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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7화 (7/56)

# 7

7화.

Chapter. 2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찬 욕실은 아늑하고 정갈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쌉쌀한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무현은 손끝에 걸리는 삼베 주머니를 보고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근육통에 직방이에요. 파스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향기라는 여자의 말이 맞는지 몸도 마음도 바로 녹지근해져 눈이 감긴다.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제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자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생사를 넘나들었다는데 그저 재난 영화를 한 편 찍은 것처럼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온몸을 짓누르는 통증만 아니라면 꿈을 꿨다고 할 만큼.

무현은 두 손을 붙여 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었다. 물을 퍼 수차례 얼굴을 적시고 욕조에 더 깊이 몸을 담갔다. 현실도피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가족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이기적인 걸까. 남자 나이 서른셋. 권유 정도라면 모를까 결혼을 강요당할 나이는 아니다. 여느 집안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무현은 사대독자다. 그가 원한 건 아니지만 제가 짊어진 멍에. 서른이 넘어가자 어른들이 결혼을 종용했고 뜻에 따라 간간이 맞선을 봐 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작년 말에 신년 운세를 보고 온 조모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버렸다. 원인은 올해를 넘기면 그의 사주에 여자가 아예 없다는 무속인의 점괘 때문이었다.

「사주에 칼이 들어 왔어. 나무가 여잔데 다 베어 버리는 형상이야! 독신으로 늙어 죽을 팔자야.」

독신주의는 아니었다. 운명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철부지 로맨티스트는 더더욱 아니고. 다만 남들은 잘만 하는 연애가 그에겐 쉽지 않았다. 남자들이 흔히 말하는 ‘첫사랑에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하는 멜로 역사가 그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염두에 둬야 하는 그의 처지를 여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 연선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서는 두 사람에게 질렸고 그렇게 끝이 났다. 연애도 때가 있는지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그 후론 여자가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구나 늘 시선이 따라붙는 연예인. 누구를 만나도 쫓기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무속인의 말에까지 휘둘려 기한이 정해진 결혼은 하고 싶진 않았다.

그가 단호하게 나오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조부가 나섰다.

「내년 안으로 결혼을 하든지 딴따라 때려 치고 가업을 물려받든지 해.」

「요즘 시대에 이게 말이 됩니까? 못 합니다.」

자수성가한 조부의 말은 돌기둥에 새기지 않았을 뿐 그의 집안에선 함무라비 법전, 그 이상의 효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런 조부를 움직이는 게 조모였다.

「네 할머니 죽일 셈이야?」

「억지 부리지 마세요.」

「나는 네 할머니 못 이긴다. 죽을 날 받아 놓은 내가 아직도 시장통에서 지내는 거 보면 몰라?」

조부는 시장 안에 있는 허름한 건물 3층 전당포 자리에서 사업을 일궜다. 강남에 고층 건물을 몇 개나 갖고 있으면서도 사업장 이전을 하지 못한 건, 전당포 자리가 도깨비 터라는 무속인의 말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조모 때문이었다.

「그건 할아버지 사정입니다.」

「이기적인 놈. 여태껏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으면 하나는 져 줘야지?」

사업을 잇기를 원하면서도 무현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손을 들어 줬던 조부였다.

「제 인생입니다. 제 뜻대로 살 권리 있습니다.」

「그만큼 했으면 됐어. 내년 안으로 결혼해.」

「안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널 몰라서? 장사꾼 할아비한테 장사하려 들지 말고 말 들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고 했다. 나는 네 조모가 양잿물이 보약이라고 해도 마시련다.」

그날 이후 거의 매주 선을 봐 왔다. 새해 첫날인 어제까지도. 그리고 반항처럼 떠나온 여행길이 황천길이 될 뻔했던 거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이 수증기와 섞인다.

“후우.”

정우의 말마따나 맞선 횟수가 더해질수록 결혼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만 짙어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무현은 욕조의 온도를 유지하느라 틀어 놓은 수도를 잠그고 일어섰다.

「넘쳐도 잠그지 말아요.」

경직된 근육이 풀려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낯선 사람을 챙겨 주고 돌봐 주고. 향기라는 이름처럼 그녀의 행동이 마냥 순수하기만 하다.

씻으라는 말에 세면 정도를 생각했는데 욕조에 물을 받아 줘서 당혹스러웠다. 덕분에 몸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말이다. 무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욕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그렇지. 겁도 없이.”

경계심이 없는 건지, 천성이 순박한 건지.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사례를 받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무현은 선반 위에 놓인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비누 거품을 밀어내던 그가 거울에 비친 나신을 보고 입술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아저씨는 그냥 사·람·이에요.」

그 말을 하던 향기의 작은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었었다.

“그래 놓고 큰소리는.”

겁나 잘생긴 아저씨라니. 보통은 그런 생각을 해도 입 밖으론 내놓지 않는데 재미있는 캐릭터다. 샤워 볼로 몸을 문지르던 무현이 미간을 좁혔다.

혈액순환이 잘돼서 그런 건지, 죽다 살아난 게 좋아서 그런 건지. 녀석이 오늘따라 존재감을 세운다. 중심부를 내려다보던 무현은 문득 드는 생각에 낯을 붉혔다. 몹쓸 것을 보여 준 건 아닌지 하는 난감함에.

“설마, 아니겠지…….”

* * *

“뭘 해 달라고?”

“못 들었으면 됐어요.”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다는 듯 숟가락을 움직이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틀 만에 하는 식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꿀맛이었는데 입맛이 싹 가시는 듯했다.

“다시 말해 봐.”

“……무슨 말이요.”

“방금 전에 한 말.”

“그게…….”

1년만 결혼해 줄 수 있느냐는 향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 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라 확인 차원에서 물었던 거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뽀송한 얼굴을 하고 하는 말이 하도 가관이라서. 순박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까. 무현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그런 거로 장난치는 거 아니야.”

“장난 아닌데요?”

더는 맞장구쳐 줄 생각이 없기에 무현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생긴 것도 꽤 귀엽고 엉뚱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마음 씀씀이도 예뻤다. 씻고 나와 보니 식사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가뜩이나 고마운데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밖에. 식사를 하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몇 번을 물어봤다. 내내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아저씨 서울 살아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럼, 1년만 결혼해 줄 수 있어요?」

여자의 얼굴에 음식물을 뿜을 뻔했다. 그 짧은 찰나 제게 반한 건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엔 낯선 이를 향한 호기심 정도만 담겨 있었다. 무현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도대체 몇 살이야?”

“쭉 궁금했는데요. 아저씨는 왜 자꾸 저한테 반말해요?”

관찰이라도 하듯 무현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말을 막 놓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초면인데.”

무현은 대답은 하지 않고 향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런 걸 따질 정도면 분명 멀쩡한 여잔데. 그의 목소리가 덤덤했다.

“아저씨라며.”

“좋아요. 그럼 아저씨부터 말해 봐요.”

놀이를 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 무현은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소속사에도 향기 또래가 많다. 끼 많고 무서울 정도로 성공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한 어린 친구들. 그만큼 개성도 강하고 되바라졌다는 얘기도 된다. 느낌은 다르지만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 철없이 굴다가도 할 말은 다 하는.

“서른셋.”

“스물셋이요.”

생각보다 나이가 있어서 무현이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더욱 황당하다. 어리면 어려서 그런다지만 어쨌든 성인이다. 처음 본 남자에게 결혼을 해 달라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

“말하라고 할 땐 언제고.”

“그만해.”

“싫다고 했는데 자꾸 물어본 건 아저씨잖아요. 필요한 거 말하라면서요.”

“그게 진짜 필요한 거야?”

상대하지 않겠다고 생각해 놓고 그녀의 말을 받아친 무현이 낯을 굳혔다.

“놀랐다면 미안해요. 식사나 하세요.”

무현은 그를 달래듯 대충 말을 얼버무리는 향기의 모습에 은근히 열이 올랐다.

“도대체 결혼이 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저 애 아니에요.”

“그래. 그러니까. 스물셋씩이나 돼서 처음 본 남자한테 결혼해 달라는 게 정상이야?”

한참 눈을 깜빡이던 향기의 고개가 45도로 기울었다. 미쳤다는 말인가? 그녀가 무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저씨 차 세워 둔 곳 있죠? 거기 동네에 가면 다문화 가정이 많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무현은 종알거리는 향기를 그저 응시했다.

“사진만 보고 프로필이 마음에 들면 아재들이 베트남으로 가거든요. 맞선부터 시작해서 신혼여행까지 논스톱으로 끝나요.”

“그래서?”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요? 보름에서 길어야 이십일 정도예요.”

“……?”

“만나러 간 여자와 잘 안 되면 즉석에서 다른 여자 프로필 보고 결혼 상대를 찾기도 하고요.”

농촌 실태야 무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모르겠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무슨 상관인지도 모르겠고. 의아해하는 그와 상관없이 향기가 말을 잇는다.

“한국 여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든대요.”

말도 안 통하는데 잘 사는 거 보면 신기하다며 쉬지 않고 종알대는 향기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무현이 입을 뗐다.

“하고 싶은 말은?”

“그 사람들이 다 미친 거예요? 정상이에요. 저도 정상이고요.”

말을 맺고는 해죽 웃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다고 해도 저 나이에 가질 수 있는 결혼관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무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결혼은.”

“……?”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야. 넌 그런 노총각이 아니잖아.”

결혼에 관한 한 무현이 훈수 둘 처지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목숨도 구해 줬고, 그녀가 ‘훨씬’이라고 말할 만큼 여자보다 세상을 오래 살았다.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향기에게 교과서적인 조언 정도는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왠지 그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이유가 뭐야. 그 나이에 결혼 들먹이는 이유.”

“정말 궁금해요? 서울 가려고요. 제가 한 번도 서울을 못 가 봤거든요.”

생글거리는 여자를 보고 무현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헛바람이 든 거였어? 혹시나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사정이 있나 싶었는데 정말로 철부지 장단에 놀아난 셈이다.

“요즘 애들은 너처럼 놀아?”

무현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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