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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80화 (180/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0화

* * *

전쟁터를 부지런히 누비며 각각 맡은 역할을 해내던 벤야민과 벨루나는 아주 오랜만에 암브로시아의 복도를 걸었다.

마물의 숲에 그대로 옮겨 온 듯한 암브로시아 저택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브로시아 공작가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 나오는 것이 놀라웠다.

“클로드 님은 잠드셨어?”

“그래.”

벨루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벤야민은 입가에 희미하게 맺힌 미소를 지웠다.

아이의 두 눈은 매일같이 퉁퉁 부어 있었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했지만 속은 갈수록 문드러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스승님께서 보신다면 크게 속이 상하시겠군.”

“이미 보셨다잖아. 아마 저쪽에서 열심히 애쓰고 계실 거야.”

“……그러시겠지. 아마 우리보다 더.”

사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암브로시아로 달려온 이후 그들은 아직도 눈을 뜬 스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치 시체처럼 누워서 숨만 쉬던 몸에 혈색이 돌고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벤야민과 벨루나는 동시에 직감하였다.

“드디어 스승님께서 전에 말씀해 주시던 힘을 쓸 때가 된 건가.”

“아마 이제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전부 마치셨을 테니…….”

그들은 유일하게 사라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사라가 그들과 나눈 마법사의 맹약 때문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두 개라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다는 약속.

어길 시에는 영혼이 파괴되는 그 약속 덕분에 벤야민과 벨루나는 현재 사라의 상태가 어떤지 알면서도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야.”

“암브로시아의 유물고에는 파도 파도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니까…….”

벤야민은 피곤이 묻어난 얼굴로 미간을 좁히며 가볍게 목을 풀었다.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그들은 암브로시아 유물고에 기록되었던 힘의 자취를 쫓았다.

암브로시아 가문의 방계에서 힘이 발현된 사례들을 찾아 그들이 터를 잡았던 곳을 이 잡듯이 뒤지기도 하였다.

“스승님의 예상이 맞았어.”

그들은 사라가 떠나기 전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그 힘이 가진 욕망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와 줄 거란다.’

이제야 스승이 했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암브로시아의 힘은 ‘욕망’을 이루는 힘이야.”

에단 암브로시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변모하게 될까.

그것을 생각하니 그의 집무실로 향하는 벨루나와 벤야민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과연 그자는 진정 그 힘을 스승을 불러오는 데 온전히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만한 자인가.

“…….”

“…….”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애써 무시하며 에단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먼저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있었다.

그 익숙한 얼굴에 벨루나가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메이 양.”

“안녕하세요, 벨루나 님. 그리고 벤야민 님.”

메이는 굳은 얼굴로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해 보인 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본 벨루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스승님께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벨루나의 물음에 메이는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단의 집무실 앞에는 그에게 올릴 보고를 준비하는 수하들이 아주 많았다.

아마 그들에게 알릴 수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메이 양이라면요.”

벨루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를 따라 자리를 잠시 옮겼다. 사라가 암브로시아에서 유일하게 말을 놓는 것은 메이뿐이었으니 그만큼의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에단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응접실로 들어간 벨루나는 벤야민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소리를 차단시켜 주는 마법을 전개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

벨루나의 말에 메이는 긴장한 것처럼 침을 크게 한번 삼킨 뒤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 님께서 깨어나셨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곧 다시 잠드셨지만 아까 클로드 님과 놀이 시간을 가질 때 일어나셨었어요.”

“왜 공작님과 우리들에게 알리지 않았죠?”

벤야민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메이를 노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메이는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다가 이내 두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사라 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 말을 믿으라고. 스승님께서 우리를 찾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벤야민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벨루나는 그런 벤야민을 제 등 뒤로 보내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잠시 깨어나셨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남기신 말 같은 건 없었나요, 메이 양?”

“있었습니다. 정확히 두 분에게 남긴 말이에요. 공작님과 클로드 님은 아직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망설임’이 생기게 된다고요.”

메이의 말에 벤야민과 벨루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벤야민은 어느새 제 손에서 타닥거리는 마력을 거두었다.

그것을 보고 길게 숨을 내쉰 벨루나가 다시 메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말씀해 주세요. 듣겠습니다.”

다시 얌전해진 벤야민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메이는 사라가 남기고 간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준비를 마치실 때, 너희와 나눈 맹약을 깰 생각이야. 그러니 거부하지 말고 동의하렴.”

“……!”

“……!”

메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벨루나와 벤야민의 두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그 두 사람의 표정을 본 메이의 얼굴 역시 불안으로 물들었다.

“저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라 님은 두 분에게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하셨는데…….”

메이는 그 뜻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사라의 말대로 벤야민과 벨루나는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잠시, 저희끼리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벨루나의 손에서 흘러나온 은빛 마력이 순식간에 메이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작게 외운 수동어와 함께 메이의 몸이 순식간에 밖으로 이동했다.

메이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이동 마법을 써 버렸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벨루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스승님께서는 암브로시아의 힘만 이용할 생각이 아니셨어.”

“……지난번에 올리븐이 그랬지, 자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스승님을 지킬 뿐이라고.”

대답하는 벤야민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갈라졌다.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설마 스승님이 ‘그’ 영혼을 희생하려 한단 말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벤야민?”

“아니.”

벤야민은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아 벨루나의 소리 차단 마법을 해제시켰다.

“어디 가!”

“잊었어? 우린 보고를 하러 가던 길이었잖아.”

“……스승님을 말릴 생각은 없구나.”

발걸음을 옮기는 벤야민의 뒷모습을 보며 벨루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벨루나를 뒤돌아보며 벤야민은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선택’을 하신 거야. 존중하도록 해, 벨루나. 올리븐과 같은 실수를 하기 싫다면.”

“…….”

벤야민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곤 바로 에단의 집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밀고 들어갔다.

밖에서 베론이 ‘주군께 먼저 고하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벤야민 님!’이라고 잔소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 스승님에게 미치려면 저렇게 미쳐야 하는 건가.”

남겨진 벨루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벤야민의 뒤를 따랐다.

* * *

“그래. ‘욕망’을 이루는 힘이라…….”

벨루나와 벤야민의 보고를 전부 들은 에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역대 암브로시아의 가주들은 그 힘이 주는 파괴적인 면을 더 강하게 키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더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 가장 손쉽게 빠져들 수 있는 충동일 테니까요.”

“……신에 필적하는 힘이 한낱 인간의 손에 쥐여졌으니. 타락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을 테지.”

에단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 힘을 탐하던 아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광기에 가까운 탐욕이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 치웠고, 결국 제 스스로까지 삼켜 버렸다.

자신과 똑같은 힘을 타고 태어난 아들이 가진 것이 제가 가진 것을 넘어서는 걸 경계하고 질투하면서 말이다.

욕망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힘을 키우기 마련이었다.

이 힘을 두려워할수록 그 힘은 두려움을 먹고 자라났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욕망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였다.

“클로드 님께서는 제대로 된 욕망이 피어나기도 전에 스승님을 만났습니다. 아마도 긍정적인 영향을 잔뜩 받으셨겠죠. 그렇기에 암브로시아의 힘이 옳은 길로 발현된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벤야민의 보고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그야말로 암브로시아의 기적이었다.

에단은 아이를 사랑하면서 사랑을 주는 법을 몰랐고.

클로드는 사랑받으면서도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정한 말을 건네고, 위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사라가 그에게 알려 준 것들은 겨우 이런 것들이었지만, 겨우 그런 것들을 못 해 클로드를 망가뜨릴 뻔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사라가 없었더라면……. 아마 클로드도 나와 같은 괴물이 되었겠지.’

두 사람의 마음을 연결시켜 준 것은 사라였다. 결국 사라가 클로드를 구한 것이다.

조금만 더 그녀를 일찍 만났더라면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감추었다.

“클로드의 힘은 치유의 힘이지.”

“네, 아마도 다친 스승님을 낫게 하고 싶었던 것이 클로드 님이 처음으로 가진 ‘욕망’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그 뒤로 클로드가 여러 번 사라에게 힘을 쓰려고 했지만, 예전과 같은 빛만 뿜었을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데. 이건 무슨 일이지?”

“그건…….”

에단의 질문에 벤야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흐렸다.

그의 뒤통수로 벨루나의 시선이 강렬하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사의 맹약은 스승님께서 깰 거라고 했으니, 지금 이 시점에서 그걸 벤야민이 깨 버릴 순 없었다.

“벨루나.”

벤야민은 결국 벨루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말주변이 없는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바로 벨루나였다.

그녀라면 최대한 맹약을 건드리지 않고도 에단에게 스승의 뜻을 전할 수 있을 테니까.

“……후.”

벨루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섰다.

“클로드 님의 힘으로 스승님의 몸은 완전히 회복을 하셨을 겁니다. 깨어나셨을 때 무리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 덕분입니다.”

“……그렇군.”

일 년이나 누워 있었지만 몸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클로드의 힘으로 몸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다만 스승님이 저렇게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부재 때문……, 컥!”

벨루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와 벤야민의 목에 시꺼먼 쇠사슬이 생겨나 목을 조였다.

그들은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마력을 일으켜 쇠사슬을 감싸며 시간을 벌었다.

“무슨 일이지?”

“……윽, 맹약, 때문입니다.”

강력하게 조여 오는 쇠사슬에 벤야민과 벨루나의 몸이 점차 허물어졌다.

벤야민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던 때가…… 헉. 되었습니다.”

힘겹게 이어지는 벤야민의 말을 들으며 에단은 사라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공작님의 힘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나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에단은 이내 걸음을 옮겨 사라의 방으로 향했다.

빠르게 걷던 그의 두 발은 어느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아.”

사라에게로 향하는 에단을 보며 벤야민과 벨루나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쇠사슬의 압박을 견디는 데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곧, 이 맹약의 사슬은 깨질 것이다.

스승님이 완전히 돌아옴과 동시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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