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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2화 (2/56)

# 2

2화.

“세상 참 불공평해. 써먹지도 않는 잘난 몸은 나나 줄 것이지.”

“주면?”

“유용하게 쓰겠다는 거지. 밤낮으로.”

“쌍둥이들 아직 백일도 안 지났는데 혼자 키울 수 있겠어?”

무현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제수씨 전화번호가…….”라고 말하자 정우가 휴대폰을 잽싸게 낚아챘다. 한다면 하는 녀석이라 가슴이 철렁한다.

“야, 농담이지. 난 애정이 밖에 없다. 우리 토끼들하고.”

꼬리를 얼른 내리는 정우를 보고 무현은 슬쩍 입술을 늘렸다. 말은 가볍게 하지만 정 많고 악의 없는 녀석이다. 그러니 제가 저지른 일에 발뺌 않고 결혼을 감행했겠지만. 당연한 결정이라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묻고 싶다. 후회하지 않는지.

“스케줄 조정은?”

“가능은 한데, 도저히 못 버티겠어?”

당분간 시나리오를 받지 말라는 문자를 받았다. 설마 해서 달려왔는데 무현의 얼굴이 꽤 심각해 보인다.

“온 김에 지난번 말한 펜션 주소 문자로 남겨 줘.”

“할머니 성화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내 매니저의 능력을 믿어 보려고.”

정우는 못 한다고 버럭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머릿속으론 해외 광고 촬영을 떠올렸다. 옆에서 보는 사람도 숨이 막히는데 부대끼는 당사자는 오죽할까 싶어서.

“거기 볼 거라고는 산밖에 없는데 차라리 해외로 나가지 그래?”

무현은 대꾸 없이 보스턴백을 집어 들었다.

“제수씨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전해 줘.”

곧 어머님이 들이닥치실 거라는 말을 덧붙이자 정우가 후다닥 일어선다.

* * *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판 아래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이 길었다. 대합실 안, 온풍기 주변도 마찬가지. 매점에서 나오던 향기는 휴가철이나 돼야 북적이던 곳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뭐 하고 있어?”

“사람 구경.”

멍한 눈빛을 하던 향기가 간식거리가 담긴 검은색 비닐 봉투를 친구 은주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면서 먹어.”

“몇 시간이나 간다고. 얼굴이나 좀 펴시지?”

샐샐거리는 은주를 보고 향기는 어림없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방학이라고 고향을 찾아 놓고 며칠 되지 않아 서울로 올라가는 친구가 야속해서 웃는 낯을 할 수 없었다.

은주가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가기 싫거든? 취업 준비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가는 거지.”

“서울에서 취직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 스펙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어. 거기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친구의 푸념에 서운한 마음이 걱정으로 바뀐다. 향기는 새침하게 떴던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말했다.

“신정이나 보내고 가지. 냉동실에 양고기도 있고, 오리도 잡아 줄 건데.”

“너, 내가 그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못 먹고 가는 나는 어떻겠어?”

윤기가 쫘르르 흐르는 향기표 숯불구이도, 한겨울 밤에 별을 헤아리며 둘이 떠는 수다도, 아쉽긴 은주도 마찬가지다. 이번 귀향 기간엔 이상하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날 틈이 없었다.

“넌 너무 세상 물정을 몰라. 스펙 쌓으랴, 알바 하랴. 대학은 왜 갔는지 모르겠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은주가 돌연 사나운 눈빛을 했다.

“지금 내 얘기 할 때야?”

“왜?”

“왜에?”

전혀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뜬 향기를 보며 은주가 눈을 부릅떴다.

“정말 결혼할 거야?”

“아, 그거.”

“아, 그거어?”

남의 일처럼 속없이 웃는 향기 때문에 은주는 더 속이 탔다. 해가 바뀌어 스물셋.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만으로 스물하나다. 그런 애한테 결혼이라니. 어제 저녁에 엄마에게 향기가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사실이냐고 전화로 물었더니 지금과 똑같은 반응. 오히려 펄쩍 뛴 건 은주 저였다.

“너희 할아버지는 왜 그러셔?”

“걱정되니까 그러시지.”

“너 또 할아버지한테 헤헤거리고 웃었지?”

“그럼 웃지 울어?”

“바보야, 단호하게 못 해요, 했어야지. 물렁하게 굴지 말고.”

“결혼이 뭐 대수라고.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거지.”

너무 어이없는 말이라 은주는 입술을 벙긋대다 발끈했다.

“연애도 한 번 못 해 본 주제에 무슨 결혼이야?”

이성을 동성의 반대말쯤으로 아는 모태 솔로. 어디가 모자란다면 이해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은주는 열이 식지 않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울 오고 싶다고 했던 말은 뭐야?”

“어?”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아. 그날은 아침에 일어났더니 바람이 서울로 불어서 그런 거야.”

어느새 향기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뜬금없는 전화를 받고 가슴 철렁했던 사람 무색해지게. 걱정하는 마음도 몰라주고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가는 향기가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다. 여자가 봐도 보호해 주고 싶게 생긴 향기였다. 속은 다르지만.

“능구렁이! 빨리 불어. 무슨 일인데?”

“버스 들어왔다. 나가자.”

“정말 대답 안 할 거야?”

“안 갈 거야?”

은주는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들고 앞서 걷는 향기를 뒤따랐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자 볼이 터질 것처럼 바람이 차가웠다. 향기는 은주의 손에 가방을 들려 주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밥 잘 먹고.”

전화로 얘기하자며 은주를 달래서 버스에 태웠다. 친구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고도 향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Chapter. 1

차창 밖으로 새하얀 세상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누군가의 입에서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인데 향기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도 마찬가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하늘의 음영이 뚜렷이 갈려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며 이국적 정서가 느껴진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리에 가 본 적 없는 향기는 그곳도 어지간히 촌구석이거나 어촌일 거라 짐작할 뿐이다.

끼이익!

누군가 또 버스를 세웠는지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미안합니다. 허허허.”

걸걸한 기사의 말에 웅성대던 사람들은 짐과 몸을 추스르고 이내 잠잠해진다.

하루에 다섯 차례 운행이 예정돼 있는 시골 버스. 혹한기엔 언제 눈이 쏟아질지 몰라 다음 차편은 기약이 없다. 다들 사정을 알기에 무리해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기사나 버스를 세우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

뒷좌석에 앉은 향기는 어르신들을 살피고 버스에 오르는 이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가 외국인 줄 아나. 어디서 히치하이킹이야.’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뒤쪽으로 와 떠들기 시작했다.

“우와! 그림 죽인다. 미세 먼지에 찌든 영혼이 씻기는 것 같지 않아?”

“이런 곳에서 살면 걱정 근심이 없겠다.”

취업 경쟁도 없을 거고 신경 쓸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누군가가 맞장구를 친다.

“저게 말로만 듣던 서리꽃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게 늘어선 가로수. 가지마다 눈송이가 벚꽃처럼 매달려서 장관을 이룬다.

“알프스가 따로 없다.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아. 끝내줘.”

“야간에 서쪽으로 올라가서 정상 찍고 해맞이하면서 백패킹하면 죽이겠지?”

백패킹이라는 말에 향기가 기어이 눈을 홉떴다.

‘죽이는 게 아니라 죽겠지!’

실족사를 당해 봐야 산 무서운 줄 알려나. 그리고 한국 땅에서 알프스는 왜 찾아? 여기가 알프스면 난 하이디겠다. 늙어 가는 하이디.

그러나 속엣말도 잠시. 이곳을 찾는 이들의 한결같은 반응인데 오늘따라 뾰족하게 구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향기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입김을 불었다. 뽀얗게 김 서린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겼다.

[살아 보고나 말하던지!!!]

버스에서 내린 향기가 여운이 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분이 날아가 뽀득, 소리가 나는 눈을 야무지게 밟아 보지만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는다.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그런가. 이곳에서 태어나 한 번도 외지로 나가 본 적 없는 그녀. 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할머니 때문에 심지어 수학여행도 가 보지 못했다. 가끔은, 정말 가끔, 이런 날이면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부럽다.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떠난 친구들도.

폭폭, 옥수수를 삶는 솥단지처럼 향기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오르막을 오르려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멀뚱히 전방을 주시했다. 부릉부릉.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떡하니 길을 막고 있었다.

“힘 빼지 말라고 알려 줄까.”

평소라면 차로 올라가는 데 문제없는 비탈길이다. 하지만 연이은 폭설로 눈이 녹고 얼길 반복하면서 이미 빙판이 된 지 오래였다. 차를 두고 올라갈 거면 서두르는 게 좋은데. 망설이던 향기는 이내 포기했다.

“알아서 올라가겠지.”

그녀의 동네는 숨은 맛집 같은 곳이다. 유명한 산은 아닌데 산세가 아름답고 물 맑은 깊은 계곡이 많다. 그래서인지 한 번 와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외지인이 제법 많이 찾아온다.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민박을 하거나 펜션을 해서 먹고 사는 집이 꽤 되었다. 마을 발전을 위해서라도 외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편인데 오늘은 만사가 다 귀찮았다.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나 생각하는데 자동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향기의 눈이 신기한 것을 본 듯 커다래졌다.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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