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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0화 (10/56)

# 10

10화.

식탁에서 성철과 마주 앉아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성철이 찌개를 식탁에 올리고 물었다.

“발목은 어떤가?”

“어르신 덕에 많이 편해졌습니다.”

성철이 매일 침을 놓아 주고 부항을 떠 주었다. 면허는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한번 다친 발목은 또 다치기 쉬우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네.”

향기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두 사람만 앉은 식탁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점심 때 먹으라고 만들어 주고 간 오리무침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읍내에는 자주 나가나요.”

“향기? 잘 안 나가. 좀 나가면 좋으련만.”

“마을로 내려가서 사시는 건, 제가…….”

너무 나섰다는 생각에 무현이 말을 끊었다. 성철이 원하기만 한다면 마을에 집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집뿐만 아니라 더한 것도. 그의 집에서도 신세 진 걸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진 않을 거였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향기가 이곳을 좋아해. 제 어미와 할머니 흔적이 있는 곳이라서. 나도 그렇고.”

“시장 보러 간 건가요.”

“그런 건 내가 하지. 택배도 오고. 데이트 갔어.”

무현의 눈에 의아함이 담긴 걸 본 건지 성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집보내려고. 내가 미는 녀석이 있거든.”

“아직 손녀 따님 나이가.”

“서울서 학교 마치고 직장 생활하다가 내려왔는데 괜찮아. 요즘은 나이 먹는 게 제일 겁난다네.”

며칠 같이 보냈다고 그새 무현이 편하게 느껴져 성철은 속을 보였다. 귀공자처럼 생긴 것답지 않게 털털했다. 먹는 것도 그렇고 노인 옷도 싫은 내색 없이 입고. 무엇보다 묵직한 게 마음에 들었다.

“어서 먹게.”

“네.”

무현은 성철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지만 그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향기가 그런 말을 했던 건가. 대화가 없는 식탁에 숟가락 부딪는 소리만 들렸다.

그 시각 향기는 현수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성철의 성화에 현수를 만나러 나왔다. 읍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겉도는 대화를 나누고 집에 가겠다는 그녀를 현수는 굳이 바래다준다고 따라 나섰다.

“오빠 미안해요.”

“뭐가?”

“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조금 더 생각해 봐. 겨우 한 번 만났잖아.”

이미 레스토랑에서부터 향기의 마음은 눈치챘지만 현수는 이대로 포기하기 싫었다.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 생각은 다르신 것 같던데?”

“그건…….”

“결혼, 좀 이른 감이 있지? 나도 다르지 않아.”

현수는 겨우 웃음을 끌어 모았다. 그도 스물아홉.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다. 상대가 향기였기에 흔쾌히 수락했던 거다. 가파른 길이라 손을 내밀었던 현수는 향기가 고개를 젓자 머쓱한 목소리를 냈다.

“혹시 너도 서울 가고 싶은 거야?”

전원생활을 그리는 건 어른들이나 할 법한 생각. 시골 생활이 지겨운 그들은 학창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서울 생활을 동경했다. 저야 서울 생활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향기에겐 여전히 동경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그 마음이 이해되는 현수였다.

“서울 별거 없어. 복잡하기만 하고. 결혼하면 고생할 거 같아서 그래?”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대답이 현수에겐 핑계로 들릴 뿐이었다.

“나는 너와 결혼하는 거, 우리 부모님 뜻 아니야.”

“네?”

“그전부터 마음에 있었어. 너희 할머니 잘 아니까 사귀자고 못 했던 거지.”

좁은 지역이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누구나 탐낼 만큼 똑똑하고 예쁜 아이였다. 이곳을 떠날 처지가 안 되는 향기 때문에 고향에서 자리를 잡겠다고 하는 동창들도 있을 만큼. 그러나 향기에게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그는 같은 동네라 등하교 때 향기와 만남이 잦았고 그때부터 그녀에게 마음에 있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오면서도 향기를 떠올렸는데 마침 결혼 얘기가 나와서 흔쾌히 수락했다.

“결혼하면 집 지어서 분가할 거야. 너 고생 안 시켜. 할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면 마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래요.”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이요.”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현수에게 향기는 선뜻 그러라고 답을 주지 못했다.

“천천히 만나 보자. 기회는 줘.”

어느새 집에 도착하자 개들이 꼬리를 치며 달려왔다. 마당엔 무현과 성철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뭐 하러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어?”

“향기 혼자 보낼 수 없어서요.”

현수는 가져온 과일을 평상에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그런 현수를 보는 성철의 눈에 흐뭇함이 번진다.

“뭐 하게.”

“온 김에 나무나 쪼개 놓고 가려고요. 들어가 계세요.”

그루터기에 쌓인 눈을 치우고 제 집인 양 도끼를 꺼내 와 통나무를 쪼개기 시작했다. 성철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끼를 내리치자 쩍 소리가 나며 나무가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시원스러운 도끼질에 땔감이 순식간에 쌓이자 향기가 차와 수건을 내왔다.

“땔감 많은데 그만해요.”

“옮겨만 놓을게.”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현수는 낯선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도플갱언가 싶게 차무현과 닮은 남자였다. 아니 차무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흡사했다.

아니겠지. 톱스타가 저런 옷차림을 하고 왜 향기네 마당을 쓸고 있겠어. 현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향기를 바라보았다.

“이거 할아버지가 오빠 가져가래요.”

“영지버섯이잖아? 이 귀한 걸.”

“해 떨어져요. 서둘러요.”

“인사드리고 나올게.”

성철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현수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향기의 걸음이 느릿했다.

* * *

“여기서 뭐 해요?”

무현의 시선을 쫓던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은근 말썽을 부린다니까. 또 사고 치려고 그러죠?”

도끼를 노려보는 그의 폼이 심상치 않았다. 향기는 얼른 그루터기에 꽂혀 있는 도끼를 농기구를 모아 놓는 곳으로 옮겼다.

“아저씨는 무슨 호기심이 그렇게 많아요? 도끼질은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니까 포기해요.”

“그게 뭐 어렵다고.”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지. 무현은 눈을 흘기는 향기를 보고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오랫동안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렸다. 해 보진 않았지만 도끼질하는 남자를 보니 어려울 것 같지 않아 은근히 호승심이 일었다.

“데이트는 잘하고 왔어?”

“데이트요? 뭐, 만난 건 만난 거니까.”

“여긴 데이트 장소가 어디야.”

“읍내요. 거기가 핫 플레이스예요.”

이태원이나 강남도 아닌 시골 읍내가 핫 플레이스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네가 말한 핫 플레이스로 쇼핑갈까.”

“아저씨랑 저랑요?”

“그래.”

떠날 날이 다가오자 마음이 급해진다.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사례 얘기만 꺼내면 성철도 향기도 기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

“갖고 싶은 거 없어?”

“아저씨, 나도 보는 눈 있어요.”

“눈?”

“그렇게 입고 어딜 가요. 창피하게.”

무현은 새초롬하게 눈을 뜨고 그를 살피는 향기의 시선에 헛기침을 했다. 성철에게 빌려 입은 바지가 짧아서 제가 봐도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같이 못 다닐 정도야?”

“것도 그렇지만, 귀찮아요.”

“차로 가는데 뭐가 귀찮아? 가자. 간 김에 내 옷도 사고.”

“여기서 얼마나 있을 거라고 쇼핑을 해요? 볼 사람도 없는데.”

얘가 은근 철벽 치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왜 없어?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고 방금 전에 타박해 놓고. 그의 꼴이 아무리 우스워도 순박한 시골 처녀에게 데이트를 거절당할 정도는 아니다. 무현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줄줄이 이어졌다. 오늘도 헛수고를 한 건가.

“삐졌어요?”

“…….”

“괜히 그러고 다니다 덧나지 말고 편히 있다가 가요.”

사실은 무현이 어떤 옷을 입든 상관없다. 반짝반짝 광이 날 만큼 간지가 줄줄 흐르니까. 같이 커피숍도 가고, 읍내에 장 서는 것도 보여 주고 싶다. 하지만 무현이 무슨 생각으로 같이 나가자고 하는지 알기에 거절하는 게 옳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건드려 사락사락, 심심치 않게 주의를 끈다. 무현은 목도리를 풀어 향기의 목에 감아 주려다 멈칫하고는 팔에 걸쳐 주었다.

“안 추운데요?”

“하고 있어.”

잘 따르기도 하고 대화 나눌 사람이 향기밖에 없다 보니 제법 친해졌다. 온종일 붙어 있으니 당연한 건가. 아무튼 뭔지 모르게 신경 쓰이고 손이 간다.

“대학은 왜 안 갔어?”

“……그냥요.”

평소였다면 정신없이 ‘아저씨. 아저씨.’ 먼저 불러 대던 향기였다. 잔뜩 먹구름 낀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그 친구, 마음에 안 들어?”

“아저씨 은근 부정적인 사람인가 봐요.”

“무슨 근거로?”

“보통은 괜찮으냐고 물어보잖아요.”

그러게. 왜 그렇게 물어봤을까. 강요에 의한 만남인 걸 알기 때문일까. 무현은 자신도 겪어 본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꺾으며 향기가 말했다.

“착하대요. 여기서 학교 다닐 때도 인기 많았어요.”

“…….”

“공부도 잘했고 할아버지가 좋아해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모두 제3자의 시각이다. 향기를 바래다주러 온 남자는 무현의 눈에도 키도 크고 생긴 것도 매끈했다. 무엇보다 향기에게 몸이 달아 있는 눈치였다. 잘 차려입고 와서는 성철에게 어떻게든 점수를 따려고 도끼부터 꺼내 드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서 결혼하게?”

“서울은 어때요? 엄청 복잡하죠?”

“정신없을 만큼.”

말을 돌리는 향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현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언제 녹을지 모르는 눈길 위에 발자국을 이어 가다 물었다.

“가 보고 싶어?”

“궁금해요. 다들 서울 가고 싶어 하니까.”

잔뜩 호기심을 담은 동그란 눈이 얇게 접히고 미소를 짓는다. 이러니 욕심이 나는 거겠지. 미소를 지으면 바짝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 때문인지 작은 얼굴이 온통 웃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전염된 듯 그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고. 만약에 향기가 제 동생이었다면 아무 녀석에게나 쉽게 내주지 않을 텐데. 서울 구경도 시켜 주고 싶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다면 그들의 콘서트도 보여 주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원도 해 주고. 하지만 선뜻 손을 내밀 수 없다. 그가 잠깐 머물다 가는 것만으로도 향기에겐 충분한 부추김이 되고도 남을 테니까. 더는 그녀의 마음을 들쑤시면 안 되겠지.

추운지 손을 싹싹 비비는 향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무현이 방향을 틀었다.

“들어가자. 춥다.”

“아저씨 저녁엔 뭐 해 먹을까요? 수제비 좋아하죠?”

향기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종알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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