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6화 (6/56)

# 6

6화.

“네?”

“좀 비키라고.”

내가 병균이야? 왜 저래? 향기는 남자가 무척 신기했다. 밤새 비비고 주물러서 살려 놨더니 비키란다. 저를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가 좇으라는 듯 움직여 거실 한쪽을 가리켰다.

“저게……?”

설마 내 옷?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조각조각 잘려 수북이 쌓여 있는 천 조각은 분명 그가 입고 온 옷이었다. 무현의 목소리가 눈빛만큼이나 서늘해졌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짓이요?”

다른 사람들은 정신이 들면 고맙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먼저 묻는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답도 준비해 뒀다. “뭘요, 천만다행이에요.”라고.

그런데 감사하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옷을 찢었다고 화를 내? 사람 목숨 구하는 일은 천명(天命)이라고 듣고 자랐다. 생색 낼 일이 절대 아니라고. 그랬기에 살아나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상식이 없는 사람인가? 향기는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뭐라는 거야?”

“아니, 뭐……. 별말 안 했어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됐잖아. 뇌가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해서 그러는 거겠지. 그런 사람에게 뭘 바라? 생각을 정리하자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은 무뎌진다.

“그러니까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요.”

옷을 찢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불퉁한 목소리로 대충 말해 줬다. 무현은 향기의 이야기가 끝나자 깊게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사례를 할게.”

이 아저씨가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네. 향기의 눈에 장난기가 서렸다.

“아, 이런 게 ‘얼마면 되겠어?’예요? 맞죠?”

“뭐?”

무현은 눈을 홉뜨고 재미있는 얘기라도 들은 듯 되묻는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겪어 보니 신기해서요.”

“무슨 소리지?”

자본주의 어쩌고저쩌고, 여자가 작게 웅얼거리는 걸 들으려는 무현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그런 그를 보고 향기가 체념하듯 말했다.

“다른 할 말은 없어요?”

사례를 하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할아버지는 한 번도 대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면 족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제가 원하는 말을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싹수없는 사람과 겨뤄서 뭐 해. 정신 말짱하고 착한 내가 이해해야지. 향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례는 필요 없어요.”

“돈이든 뭐든, 원하는 걸 말해.”

봐주고 넘어가려는데 남자가 하는 말마다 신경을 긁자 향기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인성이 저렴한 건 알겠는데 몸값은 얼마나 할까,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직접 물어볼 수밖에.

“얼만데요?”

“뭐가?”

“아저씨 목숨값이요.”

당돌한 질문에 무현은 할 말을 잃었고 향기는 생글거렸다.

“좋아요. 아저씨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제가 가르쳐 줄게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미쳤다는 건가.

“사례는 됐고요. 고맙다고 말해 봐요.”

여자의 말에 무현이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해야 할 인사를 하지 못했다. 핑계를 대자면 여자 혼자 그를 구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퍼붓는 잔소리 때문에 정신도 없었다.

“그래서 사례하겠다잖아.”

불퉁한 남자의 목소리에 향기의 눈꼬리가 위로 솟았다.

“아저씨 돈 많아요? 한두 푼 가지고 안 될 텐데요?”

“하.”

“그 덩치로 덮쳐서 내 몸이 지금 말이 아니거든요.”

그녀의 말에 무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 *

“내가? 널? 덮쳤다고?”

“덮치기만 했는지 알아요? 아저씨 엄청 큰 건 알고 있죠?”

할아버지도 옛날 분치고는 큰 키였다. 그런데 남자는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컸다. 190센티는 족히 될 것 같은. 그런 남자를 닦고 체온을 올리느라 집 안에 있는 수건을 다 적시고 온몸을 골고루 주무르느라 손가락이 다 부었다. 평소라면 절대 생색 낼 일이 아닌데 남자는 욕을 부르는 타입 같았다.

“아무튼 닦고 비비고 주무르느라 힘들었는데 얼마를 받을까요?”

“…….”

덮쳤다, 크다, 닦고 비비고 주물렀다. 맞는 말들인데 뉘앙스가 묘했다. 무현은 쌈닭처럼 저를 노려보는 여자를 보고 입매를 굳혔다. 세상에 없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하는 말마다 신경을 깔짝여서. 그리고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 대한민국에서 그를 몰라보는 사람이 있을까. 동영상이라도 찍었다면? 무현이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 봐.”

“아저씨 거요?”

“네 것.”

향기는 눈을 껌뻑이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제 휴대전화를 가져다주었다. 남자의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됐는지 전원이 꺼져 있었다. 맞는 충전기가 없어서 충전을 해 주지 못했기에 빌려 달라는 말로 해석했다.

무현은 휴대폰을 받고 하, 소리를 냈다. 비밀번호도 걸려 있지 않은 휴대폰은 놀랍게도 초등학생도 쓰지 않는 2G 피처폰. 폴더를 다 확인해도 사진이나 동영상은 없었다. 무현이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나 몰라?”

“아저씨가 누군데요?”

향기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그녀의 휴대폰을 샅샅이 뒤지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의 전화기를 가지고 왜 요상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정말 몰라?”

“대단한 사람이에요?”

“집에 TV 없어?”

“없는데요.”

그녀의 말에 무현의 눈썹이 균형을 잃었다. 정말 산골 오지가 맞나 보다. TV 없는 집이 있다니. 그래도 그렇지 광고에 수시로 나오는 얼굴도 몰라? 의심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굳이 옷을 찢어야 했어? 벗길 수도 있었잖아?”

“목숨보다 옷에 미련이 많은 사람은 처음 보네. 쳇.”

그녀의 혼잣말에 불꽃이 튈 듯 두 사람의 눈동자가 오래도록 부딪쳤다.

“도대체 얼마짜리 옷인데 그래요?”

“…….”

“혹시 세탁소에서 빌린 거예요? 그, 그럼 물어 줄게요.”

향기는 여전히 말이 없는 남자를 보고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흠칫했다. 눈을 내리깐 향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차, 창피해서 그러는 거면 괜찮아요.”

미쳤어. 중얼거리는 향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아저씬 그냥 사람이니까요.”

“무슨 소리야?”

“남자 아니고 사·람·이라고요.”

향기는 발딱 몸을 일으켜 방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속옷과 겉옷을 챙기던 그녀가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옷부터 줬어야지!”

남자의 몸 상태가 괜찮은지가 먼저였다. 확인 후에는 서늘하게 구는 남자가 얄미워 옥신각신. 남자가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던 거다.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향기가 중얼거렸다.

“쳇, 나도 민망했거든요! 누가 약 올리래요?”

그래도 사람 의심이나 하고. 제 휴대폰을 확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참아 준 건 남자가 길을 잃은 게 제 책임 같아서였다. 제대로 이곳 사정을 알려 줬더라면, 하는 후회. 그리고 질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변태 취급하고 있어.”

간혹 살려 놓으면 능글맞게 구는 남자도 더러 있었다. 강남이도 있겠다, 그런 행동을 하면 당장 내쫓으려고 했는데 남자는 오히려 향기를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여자라도 되는 양 이불을 꼭 움켜쥐고 말이다.

향기는 옷을 들고 나와 남자의 옆에 얌전히 놓아 주었다.

“할아버지 거예요. 대충 맞을 거예요.”

자리를 피해 주기 위해 향기는 다시 방으로 향했다. 아직은 일어나는 게 무리겠지만 남자의 배 속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났다. 겨우 살려 놨는데 굶겨 죽일 수야 없지. 괘씸하지만 좋은 일 하는 김에 조금 더 인심을 쓰자 싶었다.

어릴 때도 입어 본 적 없는 흰색 면 속옷을 입자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옷을 빌렸냐고 따져 묻더니 이내 꼬리를 내리고 변상을 해 주겠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과는 누가 해야 하는데…….”

아직도 저런 순박한 여자가 있다니. 옷을 다 입은 무현은 일어서려다 발목이 불편해 벽에 기대앉았다.

아담해서 한눈에 들어오는 살내는 작은 찻집 같았다. 반들반들한 대들보도 통창의 창틀도 나무 생긴 모양 그대로. 밖은 언제 눈이 왔었냐는 듯 햇살이 쏟아졌다. 제 꼴이 한심해 고개를 젓던 무현이 입술을 늘리고 말았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가도 되냐고 묻는 여자 때문에. 마치 혼자 시트콤을 찍는 것처럼 마냥 분주하다. 캐릭터가 꽤 재미있네.

“좀 씻어요.”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고마워서 그러는 거니까.”

잡아먹을 듯 노려볼 땐 언제고! 하지만 더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리 좀 빌려 줄래요?”

“내 다리?”

“네. 침 놔 줄게요.”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아니요. 할아버지 안 계실 때 임상 실험 좀 해 보려고요. 개들한테는 해 봤는데 사람한테는 못 해 봤거든요.”

무현은 저를 놀리는 여자가 당돌하다 싶으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친화력이 좋은 건지 순진해서 그런 건지 사람 대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넌 여자애가 혼자 겁도 없이.”

“나쁜 짓 하게요?”

“하!”

그의 헛웃음에 향기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아저씨는 이름이 어떻게 돼요? 내 이름은 꽃! 향기에요.”

“꽃, 씨야?”

“아저씨 바보예요? 우리나라에 꽃 씨가 어디 있어요?”

무현이 황당한 얼굴을 하는데도 여자는 아랑곳 않고 웃는다. 톡 쏘는 말투도, 끝이 올라가는 사투리 억양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차무현.”

“꽃향기 하면 안 잊어버리잖아요. 류향기에요. 그리고 저 혼자 아니에요.”

무현은 향기가 눈짓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슬쩍 내놓은 개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허튼짓하면 언제든 몸을 뚫어 주겠다는 눈빛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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