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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8화 (8/56)

# 8

8화.

아래로는 분지처럼 산세에 갇혀 평온해 보이는 마을. 위로는 병풍처럼 펼쳐진 산봉우리. 사방을 둘러봐도 빽빽한 나무숲이다. 더구나 하얀 눈에 덮여 소리를 잃은 듯 고요하고. 어쩌다 날아오르는 새들의 후드득, 날갯짓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덩이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적막하다. 시야에 들어차는 풍경은 그림 속 무릉도원인데. 그건 무현 저처럼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감상일 거고 허구한 날 이런 풍경만 보고 사는 향기에겐 어떨지. 그나마 마을까지는 빠르게 걸어도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고 했던가. 무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답할 만하네.”

한창 호기심 많고 화려한 것에 끌릴 나이다. 이런 곳이 좋을 리 없겠지. 그래도 그렇지 서울에 가고 싶어서 결혼을 하겠다니.

“신경 쓰이네.”

할아버지와 둘만 지낸다더니 사람이 그리웠나. 반나절 만에 ‘아저씨?’라고 몇 번을 불러 댔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의 순박함에 그도 무장 해제된 듯 말을 놓고 대꾸를 하고. 평소 두터운 친분이 있지 않는 한 나이가 많든 적든 말을 놓지도, 섞지도 않는 성격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걱정된다. 정말.”

낯선 저를 맑은 눈빛으로 의심 없이 바라보는 게 걱정됐다. 향기가 그런 천성을 가져서 덕을 봤던 건 까맣게 잊고 말이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낯선 남자를 집에 들이냐고 야단쳐 주고 싶었다. 개새끼 아니라 개새끼 할아버지가 옆에 버티고 있어도 한낱 짐승일 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한숨을 내쉬던 무현은 자문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냐고. 처음 본 여자를 왜. 무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해 줬으니까. 무현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인생에 마가 낀 게 틀림없다. 오나가나 결혼, 결혼. 무현은 어슬렁어슬렁 제 주변을 도는 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네 철부지 주인 잘 지켜라.”

알아듣는 거냐? 개는 대답이 없었다.

* * *

“걱정 마세요.”

-정말 괜찮겠어? 강남이 데리고 이리로 오든지.

할아버지 친구분 상태가 좋지 않아 하루 더 머무르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연락이었다. 향기는 무현의 얘기를 할까 하다 듣자마자 달려오실 게 뻔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할아버지, 식사 꼭 챙겨 드세요.”

-너나 잘 챙겨 먹어.

“네.”

전화를 끊은 향기는 주방 창으로 보이는 무현을 보고 눈을 흘겼다.

“잘생기면 뭐 해?”

은근히 말썽을 부리는 무현 때문에 오전부터 일이 산더미다. 무현의 옷을 자르며 나온 거위 털 때문에 때아닌 대청소를 해야 했다. 그가 덮었던 이불도 젖었다 말라서 찜찜하던 차라 이불 빨래도 했다.

세탁기를 돌려 놓고 거실로 나왔는데 무현이 청소기를 분해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막혔어.」

먼지를 빨아들이는 브러시가 연결된 청소기를 그냥 썼으니 막히는 건 당연했다. 할아버지 점퍼를 주고 밖으로 내몰았다. 청소를 끝내고 빨래를 들고 나가자 무현이 돕겠다고 나섰다.

「털어야 하는데요?」

「내가 해.」

퍽퍽. 힘 좋게 털기에 별생각 없이 등을 돌리는데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이불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장대가 왜 이래?」

잔뜩 얼굴을 구기고 지지대를 가리켰다. 멀쩡한 장대는 왜 만졌나 모르겠다. 제가 하게 뒀으면 빨래 줄에 널고 탁탁 털면 끝날 일인데 덕분에 이불을 다시 헹궈야 했다.

불편한 다리로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래도 생긴 거와 다르게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지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맛있다는 말 한마디 없이.

향기는 커피 잔에 물을 붓고 잠시 망설이다 커피 한 잔을 더 준비했다.

밖으로 나온 그녀가 평상으로 다가가 무현의 옆에 귤과 커피가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춥진 않아요? 몸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난로 때문에 괜찮아.”

“커피 마셔요.”

무현은 연갈색 액체가 담긴 잔을 받아 들고 시선을 돌렸다. 오전에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깡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붉고 푸릇한 불덩이가 탁탁 소리를 내고. 호일에 싼 고구마 익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향기는 잘 익은 고구마를 집게로 집어 쟁반에 올려 주고 귤껍질과 배춧잎을 마당 한쪽에 드문드문 뿌렸다.

“뭐 하는 거야?”

“눈 오면 토끼들이 먹이 찾는 게 쉽지 않아서요.”

오지랖은. 무현은 바삐 움직이는 향기를 눈으로 쫓았다. 동생 이진은 시집가기 전까지 반찬은 고사하고 전기밥솥 밥도 죽을 만들었다. 동생보다 한참은 어린데 음식도 집안일도 능숙하게 해내는 향기를 보는 게 왠지 불편하다.

“할아버지는 언제 오시지?”

“오늘 못 오신대요.”

그녀의 말에 무현의 눈썹이 심하게 균형을 잃었다. 어르신이 오시면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사례에 대해 의논하려고 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며칠 머무는 것도 부탁해 보고. 다리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여러모로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 펜션 전화번호 알아?”

“네. 예약 때문에요? 전화 빌려 줄까요?”

“그곳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 가파른 산을 내려가는 건 무리였다. 다리가 괜찮아지면 다시 올라와 인사를 드리더라도 우선은 숙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서울 가게요?”

“펜션으로 옮기려고.”

“왜요? 우리 집에 있는 게 불편해요?”

무현은 천진하게 묻는 향기가 걱정돼 한숨을 삼켰다.

“넌 낯선 남자가 무섭지 않아? 혼자 있으면서 겁도 없이.”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 나,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아?”

대답 대신 향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런 일이 향기도 처음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집에 찾아와 정신을 잃은 사람.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밤새 간호를 했고 날이 밝았다. 개들을 믿는 것도 있지만 정신이 든 무현은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오시지 못한다는 말에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서울 갈 거 아니면 그냥 있어요. 할아버지 오시면 도와주실 거예요.”

“넌!”

“싫으면 말고요. 그 다리로 내려갈 수 있겠어요?”

이곳에 있는 게 불편하다면 잡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목발이 있어도 무현이 산을 내려가는 건 무리다. 더구나 펜션은 아주머니가 혼자 운영하는 곳이다. 위치도 이곳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곳에 있다. 아랫마을 어른들에게 도와 달라고 연락할 수 있지만 그건 향기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혼자 집에 있다고 광고를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제가 재미있는 거 보여 줄까요?”

찡그린 낯을 펴지 못하는 무현을 보고 향기는 육포를 꺼내 들었다. 휘익, 휘파람을 불고 공중으로 던지자 강남이랑 후손들이 점프한다. 그녀의 키보다 높게 날아오른 개들이 잽싸게 육포를 낚아채 그녀의 앞으로 가져왔다. 날렵한 개들의 움직임에 흠칫하는 무현을 보며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보여 줄까요?”

무현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확실히 말랑한 성격은 아니었다. 무현은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지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인가.”

“어떤 일요?”

“집을 비우시거나, 사람 구조하는 일.”

“친구분이 많이 아프세요. 이곳은 눈이 많이 오면 고립되기 쉽거든요. 그리고 구조는 밖에서 하죠. 아저씨는 제 발로 찾아온 거잖아요.”

향기의 말에 왜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는지 모르겠다. 무현은 향기가 개들 밥을 챙겨 주고 빗자루를 집어 들자 몸을 일으켰다.

“내가 할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저씨 다리 아프잖아요.”

두 손으로 빗자루를 꼭 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향기. 무현 또한 빗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천천히 하면 돼.”

“그게…….”

걱정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선뜻 말이 나가지 않는다.

극구 말리는 향기를 뿌리치고 무현은 기어이 빗자루를 뺏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현역으로 복무한 그다. 민간인이 된 지 오래지만 여자인 향기보다야 낫겠지. 한참 눈을 쓸어 내는데 퍽, 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나고 주황색 감이 눈 위로 뒹굴었다.

무현은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이는 향기를 슬쩍 외면했다.

“이걸 왜 여기다 뒀어.”

“…….”

“그러니까, 장독대는 저쪽이잖아.”

눈이 덮여 있는데 어떻게 항아린 줄 알겠느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일부러 그늘에 놓아 둔 건데…….”

향기는 포옥 한숨을 내쉬고 뭉그러진 감은 개들에게 주고 땡땡 언 것만 쟁반에 올렸다. 할아버지 간식으로 가을에 준비해 둔 홍시였다. 냉동실보다 항아리에 보관하는 게 맛이 좋아 일부러 장독대에 두지 않고 그늘에 놓아둔 것이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물었다.

“먹어 볼래요?”

“……아니.”

무현이 말꼬리를 흐렸다. 덤벙대는 성격이 아닌데 왜 하는 일마다 실수를 하는지 모르겠다.

* * *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에 식탁을 닦던 향기가 눈을 깜빡이며 무현을 바라봤다.

“아저씨!”

“…….”

“정말 똥 손이에요?”

향기는 “진짜 못 살아.” 말을 잇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천에서 도예를 하시는 할아버지 친구분이 보내 준 그릇이었다. 이가 나가도 버리기 아까워서 화분 받침대로라도 쓰는데 그런 용도로도 쓸 수 없게 돼 버렸다.

한편 무현은 향기와 박살이 난 도자기 그릇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깨진 그릇은 사 주면 되지만 하루 종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향기가 박스를 가져오자 무현이 말했다.

“비켜.”

“아저씨나 비켜요. 말썽쟁이.”

“손 다쳐. 내가 해.”

무현은 다급하게 향기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멈칫했다. 뭐가 이렇게 가늘어. 그의 손에 반이나 될까 싶게 하얗고 작은 손이었다. 던지듯 그녀의 손을 놓고 몸을 낮춰 그릇 조각을 주웠다.

“버리고 올게.”

“버리는 건 잘할 수 있어요?”

무현은 대답 없이 깨진 그릇을 담은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 한쪽에 내려놓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웃고 말았다.

“똥 손이라고?”

하는 말마다 그를 웃게 한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저녁으로 해 준 수제비가 너무 맛있었다. 향기가 힘들게 반죽을 했으니 설거지라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해도 하루 종일 어이없는 실수만 연발이다. 어쩌면 향기 탓인지도. 하루도 안 됐는데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을 대하듯 정신없이 떠들어 댔다. 대답을 해 주던 안 해 주던.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으니 그가 실수를 할밖에 고개를 젓던 무현은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새카만 하늘에 별 무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질 듯. 손만 뻗어도 잡힐 듯이 가깝다.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오로라에 버금가는 별 무리가 곧 내려앉을 것 같은 착각에 그가 손을 뻗었다.

“안 잡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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