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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3화 (3/56)

# 3

3화.

이 동네 남자들의 주 패션인 똑같은 등산복을 입었는데 남자는 얼핏 봐도 뭔가 달랐다. 마치 모델처럼. 기다란 키에 자체 발광 외모. 걷는 모습까지 귀족스럽다. 한창 정신을 팔고 있는데 남자가 눈 덮인 길을 발로 헤치더니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아주 미련한 사람은 아닌가 보네.”

향기는 감상을 접고 잔뜩 눈을 숨긴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현은 바퀴가 헛돌며 차가 뒤로 밀리자 차에서 내렸다. 이 구간을 어찌 올라간다 해도 멀찍이 이어진 경사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정우가 알려 준 펜션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거로 나오는데 어쩐다. 그가 눈 덮인 길을 발로 헤집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눈 속에 빙판이 숨어 있었다.

그가 한숨을 뱉을 때였다. 에스키모처럼 온몸을 꽁꽁 싸맨 작은 체구의 여자가 그의 옆을 스치며 중얼거렸다.

“생각 잘하셨어요. 곧 눈이 올 거예요.”

“……?”

“주차는 저기. 해 떨어지기 전에 서두르세요.”

무현은 순식간에 비탈길을 오르며 멀어지는 여자를 무감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시골 인심인가.”

여자가 가리키던 곳을 바라보았다. 마을 회관? 한 번 더 비탈길을 올려다보던 그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차에 올랐다.

“눈은 무슨…….”

* * *

우우우, 우우우…….

칠흑 같은 어둠이 모든 걸 삼켰다. 플래시 라이트를 이용한 탓에 배터리가 다 된 휴대전화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무현은 더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어이없게도 길을 잃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다고 발목까지 접질렸다. 뼈가 잘못된 것 같진 않은데 점점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거기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생수 한 통과 쓴 커피. 허기가 몰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무현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졌다.

“젠장.”

왜 이렇게 됐을까. 마을 회관에 차를 주차하고 한참을 올라왔다. 갈림길에 들어서는데 멀쩡했던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설산에 석양이 깔리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탁 트인 시야, 청량한 공기와 소음 없는 고요, 모든 게 선물 같았다. 스케줄에 쫓기지 않고 오랜만에 가져 보는 개인 시간. 바쁠 것 없기에 펜션 쪽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었던 게 실수였다. 머릿속의 번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산을 오르며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둠이 내려앉는 건 순식간이었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인 데다 도시와 달리 산악 지대의 밤은 칠흑 같기만 했다. 하산을 서둘렀을 땐 겹겹의 눈이 덮인 지형에 다시 눈이 덮여 길을 찾기 힘들었다. 갈림길을 찾느라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결국 방향감각을 잃고 발을 헛디딘 거다.

무현은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몸을 비벼 보지만 온기를 잃어 감각이 무뎌진 탓인지 느낌이 없다. 이성은 움직이라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걸음을 떼려던 무현은 주저앉고 말았다.

“하…….”

길을 떠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이곳 주민의 말에 귀만 기울였어도. 기상청에서는 눈이 온다는 예보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곳 주민의 말을 흘려들었다. 어느 누가 과학적 근거를 뒷받침하는 일기 예보를 믿지, 무릎이 쑤셔서 비가 올 거라는 노인의 말을 믿을까.

이대로 죽는 건가. 에베레스트 산도 아니고 유명세도 없는 이름 모를 산을 헤매다 동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면……. 절박한 상황인데 떠올리는 생각이 어이없어 입가에 쓴 미소가 걸린다.

“아직 살 만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하는 데까지 해 봐야 한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보스턴백을 내려놓았다. 가방에 든 거라고는 노트북과 추리닝과 책 몇 권.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해야 했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는데 쉬익! 바람이 거세지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뭉텅이로 후드득, 떨어졌다.

젠장.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 내고 발을 끌던 무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불빛, 저 멀리서 신기루처럼 불빛이 보였다.

“착시인가…….”

* * *

설거지를 하던 향기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다 멈칫하곤 중얼거렸다.

“꼭 도둑고양이 같다니까.”

주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사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하얀 솜뭉치가 던져지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건 처마 물받이를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로 알 수 있는데 눈의 방문은 보고 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지난번 폭설에 고립됐던 것도 잠든 사이에 눈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가스도 미리 시켜 놨고, 라면, 휴지도 있고…….”

머릿속에 미리 시켜 둔 생필품이 휙휙 지나가고서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설거지 뒷마무리로 행주를 빨아 널고 가스 불에 커피 물을 올렸다. 부엌 창을 열고 향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할아버지 커피 드세요!”

커피를 숭늉처럼 한 대접씩 마시는 할아버지 성철이었다. 건강이 걱정되지만 유일한 주전부리라 식사 후엔 어쩔 수없이 커피를 타 드린다.

테이블에 뜨거운 모과차와 커피를 올려놓자 나무로 만든 현관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신발장 위에 걸린 수건을 들어 옷에 묻은 눈을 털어 내며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뒷마당에도 불 켰어?”

“누구 분부시라고요.”

입을 삐죽이면서도 향기의 목소리는 밝았다. 바다를 지키는 등대처럼 향기의 집 주변은 365일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길을 잃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지만 이런 날 누가 산행을 한다고 불을 켜라는 건지.

향기의 속을 훤히 꿰뚫기라도 한 듯 성철은 커피 잔을 들어 후후 불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속으로 지금 할아비 흉보는 게지?”

“조금. 아주 조금만 봤어요. 헤헤.”

애교 부리는 향기를 바라보는 성철의 눈빛이 아련해진다. 어쩜 저리도 닮았을까. 커 갈수록 향기는 딸의 판박이다. 곱게 접히는 눈매하며, 가녀린 작은 체구에 바지런한 것까지.

“현수 한 번 만나 봐.”

“할아버지, 혹시 나 모르게 어디 아파요?”

“아프긴.”

“그럼 왜 그래요?”

“허, 할아비가 언제까지 건강할 줄 알고.”

가을날 더위와 노인네 근력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말하며 성철은 은근히 속을 드러냈다. 건강하다고 해도 그의 나이 팔순이다. 손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향기는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는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년 건강 검진을 빼놓지 않고 받는 할아버지였다. 여태껏 이상 소견은 없었는데 부쩍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할아버지, 정말 내가 결혼하는 게 소원이에요?”

“그래. 그리고 현수만 한 녀석도 없잖아? 똑똑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됐고.”

향기는 입술을 떼지 못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작년부터 나온 얘기였다. 반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는데 아예 신랑감 물색에 나서니 더는 농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할아버진 내가 몇 살인 줄은 알아요?”

“네 할머니는 나한테 열여덟에 시집왔어. 그에 비하면 넌 늦었지.”

“또 옛날 고리짝 얘기.”

“어허.”

성철도 마음이 편치 않아 헛기침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향기를 어린 나이에 결혼시키는 건 그도 싫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의지할 곳 없는 손녀다. 요즘은 향기 걱정에 노심초사, 새벽잠이 더 없어졌다. 살아생전 짝이라도 찾아 주고 떠나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결론이다.

“너 시집보내고 가야 네 할미한테 구박을 안 받지. 현수 놓치면 총각도 없어 인석아. 여기가 도시도 아니고.”

여자든 남자든 젊은 사람이 귀한 시골. 걱정하는 할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현수의 집에서 바짝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조건이 좋아도 시골로 시집오겠다는 여자가 흔치 않다. 그래서 이곳엔 다문화 가정이 많다. 이름만 총각인 아재들이 결혼 시기를 놓치고 국제결혼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소원이라는데 결혼? 하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다른 뜻이 생긴 향기의 입은 무겁기만 하다.

향기의 눈치를 보던 성철이 다시 입을 뗐다.

“현수가 영 아니야?”

대답 대신 미소를 보이는 향기 때문에 성철의 얼굴에 주름이 더해진다.

“영 아니면 이천 박 영감이 문하생 중에 좋은 녀석 있다는데 만나 볼래?”

이천에서 도예를 하고 있는 벗이 작년 여름휴가 때 놀러 왔었다. 서로 사정을 아는 처지라 남 주기 아까운 녀석이 있다며 생각 있냐고 묻는데 손녀를 멀리 보내기 싫어 귀를 닫았었다.

향기가 놀란 눈을 했다.

“그럼 이천 가서 살아야 하는데 괜찮아요?”

“흠흠……. 사람만 괜찮다면야 어디서 살면 어때. 한 번 오라고 할까?”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성철을 보고 향기는 빙긋이 미소를 보였다.

“할아버지 혼자 어떻게 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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