모습을 에단은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공작 집무실의 모든 집기가 사라의 방으로 옮겨졌다.

에단의 모든 업무도, 식사도, 보고도 전부 사라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한날한시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 * *

사라가 처음으로 눈을 떴던 그날 이후,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저녁때였다.

클로드는 사라의 옆에 누워서 잠에 들려 하고 있었고, 에단은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사라가 예전에 클로드를 위해 쓴 동화책 중 하나였는데, 읽지 않고 아껴 두었던 귀한 것이었다.

“검은 여우는 파란 망토 소년을 잡아먹기 위해 소년의 할아버지로 분장을 했습니다.”

“아버지, 여우가 사람으로 분장을 할 수 있어요? 제가 본 여우는 아주 작았는데요. 그걸 속는 소년이 바보가 아닐까요?”

“……마법을 쓸 줄 아는 검은 여우였단다.”

“아, 그럼 그럴 수 있겠다. 계속 읽어 주세요.”

에단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클로드의 질문에 은근한 식은땀을 흘리며 동화를 마저 읽어 주었다.

“파란 망토 소년은 그날도 어김없이 할아버지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늦은 밤 길을 나섰습니다.”

“아버지.”

“……응?”

클로드가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자 책장을 넘기던 에단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파란 망토 소년의 부모님은 왜 늦은 밤에 소년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거예요?”

“…….”

“만약에 유모라면 위험한 시간에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을 거예요.”

“……네 말이 맞구나. 사라라면 네게 그럴 리 없지.”

이번만큼은 에단도 클로드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못한 채 애꿎은 책장만 넘겼다.

이 동화 속 파란 망토의 부모는 사실 파란 망토가 검은 여우에게 잡아먹혀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애를 사지로 내몰았다.

이게 과연 어린아이가 읽어도 되는 동화란 말인가.

에단이 그런 의문을 품고 사라가 친히 그림까지 그린 동화책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웃음기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가 에단을 대신해 클로드에게 대답해 주었다.

“왜냐하면, 파란 망토 소년은 영웅으로 자랄 아이거든요. 원래 영웅의 부모는 좀 매정한 면이 있어야 하는 게 이야기의 법칙 같은 거라…….”

“……!”

“……사라?”

에단과 클로드의 시선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사라에게 향했다.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의 부드러운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싶고, 그동안 나 안 보고 싶었냐고도 물어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요.”

“유모!”

클로드가 사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라는 웃으며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런 사라의 손길을 받는 아이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항상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일방적으로 끌어안았던 것과는 달리, 따뜻한 사라의 손길을 받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기뻤다.

너무나 그리웠던 손길이었다.

“깨어난 겁니까…….”

멍하니 사라의 얼굴을 보며 묻는 에단의 목소리 끝이 덜덜 떨리며 갈라졌다.

그런 에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라가 아프게 웃었다.

“죄송해요, 아직 이쪽으로 넘어올 수 없어요.”

사라의 말에 에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에단에게 사라는 질문했다.

“공작님의 힘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나요?”

“그게 무슨…….”

“제게 대답을 들려주셔야 하잖아요. 그러니 좀 더 힘내 주세요. 제가 돌아올 수, 있도록…….”

사라의 말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유모……, 유모?”

클로드의 등을 쓸어 주던 부드러운 손길도 이내 툭, 하고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사라는 방금 전 눈을 뜬 것이 마치 거짓이라는 양,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클로드와 에단은 그렇게 한동안 사라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의 얼굴엔 지난번과 같은 무기력한 절망은 없었다.

“아버지…….”

“그래.”

에단과 클로드는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올 수 있도록 힘을 내 달라고 했다. 그 말은 사라 또한 역시 돌아오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깨어날 수 있다. 돌아올 수 있다.

사라의 입으로 직접 말한 것이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벤야민 형이랑 벨루나 누나를 불러야 해요.”

“당장 지시하마.”

드디어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비록 사라가 다시 잠들었지만 클로드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에단 역시 꺼멓게 올라오는 절망을 내리누를 수 있었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에는 이리 쉽게 보내진 않을 겁니다, 사라.”

그는 클로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이내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해야 할 대답이 있어.”

이제 더 이상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없을 것이다.

에단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났다.

허무하게 그의 손아귀에서 그녀를 놓쳐 버린 것은 지난번 경험으로 이미 충분히 겪었다.

* * *

사라가 두 번째로 눈을 떴다는 소식은 암브로시아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가슴이 아파 차마 사라의 방을 찾을 수 없었던 이들도 이제는 시시때때로 사라의 방에 들어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또 언제 눈을 떠서 말을 걸어 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라가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때를 목격한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 메이가 되었다.

“안녕, 메이.”

“사라 님!”

메이가 사라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그녀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에단과 클로드의 놀이 시간이 한창이었다. 벤야민과 벨루나도 함께였다.

마물의 숲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았는데 오후에 반나절 정도 해가 쨍하게 비칠 때가 있었다.

에단은 그럴 때마다 클로드를 밖으로 끌어내 놀이 시간을 가지게 했다.

아이는 햇빛을 보고 커야 한다고, 사라가 예전에 일러 주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신 거예요? 돌아오신 거예요? 지금 당장 공작님과 클로드 님을 불러올게요!”

“쉿.”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는 메이를 사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붙잡았다.

“클로드 님의 놀이 시간을 방해하면 어떡하니.”

“하지만 사라 님이 이렇게 일어나셨는데…….”

“나는 곧 다시 잠에 들 거야.”

“……!”

메이를 보며 살포시 웃어 준 사라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클로드의 얼굴은 예전에 비하면 어두웠지만, 에단이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목말을 태워 주니 활짝 웃었다.

벤야민은 그런 클로드의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고, 아이는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었다.

벨루나는 벤야민을 말리면서도 꺄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며 사라는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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