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87화 (187/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7화

페넬로아와 사라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오고 가는 눈빛만으로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공작님이 저한테 청혼할 건가 봐요!’

‘그런가 봐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환호하는 사라의 눈빛은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공작님이 정말 제게 청혼을 하신다고 했어요?”

“응! 아버지가 베론이랑 말하는 걸 들었어! 전쟁이 끝나면 그걸로 유모를 기쁘게 해 줄 거래.”

헉. 사라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감각에 귓불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끝나면 제국에서 제일 잘난 남자가 나한테 청혼을 한대요!

동네방네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사라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청혼이 그렇게 좋은 거야? 나도 그럼 유모한테 청혼해서 기쁘게 해 줄래!”

“클로드 님…….”

기쁨의 파도에서 헤엄치고 있던 사라는 감격에 겨운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암브로시아 특유의 저 밝고 부드러운 색채의 백금발을 찰랑이며 사랑스럽게 웃는 클로드에게서 빛이 났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도 클로드와 같은 백금발로 빛나는 머리칼을 멋지게 틀어 올린 채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건넬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끝나면 말이다!

“마탑에 연락해야겠어요, 빨리.”

사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페넬로아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그녀는 페넬로아의 손을 덥석 잡고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예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나요?”

“……네?”

“그 콧대 높은 귀족들이 페넬로아 님의 앞에서 개처럼 기어다니 게 해 드릴게요.”

사라의 눈빛은 이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전쟁이 얼마나 빠르게 정리되느냐에 그녀의 행복한 미래가 걸려 있었다.

“……훗.”

그 모습을 보며 클로드가 남몰래 눈을 번뜩이며 작게 웃었다.

“클로드?”

그걸 유일하게 목격한 것은 일렉사 하나뿐이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을 부르는 일렉사에게 클로드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

당최 무슨 상황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하는 일렉사의 손을 잡고 클로드는 사라에게 말했다.

“유모, 아버지도 오시라고 해서 같이 놀자고 해 볼게!”

“네? 공작님은 지금 3황자 전하와…….”

“한번 물어보기만 할게!”

사라에게 허락을 구하는 듯했지만 클로드는 이미 일렉사의 손을 잡고 에단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재빠르던지 클로드는 이미 잡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그렇게 사라를 뒤로하고 클로드는 그대로 에단에게 돌진했다.

그 걸음이 어찌나 빨랐던지, 일렉사는 무어라 해 보지도 못하고 클로드에게 끌려갔다.

“클로드, 뭐 하려고? 아버지랑 공작님은 나랏일을 하시니까 방해하면 안 된다고 어머니가 그랬는데…….”

“나랏일보다 이게 더 중요해, 나는!”

딱 잘라 말하는 클로드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나서지 않으면 언제 사라가 자신의 엄마가 되고, 아버지의 부인이 되겠는가.

‘두 분 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클로드는 예전에 도서관에서 메이가 보던 책을 몰래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 책에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앞에 방해꾼들이 나타났다.

방해꾼들은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여자이기도 했고,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 혹은 가족들이기도 했다.

그것들 때문에 갈등을 겪고 싸우고 난리를 치다가 남녀 주인공의 결혼은 아주아주 나중에서야 이뤄지게 된다.

“언제 그걸 다 기다려!”

클로드는 그 이야기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마음 통했으면 끝난 거지 뭘 질질 끈담.

결국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결혼하면서 끝날 걸 모두가 다 아는데 말이다.

여기서 더 질질 끌어 봤자 보는 사람만 지루하고 답답해서 목만 막힐 뿐이었다.

클로드는 하루빨리 사라와 아버지가 결혼했으면 했다.

그래야 공식적으로 사라의 완벽한 아이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

그렇게 클로드가 에단의 앞으로 가 우렁차게 그를 부르자 에단이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에단의 앞에서 혼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일레온도 마찬가지였다.

일레온은 어쩐지 에단과 잠깐 대화를 나누는 그 사이에 모든 기가 빨려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우.”

클로드는 자신만만하게 다가갔던 것과는 달리 일레온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게 뭐람.

“아버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일렉사는 그런 일레온이 걱정됐는지 쪼르르 제 아비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겼다.

“일렉사……, 아빠 큰일 난 것 같아. 네 엄마가 보고 싶어…….”

“어머니 부를까요? 근데 어머니도 바쁜데.”

“하아…….”

일레온은 작은 일렉사의 몸을 끌어안고 이내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의아한 듯 저 부자가 하는 행태를 바라보다가 이내 제 목적을 상기시켰다.

“저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음?”

에단은 그를 보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클로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뭐든 물어보거라.”

“청혼이 뭐예요?”

“……청혼?”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듯 에단은 눈을 크게 뜨며 아이의 말간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호기롭게 다가와서는 묻는다는 게 청혼이라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으응?”

클로드의 질문에 일렉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아까 전에도 물어봤었는데?’

왜 같은 것을 또 굳이 물어보나 싶어서 클로드를 부르려는 찰나, 클로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까 유모가 전쟁이 끝난 후에 청혼을 받는다면 아주 기쁠 거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

“그거 좋은 거예요? 좋은 거면 제가 유모한테 청혼을 줘서 기쁘게 해 주고 싶어요!”

아이의 순수함이 묻어나는 질문에 에단의 눈빛이 돌변했다.

“사라가 청혼을 받고 싶다고 했다고?”

“네!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엄청 기쁠 거라고 했어요.”

“전쟁이 끝난 뒤에?”

“맞아요! 그때가 딱 좋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

에단의 수려한 입매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며 그의 얼굴에 아주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해도 되는 건가, 청혼.’

그렇지 않아도 에단은 불안함에 매일 밤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치솟을 사라의 인기를 생각하면 도무지 두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수도에는 밀런 소백작이 알톤에서 죽은 마탑주더라, 하는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그런 사라가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부터 혼담이 말도 못 하게 밀려들 것이 분명했다.

‘결혼이라…….’

사라와의 결혼을 떠올린 에단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매일 밤을 함께 잠들고 매일 아침을 함께 시작할 것이다.

노골적인 소유욕도, 독점욕도. 남편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느 정도 허용될 테지.

요컨대, 합법적으로 사라에게 자신만을 봐 줄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고맙다, 클로드.”

“헤헤.”

에단은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이 클로드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몸을 답삭 안아 들었다.

그런 에단의 품에 안긴 클로드는 얼굴 만면에 띄우고 있던 순수한 낯빛을 지웠다.

아이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하고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마치 에단이 무언가를 꾸밀 때 희미하게 보이던 미소와 아주 흡사한 모양이었다.

그런 클로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에단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일레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이 전쟁을 끝내러 가셔야겠습니다, 3황자 전하.”

“바로 말입니까? 분명 아까는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작.”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에단은 클로드를 내려 준 뒤 몸을 일으켜 온실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갑니까?”

“전쟁을 마무리한 후에 대관식을 바로 진행하려면 시간이 모자랍니다. 바로 처리하셔야겠습니다.”

“…….”

일레온은 얼결에 일렉사를 품에서 내려놓은 뒤 서둘러 에단의 뒤에 따라붙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암브로시아 공작. 잠깐!”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

“벌써 폐하라 부르지 마세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클로드는 입이 찢어질 듯 환히 웃고 있었다.

일렉사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클로드를 보며 물었다.

“클로드……, 혹시 청혼이 뭔지 몰라?”

“응?”

“청혼은 결혼해 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거야. 반지를 주면서 말야.”

일렉사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것을 물어보는 클로드를 위해 자신의 배움을 나누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일렉사의 말에 픽 하고 웃으며 답했다.

“나도 알아.”

“……응? 그럼 왜 자꾸 청혼이 뭐냐고 물어봐?”

일렉사는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선 물었다.

그런 일렉사를 보며 클로드는 일말의 부러움을 느꼈다.

일렉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함께할 부모가 있으니 아마 클로드의 이런 노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날 이해하지 못해서 다행이야.”

“으응?”

일렉사는 여전히 클로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아이의 머리는 이제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결혼시킨다, 우리 아버지.”

야무지게 주먹을 쥐며 다짐하는 클로드의 목소리는 퍽 비장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