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6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는 일레온을 보며 사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시선을 옆으로 돌려 그의 옆에서 흔들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페넬로아와 일렉사를 보았다.
“오랜만이에요, 페넬로아 님.”
“……흐윽.”
사라는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페넬로아의 눈에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페넬로아?”
그 울음소리에 당황한 일레온이 페넬로아를 불렀지만, 그녀는 어느새 그의 손을 뿌리치고 사라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밀런 소백작님!”
“앗!”
사라는 자신을 끌어안으며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페넬로아를 마주 안아 주었다.
“드디어,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허어엉. 저는, 밀런 소백작님에게 도움만 잔뜩 받은 주제에 아무것도 못 하고……. 저는……. 허어엉!”
체면이고 뭐고 페넬로아는 눈물, 콧물을 다 빼며 울어 버렸다.
마치 아이처럼 우는 페넬로아를 보며 옆에서 입술만 꾹 깨물던 일렉사까지 입술을 움찔움찔했다.
그러다가 이내 제 어미를 따라 크게 울었다.
“으아아아앙!”
“흐어어어엉!”
모자가 나란히 울음을 터트리는 걸 보고 일레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페넬로아, 그렇게 서러웠어? 나한테 말을 하지…….”
“니가 뭘 알아!”
“그래, 내가 뭘 모르긴 해. 그런데 페넬로아, 이왕 울 거면 나를 안고 울어 줬으면 좋겠는데…….”
“허어어어엉, 밀런 소백작니임.”
“응, 그래. 싫구나. 알았어.”
일레온은 페넬로아에게 벌렸던 팔을 어색하게 거두었다.
“우리 아들?”
그러곤 그 팔을 다시 일렉사를 향해 벌려 보았다.
“으아앙.”
“울지 마, 일렉사. 우리 유모 이제 괜찮아!”
하지만 일렉사도 클로드의 품에 안겨서 울 뿐, 일레온에게 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
일레온은 조금 외로워졌다.
* * *
페넬로아는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진정시키며 사라가 권하는 대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페넬로아는 저 멀리서 클로드와 함께 온실을 구경하고 있는 일렉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린 아들의 앞에서 이토록 서럽게 울었던 적도 처음이었다. 뒤늦은 민망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죄송해요, 못난 꼴을 보였네요.”
“괜찮아요. 익숙한 상황이라…….”
사라는 웃으며 페넬로아를 달래 주었다.
사실 사라가 깨어난 뒤로 울면서 달려드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론다, 베론, 메이, 벤야민과 벨루나, 제이드부터 기사단과 사용인들까지.
그녀만 보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우는 사람들을 달래는 덴 이미 이골이 나 있는 상태였다.
계속하다간 끝이 없으니 사라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제 안부도 확인하셨으니 바깥 상황 좀 알려 주세요. 페넬로아 님이 3황자 전하와 함께 활약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
“제국민들 사이에서 성녀라고 추앙받는다던데, 기분이 어떠세요?”
사라의 말에 페넬로아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3황자 일레온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크롬벨 제국민들과 함께 먹고 자며 그들을 보호하다 보니 붙여진 별명이었다.
물론 페넬로아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낭자하다는 뜻에서 정확히 ‘피의 성녀’라고 불렸지만, 사라는 가볍게 수식어 하나를 모른 체했다.
“이제 당당하게 일레온의 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페넬로아는 정말 성녀처럼 환히 웃었다. 일레온은 그런 페넬로아의 얼굴을 보며 체면도 잊은 채 실실 웃었다.
사라는 그런 두 사람의 정다운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물론 폐하께서는 진노하셨지만, 어쩌시겠어요. 버린 자식이 누굴 만나든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을 스스로 저버렸으니.”
“맞아요. 황후 폐하께서도 그 점에서 아주 기뻐하고 계셔요.”
“황후 폐하는 어찌 지내시나요?”
사라의 질문에 페넬로아 대신 일레온이 웃으며 답했다.
“늘 한결같으시죠.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들은 죄다 손에 쥐시고 절대 내어 주지 않고 계십니다.”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을 손에 넣으셨군요.”
사라의 말에 일레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후가 중립파 귀족들을 한데 모아 포섭에 성공한 것은 일레온도 어제 겨우 들은 소식이었다.
황실을 포위하듯이 좁혀 오는 대륙군 때문에 황후의 서신을 받아 보는 데에도 꽤 많은 희생을 치렀더랬다.
“오래 누워 계셨지만, 저보다도 황실 소식을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일레온의 말에 사라는 에단을 바라보며 웃었다.
“저는 공작님 곁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과연, 그렇군요.”
일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에게 다정한 미소를 돌려 주는 에단을 바라보았다.
크롬벨 제국의 모든 것은 에단 암브로시아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일레온이 이번에 사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라가 깨어났으니 에단 암브로시아의 철옹성 같은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졌을 테니, 그와 협상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그럼 저 또한 암브로시아 공작의 정보력에 기대어 봐도 되겠습니까.”
에단을 바라보는 일레온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더 진중해졌다.
사라는 오랜만에 오붓했던 시간을 방해받아 심기가 불편할 에단의 손을 은근히 쓸어 주며 재촉했다.
“공작님께서도 기쁘게 그 기대에 응해 주실 거예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심기가 상해 있던 에단에게 아주 훌륭한 처방이 되었다.
“확실하게, 황제는 지금 궁지에 몰렸습니다.”
에단이 입을 열자 일레온은 신중한 태도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명예를 아는 기사들은 이 전쟁의 명분이 대륙군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참전을 꺼려 하고, 귀족들이야 제 것을 쉽게 내어놓을 줄 모르는 자들 뿐이니. 황제에게는 쓸 만한 패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나마 황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던 2황자가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이제 와 3황자가 아쉬워졌다고 해도 황제는 결코 제가 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미친 듯이 에단 암브로시아를 찾는 것이었다. 암브로시아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대로 가다간 대륙군에 의해 황실이 몰락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요.”
하지만 에단은 그런 황제의 뜻에 놀아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암브로시아가 마물의 숲에서 겨울잠을 자는 동안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니 황실이 대륙군에 의해 몰락해 크롬벨에 더한 수치를 안겨 주기 전에 끝내고자 합니다.”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공작?”
“3황자 전하께서 손을 빌려주신다고 하면, 수월하게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그저 제국민들을 겨우 지켜 낼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륙군에게서 명분을 빼앗으면 그만입니다.”
“……!”
에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레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분을 가져올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일레온의 얼굴이 점차 환희로 물들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다.
흑마법사를 처단하겠다는 대륙군의 명분 때문에 귀족들은 이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명예롭지 않은 공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에단의 말에 일레온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버렸다.
“3황자 전하께서 황실의 반역자가 되어 주신다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지요.”
* * *
사라는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3황자와 에단을 두고 페넬로아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온실 한구석에서 놀고 있는 클로드와 일렉사에게 다가갔다.
“클로드 님. 우리는 다른 곳에 가서 놀아요.”
“유모!”
클로드가 환히 웃으며 사라의 품에 뛰어들었다.
사라는 클로드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전쟁 이야기는 너무 지루해서 클로드 님한테 도망 왔어요. 저랑 놀아 줄 거죠?”
“당연하지! 일렉사도 있으니까 더 재밌게 놀자.”
클로드는 두 뺨을 붉히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와의 놀이 시간을 유독 좋아하는 클로드였지만, 오늘은 일렉사까지 놀러 온 덕에 클로드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했다.
“일렉사 님도 이리로 오세요. 오랜만에 물놀이를 할까요?”
“좋아!”
사라는 클로드를 안지 않은 다른 쪽 팔을 일렉사에게 뻗었다.
일렉사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 사라의 품에 폴짝 뛰어들어 안겼다.
“하……, 너무 그리웠어. 이 느낌, 이 무게.”
사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아이 특유의 뽀송뽀송한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그 모습을 보던 페넬로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밀런 소백작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원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존재니까요. 하물며 우리 클로드 님과 일렉사 님의 귀여움은 말할 것도 없죠.”
귀여운 고양이와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동시에 내 품에 안겨 있다니.
박혜연의 몸에 있을 때 이 충족감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사라는 잠시 그때의 그리움을 상기하며 지금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기로 하였다.
“정말 여전하시네요.”
페넬로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라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곤 은근히 사라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공작님께서 밀런 소백작님의 뺨에 입을 맞추던데. 두 분 혹시…….”
“어머.”
사라는 깜짝 놀라 클로드와 일렉사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그러곤 클로드의 두 귀를 손으로 막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보셨어요?”
페넬로아는 얼결에 자신도 일렉사의 귀를 손으로 막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시던걸요.”
“아아, 정말! 아직 클로드 님은 모르시는데 공작님도 참. 조심성도 없이…….”
곤란하게 흐려진 사라의 얼굴을 보며 페넬로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암브로시아 공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페넬로아의 시선이 사라가 막은 귀를 떼어 내려고 용을 쓰는 클로드에게 향했다.
아까 전 암브로시아 공작이 사라의 뺨에 입을 맞출 때 클로드는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사라가 자신을 다시 돌아볼 때 못 본 척하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말이다.
“일단은 모른 척해 주세요. 클로드 님한테는 나중에 정식으로 청혼할 거란 말이에요.”
“청혼이요?”
“네, 저를 클로드 님의 엄마로 받아 달라는 청혼을 하려고 반지까지 준비했는데…….”
사라가 페넬로아와 비밀 이야기를 더 이어 가려고 할 때였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클로드가 기어코 자신의 귀를 막고 있는 사라의 두 손을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유모, 청혼이 뭐야?”
“……헉, 들으셨어요?”
사라의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는 기분에 그녀는 꿀꺽 침을 삼켰다.
“청혼이랑 반지까지 들었어.”
“그 앞은요?”
“거긴 유모가 귀를 막아서 못 들었잖아.”
불퉁한 클로드의 목소리에 사라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이렇게 볼품없게 클로드에게 청혼할 뻔했다.
“그런데 청혼이 뭐야?”
“그건…….”
사라가 안도하며 순진한 눈을 빛내며 물어 오는 클로드의 질문에 대답해 주려 할 때였다.
“아버지도 그거 한다던데. 좋은 거야?”
“……뭐라고요?”
페넬로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클로드의 입에서 대형 사건 하나가 스포일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