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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4화 (4/56)

# 4

4화.

“할아버지 혼자 어떻게 살려고요?”

“너 시집가면 마을로 내려가면 돼. 관광도 다니고.”

“에이. 작은할머니 싫어하시면서…….”

성철의 말에 향기가 곱게 눈을 흘겼다. 마을에도 할아버지의 집이 있다. 작은할아버지 가족이 살고 있어서 그렇지.

성철이 혀를 찼다.

“다른 녀석들은 연애도 잘하던데 넌 어째…….”

향기의 눈꺼풀이 열렸다 닫힌다. 할머니 성화에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도 간신히 나온 그녀다. 아마도 할머니가 가르칠 능력이 됐다면 홈스쿨링을 해서 향기를 집에 묶어 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애라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이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녀에겐 생소한 얘기다.

“그래서 맨날 읍내에 나가라고 한 거예요?”

“사람을 만나야 연애든 뭐든 할 거 아니야?”

“우와. 그렇게 깊은 뜻이?”

아무나 데려오면 되냐고 배시시 웃자 성철이 “내 눈에 들어야지.” 하며 헛기침을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향기가 무릎을 탁, 쳤다.

“까짓 거 할아버지 소원이면 한다, 해. 결혼.”

“건성으로 대답 말고 인석아. 심각하게 생각해 봐. 네 작은할아버지도 미덥지 않아서 그래.”

성철에겐 없느니만 못한 동생이 하나 있다. 부부가 어찌나 욕심 많은지 그가 떠나면 마음 약한 손녀에게 누가 될까 더 염려된다.

커피 잔을 비운 성철이 일어서자 향기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이 밤에 가 보시게요?”

“눈 오는 게 심상치 않아. 먹을 거나 쟁여 놨는지.”

“날 밝으면 가세요. 눈이 너무 와서 위험하잖아요.”

“할아비를 뭘로 보고.”

할아버지는 산악 구조 요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명예 구조 요원인 성철은 지금도 간간이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

“문단속 잘하고. 개들 풀어놨다.”

“반찬 좀 챙길까요?”

“다 챙겨 놨어.”

성철은 망설이다 “너도 같이 갈래?”라고 물었다.

“저 애 아니에요. 장군이나 데려가세요.”

“아무래도 올해를 못 넘기지 싶어. 후우.”

향기의 말에 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향기에게 힘들어하는 벗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다 홀연히 나타난 벗이 혼자 투병 중이다. 나이가 있으니 병원에서도 손을 놓은 상태. 이곳으로 내려와 같이 지내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안 들여다볼 수가 없다. 평소엔 낮에 움직이는데 아무래도 눈발이 심상치 않았다.

향기는 배낭을 둘러메고 현관을 나서는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장작을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벽난로에 나무를 넣자 타닥타닥 불꽃이 콩 굽듯이 튄다. 오늘도 서울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정말 방법이 없나…….”

한숨을 쉬던 향기는 방에서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녀가 기어이 기타를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쟤들이 왜 저러지.”

할아버지가 훈련시킨 애들은 지역 신문에도 자주 소개되는 명견들이다. 허투루 짖는 법이 없는데 아까부터 끙끙거리는 게 이상했다.

밤도 늦은 데다 이런 날씨에 죽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사람일 리는 없고. 고라니나 멧돼지라도 나타난 건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걱정은 없지만 신경이 쓰인다.

현관문까지 긁으며 짖자 향기는 발딱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자꾸 왜에?”

현관문을 열자 놀랄 틈도 없이 찬바람과 함께 커다란 검은 물체가 그녀를 덮쳤다.

헉!

* * *

향기는 겨우 남자를 눕혀 놓고 숨을 골랐다. 날벼락이 따로 없다. 훈련된 개들이 자연스럽게 남자를 핥으며 몸에 착 달라붙어 온기를 나누어 준다.

“미안, 누나가 생각이 짧았어.”

개들이 현관 앞까지 낯선 사람이 접근하게 둔 이유가 있었던 건데. 남자를 살피던 향기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엘프?”

집으로 올라올 때 봤던 남자였다. 펜션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도 그런 걸까. 남자를 봤던 게 초저녁도 되기 전이었다. 이 시간까지 산속을 헤맸다면…….

“양심 찔리게스리.”

할아버지에게 연락하면 눈길을 뚫고 달려오실 게 빤해 고개가 붕붕 저어진다. 어찌됐던 제 발로 걸어서 이곳까지 온 남자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우선은 남자의 상태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개도 서당에서 삼 년 구르면 풍월을 읊는데 넌 사람이잖아. 침착해, 향기야.”

사람들을 구조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자랐고 실전 경험도 있다. 생각을 정리한 향기는 가스 불에 물부터 올리고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당겨!”

현관 입구에 러그를 깔아 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개들과 힘을 합쳐 러그를 끌자 날카로운 이빨에 호피 무늬 러그가 북북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끼는 건데…….”

앞다리를 낮추고 엉덩이를 한껏 치켜든 개들이 향기의 신호에 맞춰 힘을 쓰자 남자를 벽난로 앞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다행히 남자의 옷은 젖어만 있고 찢긴 곳 없이 멀쩡했다. 넘어지거나 부딪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향기는 옷을 벗기려다 포기하고 주방에서 가위를 들고 왔다. 남자를 움직이기엔 너무 컸다. 신발을 벗기고 양말을 벗기다 멈칫했다. 발목이 많이 부어 있었다.

“뭐야, 정말 죽을 뻔했잖아.”

부은 상태로 봐서는 접질린 것 같은데.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을 뺨에 대 온도를 보고 남자의 발목에 두른 뒤 베개를 다리 밑에 받쳐 주었다. 그리고 바짓단에 가위를 넣어 자르기 시작했다. 바지를 가르자 바로 맨살이 드러나 향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하 10도만 돼도 동상에 걸릴 확률이 100퍼센트. 영하 20도 추위를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버틴 걸까.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네.”

한겨울에 속옷 위에 달랑 등산복만 입고 산행을 하다니. 향기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잠시 후, 향기는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어떡하지…….”

남자의 속옷을 자르자니 망설여진다. 몸은 얼음처럼 차가운데 그곳이라고 다를까. 가장 예민한 곳인데 동상에라도 걸린다면. 고개가 붕붕 저어진다. 내 것은 아니지만 남의 것도 소중한 거니까. 향기는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단호하게 수영복처럼 몸에 달라붙은 속옷을 들추고 가위를 집어넣었다.

사각사각.

심장이 두근두근, 손끝은 바들바들 떨린다.

“아저씨, 난 절대 안 봤어요. 볼 생각도 없다고요.”

혼자 종알거리는 향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겨우겨우 탄성 좋은 천 조각이 떨어져 나오자 그걸 휙 저 멀리로 날리고는 얼른 이불을 덮어 주었다.

“후우.”

향기는 커다란 짐을 덜어 낸 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 쉴 새 없이 끓인 물에 수건을 적셔 남자의 몸을 닦아 주었다. 남자의 중요한 부위 위엔 메밀 속이 든 묵직한 베개를 올려 주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벗은 남자의 몸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매년 여름이면 특히 산간 지역의 계곡은 순식간에 물이 불어난다. 쏟아붓는 비에 물살이 빨라지면 무서울 정도다. 입수는 해서도 안 되고 꿈을 꿔서도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놀이 금지’라는 경고 팻말을 붙여 놓아도 알아서 해석한다. 괜찮겠지 하고. 황색 불이 들어오면 자동차 속력을 더 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듯이.

할아버지는 비만 오면 순찰을 돌고 향기는 열에 아홉 번은 따라 나선다. 그날도 사람들이 고립되기 쉬운 곳을 돌고 있었다. “사람 살려!”라는 비명을 듣고 달려가자 물살에 휩쓸린 사람들이 나뭇가지처럼 바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때 남자의 벗은 몸을 처음 봤다. 수영복 대신 입은 반바지가 물살에 벗겨졌던 것이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 구조하는 사람이나 조난자나 부끄러움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개미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결연했다.

‘향기야, 저건 남자가 아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일 뿐이야.’

로프를 나무에 묶고 할아버지를 도와 네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얼결에 못 볼 꼴을 많이 봐 온 셈이다.

향기는 눈을 꼭 감고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체온을 올리는 데는 스킨십이 최고다. 상태도 모르고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뜨거운 전열 기구를 올릴 수는 없었다.

차가운 몸을 주무르고 비비며 자기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이건 일종의, 그러니까 의료 행위예요. 의료 행위 알죠?”

남자의 맨몸을 보기만 하는 것과 만지는 건 차원이 달랐다.

무슨 남자 피부가 이렇게 보드라워? 끙.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열기와 노동에 지친 향기의 몸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향기는 동상에 걸리기 쉬운 예민한 곳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괴저가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우와.”

겁나 잘생겼다. 우뚝 솟은 콧날과 길쭉한 눈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향기는 얼른 설탕물을 만들어 와 거즈에 묻혀 남자의 입술을 닦아 주며 한 방울씩 떨어트렸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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