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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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아 저택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사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3황자가 페넬로아와 일렉사와 함께 찾아온 것이다.
집사인 베론이 가장 먼저 이들을 맞이하였다.
“크롬벨 제국의 세 번째 광영,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베론이 예를 다하기도 전에 일레온이 다급히 물었다.
“밀런 소백작이 깨어났다고 들었네. 지금 만나 볼 수 있겠는가?”
“예, 지금은 산책을 하고 계실 테니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베론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페넬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론을 포함한 암브로시아 사람들의 얼굴에 짙게 내려앉았던 그늘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가 돌아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평온함이었다.
그 따뜻한 온기를 느낀 일렉사가 들뜬 얼굴로 페넬로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머니, 이번엔 진짜 깨어났나 봐요.”
“그래……. 정말 깨어나셨나 보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페넬로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알톤 영지에서의 일을 전해 들었을 때 페넬로아는 처음으로 일레온의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
떠나기 직전까지 그녀의 사정을 살펴 주었던 사라에게 페넬로아는 변변찮은 보답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후회로 남았는지, 일레온조차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야 이 오랜 전쟁이 끝날 수 있겠어, 페넬로아. 기쁘지?”
“……응.”
페넬로아는 웃으며 제게 손을 내미는 일레온의 손을 마주 잡으며 떨리는 발걸음을 겨우 뗐다.
베론의 안내에 따라 암브로시아의 저택을 가로지르며 일레온은 틈틈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나가는 사용인들의 얼굴도 그렇고, 저택 전체의 분위기도 그렇고.
이곳이 마물의 숲 한가운데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따뜻하고도 평안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암브로시아에게 있어서 밀런 소백작의 존재가 이 정도였을 줄이야…….”
예전에 그는 에단의 집무실 창문으로 사라와 클로드를 본 적 있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을 훔쳐본 것 같았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사라 밀런이 암브로시아에 머무는 내내 저택은 그런 공기에 감겨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잃었다가 되찾은 지금이 얼마나 그들에게 소중한 시간일지 일레온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밀런 소백작은 어디서 산책을 하고 있나? 암브로시아 주변은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 때문에 산책하기에 마땅한 곳은 아닐 텐데.”
“정원에 마련된 온실에 계십니다.”
“온실?”
이 마물의 숲 한가운데에 무슨 온실이란 말인가.
마물의 숲은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암브로시아가 터를 마련한 곳이 하루에 아주 잠깐 해가 들 뿐.
여전히 이곳은 우중충한 마물의 숲 한가운데였다.
그런 곳에서 온실이라니. 터무니없는 말에 일레온이 무어라 더 물어보려 할 때였다.
“밀런 소백작님께서 깨어나신 이후 정원을 한번 보시더니 클로드 님의 정서상 좋지 않다며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이는 해를 보고 자라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일레온에게 대답하는 베론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곳이 마물의 숲이라고 한들, 밀런 소백작님께서 못 하시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레온 일행의 눈앞에 커다란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온실이 나타났다.
온실의 위에는 커다란 빛 덩어리가 마치 태양처럼 온실을 비추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마물의 숲에서는 보기 힘든 푸르른 식물들과 화려한 꽃잎을 자랑하는 꽃들이 비쳤다.
심지어 허공에서는 나비가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와아……!”
일렉사의 입술 사이로 순수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난번에 클로드를 보러 왔을 때는 없던 것이 떡하니 생긴 것도 신기했고, 눈앞에 보이는 온실이 너무나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였다.
“……밀런 소백작님께서는 마물의 숲도 신의 정원으로 바꿔 버리시네요.”
페넬로아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사라라면 아마 전쟁터 한가운데에서도 클로드에게 예쁘고 좋은 것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전부 다 쏟아부을 것이 분명했다.
“들어가시죠. 주군과 클로드 님께서도 자리해 계십니다.”
베론이 웃으며 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달콤하고도 청량한 꽃향기가 훅 하고 풍겨 왔다.
아주 오랜만에 맡아 보는 향기였다.
“일렉사, 이리 오려무나.”
일레온이 일렉사를 향해 손짓했다. 일렉사는 들뜬 얼굴로 제 아비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겼다.
“전쟁 때문에 바빠 네게 이런 것 하나 보여 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내 아가.”
일레온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일렉사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런 아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렉사는 빨리 클로드와 사라를 보고 싶어 발을 동동거렸다.
“어서 만나러 가요, 아버지. 빨리요.”
“그래.”
일레온은 웃으며 한 손에는 일렉사를, 또 다른 한 손에는 페넬로아의 손을 잡고 온실로 들어갔다.
온실 안은 그야말로 신의 정원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푸르른 자연의 한 귀퉁이를 뚝 떼어 가져다 놓은 것만 같았다.
“밀런 소백작님은 어디 계시지?”
온실이 너무나 큰 탓에 페넬로아는 목을 쭉 빼며 사라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일렉사 또한 일레온의 품 안에서 상체를 앞으로 뻗으며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어, 저기!”
그때 일렉사가 저 멀리서 밝게 빛나는 백금발의 머리칼을 발견했다.
일레온과 페넬로아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일렉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럭무럭 자란 식물들 틈 사이로 드디어 암브로시아 식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사라를 부를 것처럼 입을 벌렸던 일렉사가 천천히 입술을 다물었다.
“…….”
사라는 흔들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반쯤 묶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옷에는 가벼운 숄을 걸친 상태였다.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그 곁을 에단과 클로드가 가만히 서서 지키며 사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일렉사가 불안한 듯 일레온을 불렀다.
“……아버지.”
“그래.”
일레온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미처 다가가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라가 깨어났다는 말이 거짓인 것처럼.
에단과 클로드에게서 흐르는 분위기는 아주 묵직했다.
축 늘어진 사라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는 에단의 모습은 애절하기까지 하였다.
클로드는 사라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불안을 감추지 못한 두 사람의 시선이 사라의 얼굴을 훑고 또 훑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여서 페넬로아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밀런 소백작님께서 다시 잘못되신 건…….”
그때였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페넬로아의 발치에 무언가 걸려 그녀의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페넬로아!”
놀란 일레온이 그녀를 부르며 손을 뻗어 잡아 주었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것을 뒤늦게 자각하곤 숨을 크게 삼켰다.
“……!”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는 압박감에 일레온 부부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새파랗게 빛나는 에단의 푸르른 눈과 음울하게 가라앉은 클로드의 녹안이 동시에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 3황자께서 오셨군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에단이 이내 예의를 차리듯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언제 그리 서슬 퍼런 눈빛을 쏘아 보냈냐는 양,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하였다.
“아, 암브로시아 공작…….”
그제야 3황자의 입술 사이로 깊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들을 감쌌던 그 압박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여기까지 오시게 해 송구합니다.”
에단은 전혀 송구하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선 여상스럽게 말했다.
일레온의 귓가에는 뭘 여기까지 굳이 찾아왔냐, 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잠시 환청을 털어 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무거운 입을 떼어 물었다.
“밀런 소백작은…….”
혹시 다시 잠들어 버린 건가, 라는 뒷말은 혀끝을 맴돌 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일레온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페넬로아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산책은 오랜만이라 조금 고단했던 모양입니다, 잠깐 잠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면 깨우겠습니다만…….”
에단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깨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을 서슬 퍼렇게 빛내면서도 예를 갖추어 말했다.
클로드 또한 유모를 깨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한껏 치켜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일레온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급히 찾아온 내 쪽이 무례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신다니, 굳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에단의 입꼬리가 그제야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애초에 그들을 위해 단잠에 빠진 사라를 깨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면서 뻔뻔하게 말하는 태도에 말문이 다 막혔다.
‘유난이다, 정말…….’
일레온은 저 부자의 완벽한 철통 방어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는 남몰래 혀를 내두르며 은근한 서러움에 페넬로아의 손을 꽉 쥐었다.
나도 내 편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으음…….”
그때 죽은 듯이 잠든 것처럼 보이던 사라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단과 클로드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고운 눈매를 타고 흐르는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그 안에 감추어졌던 푸르고 맑은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제가 또 잠들었었나요……?”
“응, 유모. 내가 꽃을 따 준다고 했는데 그사이에 잠들어 버리면 어떡해.”
“죄송해요, 클로드 님. 온실이 너무 따뜻해서 그랬나 봐요.”
“그래서 내가 유모 머리에 꽃 꽂아 줬어.”
“어머나.”
사라는 작게 투정을 부리는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에단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에단은 그런 사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눈부시게 웃었다.
“…….”
“…….”
일레온과 페넬로아, 그리고 일렉사는 자신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기색이 보이지 않는 듯한 세 사람을 보며 입을 벌렸다.
그때 미처 졸음기를 떨치지 못한 사라가 작게 하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겨우 그들을 발견하였다.
“아, 3황자 전하께서 오셨네요.”
사라는 미처 몰랐다는 듯 당황하여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깨워 주지 않으셨어요.”
“미안합니다.”
에단은 사라의 타박에 웃으며 대답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부축하였다.
그리고 그녀 몰래 은근히 미간을 좁히며 일레온을 바라보았다.
에단의 시선 끝에 따라붙은 의미는 아주 명확했다. 정말 서럽도록 노골적이었다.
“크롬벨 제국의 세 번째 광영,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단이 그러거나 말거나, 사라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가벼운 옷차림에 편한 숄을 걸친 모습이었지만, 어느 황궁의 연회에서 마주한 것처럼 격식 있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일레온은 사라의 다정한 환대가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으나, 뒤에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에단의 시선에 서둘러 두 손을 내저었다.
“폐하께서 계승권을 친히 거두셨으니 더 이상 크롬벨 제국의 광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밀런 소백작. 그리 예를 차리지 않아도…….”
“감히 그럴 수가 있을까요, 전쟁이 끝나면 이 제국을 비추는 진정한 광영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사라의 두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녀의 말은 마치 신의 목소리를 빌려 내려오는 신탁처럼, 그 어떠한 숙명을 예고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