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화.
Prologue
호텔 라운지는 사람이 앉은 테이블이 드물 정도로 한산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연말 분위기로 북적이던 거리도 내용물 빠진 빈 상자처럼 휑하다. 무현은 모처럼만에 민낯을 보이는 도로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었다. 새해 첫날부터 맞선이라니. 한두 번 보는 맞선도 아닌데 새삼 의미가 부여된다. 왜 이러고 앉아 있어야 되냐고.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왜.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엉킨 머릿속이 매너도 잊고 냉소를 머금게 한다.
“실물을 보니까 이제야 실감나네요.”
“무슨 말입니까.”
무현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입술에 닿는 액체가 꽤 식어 있었다.
“차무현 씨가 맞선 본다는 거 루머인 줄 알았거든요.”
“불편합니까.”
“아뇨. 신기해서요. 연예인이 선봐서 결혼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잖아요.”
신선이라. 여자의 말에 주부의 뜻에 따라 구이도 되고 조림도 되는 싱싱 칸에 보관된 생선이 떠오른다.
다소 무료한 시선이 여자에게 닿았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화려한 옷차림.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다. 그동안 맞선을 보러 나온 여느 상대들과 다를 바 없이.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진취적이라고 해야 하나. 궁금한 게 많은 여자였다. 잔에 남은 액체를 비우면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저는 이 결혼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야말로 신선하네. 첫 만남에 애프터도 아니고 결혼? 서로의 이면은 전혀 모른 채 제3자가 전해 준 조건만 듣고 나온 자리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기업인의 막내딸,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고 했던가. 여자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게 다였다. 여자 또한 그의 사정과 다를 바 없을 거고. 결혼 상대를 찾는 자리는 맞지만 만난 지 겨우 10여 분. 무현의 목소리가 경솔하기 그지없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이나 건조해졌다.
“결혼, 급하십니까.”
“차무현 씨가 마음에 든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네요.”
배우 차무현이겠지. 빤한 대답에 무현의 입가에 쓴 미소가 얼핏 스치는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스캔들 없고, 학벌, 이미지 좋고. 알아볼 만큼 알아봤어요.”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 시간 낭비. 상대도 귀한 시간을 내서 나왔겠지 싶어 그나마 형식적으로 응대하던 것도 귀찮아졌다. 그런데 이 여자, 점입가경이다.
“결혼한 친구들이 설거지와 재활용 쓰레기는 남편 몫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사 분담. 나쁘지 않습니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여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공들여 다듬은 긴 손톱이. 결혼을 한다면 누군가를 노예로 부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여자는 도우미를 쓰면 썼지 본인 손에 물을 묻힐 타입으로 보이진 않았다.
“친구 같은 남편을 원해요. 취미도 공유하고 대화도 통하는 남자요.”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당신과는 감정과 육체를 섞고 싶지 않으니까.
“저한테 궁금한 건 없으세요?”
“없습니다.”
궁금한 게 있긴 하다. 손가락만 닿아도 인공미가 훼손될 것 같은 여자와 키스를 하게 된다면 완벽한 화장이 뭉개질 텐데, 키스 후엔 어떤 모습일지.
“결혼하면 집은 아무래도 강남 쪽이 편하겠죠?”
상대에게 혹시라도 관심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던가. 무현은 찻잔에 남은 액체를 말끔히 비웠다.
“부모님 모시고 살 생각입니다.”
내내 자신 있게 밀어붙이던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치 오답을 말한 분위기였다.
“사 대 독잡니다.”
쐐기를 박자 충격받은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이 볼만했다. 물론 결혼을 한다면 합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했다가는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갔다 오는 사태가 발생할 테니까.
미련이 남는지 여자가 다시 물어 왔다.
“전해 들은 말과 다른데 정말 부모님과 함께 살 생각인가요?”
“조부모님도 함께 사십니다.”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안 되는 서비스가 없는 나란데 신부 렌털 서비스라도 알아봐야 하나. 무현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다.
* * *
가볍게 짐을 챙긴 무현은 드레스 룸을 나왔다. 현관문이 해제되는 전자음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방문자를 확인하고 이내 경계를 허물어트렸다.
“왜 왔어?”
“대단하신 나의 배우님이 그런 문자를 보냈는데 어떻게 집에 있어?”
명절을 가족과 보내라고 기껏 생각해서 문자 메시지로 용건을 전달했건만, 부리나케 달려온 친구이자 매니저인 정우의 속셈이 빤히 보여 무현의 입술이 삐딱해진다.
“핑계는. 여기가 네 피난천 줄 알아?”
“죽겠는데 어떻게 해. 좀 봐줘. 멘붕이니까.”
“그러게 잘 좀 하지.”
졸지에 쌍둥이 아빠가 된 정후는 피곤에 절어 있다. 매니저인 그를 두고 무현이 운전대를 잡아야 할 정도로.
정우는 마른세수를 하고 피식 미소를 보였다.
“너무 잘해서 탈이었던 거지. 한 방에 투 스트라이크. 그거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자랑씩이나?”
“자랑으로 승화하는 내 심정도 헤아려 줘.”
정우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 나왔다. 그는 클럽에서 아내 애정을 만났다. 그날 밤 약속이라도 한 듯 호텔 룸을 잡았고 수만 볼트의 전류를 몇 번이나 맛보고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매너 좋게 해장국까지 먹고 헤어졌다. 그렇게 인연이 끝난 줄만 알았다. 두 달 후 애정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직도 저를 찾아와 흐느끼던 애정의 육성이 귓가에 생생하다.
「흑, 둘이라 양심상…….」
「두, 둘?」
「쌍둥이래. 혼자선 도저히 병원에, 흐흑.」
젠장. 하나면 양심을 팔아도 되냐. 정우는 자신이 백발백중 명사수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다. 알았다면 사격 선수가 됐겠지, 저 잘난 맛에 사는 차무현의 매니저가 됐을까. 다사다난한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범죄에 동참해 달라는 애정을 겨우 설득해 결국 결혼을 했다. 정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너 오늘 선보는 거 아니었어?”
“네 걱정이나 해.”
까칠한 표정이 이번에도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파에 널브러졌던 정우가 등을 세웠다.
“도대체 여자가 왜 싫어? 아니, 어떻게 싫을 수가 있어?”
“싫다고 한 적 없어.”
“그럼 왜 매번 심드렁한 건데? 결혼이 별건 줄 알아? 살면 다 살아져.”
“너처럼?”
조소 담긴 목소리에 정우는 할 말을 잃었다. 조언할 처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도 없고.
정우는 고개를 틀어 냉기를 풀풀 뿜는 무현의 긴 몸을 쭉 훑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헉, 소리가 날 만큼 잘났다. 빼어난 외모에 풍족한 집안, 머리까지 좋다. 무현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교수들이 단체로 말렸을 정도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의 표본. 어떤 분야든 관심만 가지면 단기간에 마스터를 하는 인간. 그런 무현을 보면서 친구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신은 공평했다. 차고 넘치는 경쟁력을 가진 무현에게도 피해 갈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을 주셨으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 몰라? 맞선 보기 싫으면 연애를 하든지.”
“누구와 할까.”
무심한 무현의 물음에 정우는 미간을 좁혔다. 톱스타인 무현이 여자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깔끔해도 너무 깔끔한 성격이 문제다.
“너 좋다는 여자가 한둘이야? 일단 만나.”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셔. 되면 베드신도 찍고.”
거기까지 말한 정우는 무현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라면 으레 음담패설에 동조의 눈빛은 보일 텐데 변함이 없었다.
“계속 해 봐.”
“후우, 연기는 어떻게 하냐? 그거 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일이니까.”
감정 없는 로봇 같은 대꾸에 정우는 질린 표정을 했다. 무현의 무채색 성격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했다. 그가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이번에는 실패를 할 거라고 친구들이 장담할 정도로. 웬걸, 다중 인격이 탑재된 인간이라는 걸 감지 못 했던 거다. 데뷔 초기엔 잘생긴 외모로 주목받더니 얼마 안 돼 ‘신들린 연기’라는 기사가 나가고 단기간에 톱 배우가 됐다. 정우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