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무현은 환하게 불이 켜진 마당에 서서 곳곳을 눈에 담았다. 겨울이라 별빛이 더욱 선명한 하늘. 검은 바다처럼 내려다보이는 마을. 누런 황토 담장에 켜켜이 쌓아 올린 통나무. 저와 눈이 마주쳐도 느른하게 늘어져 있는 개들. 어느새 차가운 바람조차 정겹게 느껴지는 곳이다.
목숨 빚을 진 것도 모자라 꼬박 열흘 동안 폐를 끼쳤다. 낯을 가리는 편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전화위복. 이 집에서의 생활이 무현에겐 그런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무위도식. 때 되면 먹고 자고. 소음이라고는 향기의 목소리가 다였다. 시답잖은 종알거림에 대꾸해 주고 성철과 장기를 뒀다. 간간히 산책을 나서면 제법 낯을 익혔다고 개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연예인이 된 후, 아니 그의 인생 통틀어 더없이 편하고 한가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런데 왜…….
무현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그런가.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뭐가 이렇게 개운하지 않은 걸까. 머릿속에 맴도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젓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머그잔을 든 향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국화차예요.”
“이거 주려고 나왔어?”
“아뇨. 할아버지가 내일 언제 출발할지 물어보래요.”
향기의 말에 무현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뭘 기대한 거지? 그녀가 건네는 머그잔을 감싸자 온기와 더불어 국화 향이 은은히 올라온다. 잠시만 기다리면 사라질 온기. 외면하는 게 맞는데.
“일찍 출발할 거죠?”
“그래야지. 왜?”
“내일 읍내 가시면서 아저씨 바래다주실 건가 봐요.”
수시로 ‘아저씨?’라고 귀찮게 불러 댈 땐 언제고 사람이 떠난다는데 말짱한 얼굴이라니. 결혼까지 해 달라고 소원하던 여자의 눈빛치곤 너무 담백하다.
“괜히 감기 걸려서 가지 말고 얼른 들어와요.”
볼일이 끝났다는 듯 향기가 냉큼 등을 돌린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는 개구리. 무현은 문득 그 억울함이 이해돼 씁쓸해지는 순간이었다.
“류향기.”
“왜요?”
결국 불러 세우고 말았다. 머그잔은 온기를 잃어서 미지근해졌는데, 곧 차갑게 식을 텐데. 의아함에 떼굴떼굴 구르는 눈동자를 보며 무겁기만 하던 무현의 입이 열렸다.
“다음 주에 상견례 한다며.”
“들었어요? 헤헤.”
웃을 타이밍이 아닌데 향기가 웃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무현의 눈에 짜증이 서린다.
“후회 안 하겠어?”
“결혼이 별건가요.”
그런데 왜 하느냐고 묻자 할아버지 소원이란다. 무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인생이잖아. 좀 더 신중할 순 없어?”
하, 웬 오지랖인지.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어찌어찌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됐다. 손녀딸을 걱정하는 성철은 이해가 된다. 그가 아리송한 건 향기의 태도다. 어떻게 된 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제 뜻을 밝히지 않는다. 결혼뿐 아니라 성철이 하는 말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맹하거나 마냥 순둥이도 아니면서.
“그 남자 좋아해?”
“누구, 현수 오빠요?”
상견례만 끝나면 결혼할 남자 얘기를 묻는데 표정이 없다. 그런데 왜 그가 화가 나고 답답한 걸까. 무현은 멀뚱히 서 있는 향기를 눈에 담았다.
“아무 남자나 돼?”
놀란 눈을 하는 향기를 보고 멈춰야 했다. 그러나…….
“서울 가고 싶다며.”
사고를 치는구나, 차무현. 정신 좀 차리지? 이쯤에서 무마하자고 이성은 다그치는데 입술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필요한 게 결혼이라며.”
“……?”
“하자. 그거. 해 줄게.”
“겨, 결혼을요?”
깜빡깜빡. 향기의 눈까풀이 빠르게 열렸다 닫힌다. 대답하지 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나 주체성 강한 입술이 주인을 닮아 멋대로 움직인다.
“……그래.”
놀라서 커다래진 눈동자와 짜증이 실린 눈동자가 오롯이 마주쳤다.
* * *
마을 회관으로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시동을 걸고도 차를 출발시키지 못한 무현의 시선이 한곳에 못 박혀 있다. 차창을 내리는 것도 잊고 줄담배를 피운 탓에 바깥 공기와 다르게 차 안은 혼탁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기다리는 게 더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될 즈음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멀리서 뛰어오는 향기가 보였기 때문이다. 무현은 담배를 비벼 끄고 차에서 내렸다.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이지만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니까.
“왜 뛰어와.”
“가, 간 줄 알고. 헉헉.”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숨을 뱉느라 작은 얼굴이 새빨갛다. 무현은 조금 틈을 두고 물었다.
“어떻게 내려왔어.”
“후, 후다닥요.”
그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고 향기가 내려오던 곳으로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아니다.”
어제 향기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들어가니 성철이 잠자리에 든 후였다.
아침 일찍 드릴 말씀이 있다고 성철과 마주 앉았다. 향기 짝으로 저를 생각해 봐 달라고 말했다. 성철은 펄쩍 뛰었고 예상했던 일이라 기다렸다. 우선은 만나 보겠다고 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무엇보다 양쪽 집안에서 원하는 건 결혼이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던 거다.
성철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차분하게 맞선을 보고 있는 그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향기에게 좋은 감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감정의 색이 달라 그렇지 향기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게 말이 되나?」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맞선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다는 게야?」
「……향기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거짓말을 하기엔 머뭇거려져 다르게 말했다. 그리고 향기를 쳐다보자 그녀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결혼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저, 저도 아저씨가 좋아요.」
말을 맞춘 대로 향기가 거들었고 성철은 한참을 난감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행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성철이 저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사람 됨됨이야 타인이 평가해 주는 거지만 조부모와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운 게 있는 무현이었다. 어른들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막돼먹은 인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 차치하고라도 누구나 탐내는 배우, 차무현 아니던가. 꽤 오래 침묵하던 성철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무현은 충전한 휴대폰을 이용해서 가족 관계 증명서를 보여 줬다.
「하는 일은 어떻게 된다고 했지?」
「연예인입니다.」
「여, 연예인?」
「네. 배우하고 있습니다.」
순간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서 향기를 고생시키지 않을 만큼의 능력은 된다고 덧붙였다.
「어디서 돈 자랑이야?」
「그게 아니라…….」
「나가!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서릿발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집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성철의 눈빛이 용광로처럼 번뜩였다. 결국 성철의 화만 더 돋우고 그대로 쫓겨난 거다.
겨우 숨을 고르고 얼굴색을 찾은 향기가 말했다.
“연예인인 거 왜 말 안 했어요?”
“그게 잘못된 거야?”
놀랐는지 향기의 맑은 눈에 물기가 흥건해진다. 향기도 어찌 보면 피해자인데. 무현은 대상 없는 거친 말을 속으로 쏟아 내며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가져왔어?”
향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무현은 그것을 잡아채듯 빼앗아 그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빼서 같이 주었다.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이건 갖고 있고.”
카드를 뚫어지게 보던 향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저씨, 혹시요. 그게…….”
“말해. 뭐든.”
“명함 같은 건 없어요?”
향기의 말에 잔뜩 긴장했던 무현은 무장 해제돼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법 촉촉한 눈빛을 하기에 가슴이 덜컥 했었다. 이를테면 가출을 한다든지, 이대로 그를 따라서 서울로 가겠다든지, 할 것 같아서.
무슨 기대를 한 거냐, 차무현. 아무리 신파가 시청률 불변이라지만 멜로가 빠진 관계에서 그런 걸 기대하다니. 무현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전화번호 줬잖아.”
“전화기 잃어버리거나 고장 나면 아저씨 못 찾아가잖아요.”
“찾아올 생각은 있고?”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말했다.
“배우 차무현. 전화번호 같은 거 잃어버려도 서울 오면 찾을 수 있어.”
“그렇게 유명해요?”
“후우. 그래.”
얼굴이 명함인 무현이었다. 이참에 명함이나 파 볼까 보다. 향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 웃을 상황이 절대 아닌데 말이다.
“할아버지께 감사했다고 꼭 전해 주고.”
“네. 그리고 이건 필요 없어요.”
향기는 무현의 점퍼 주머니에 그가 준 카드를 넣어 주었다. 무현은 고집스러운 향기를 한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서 한도 없는 블랙 카드를 건넸다. 그를 찾아오겠다고 하지만 그건 향기의 생각일 뿐. 다시는 보지 못할 생명의 은인에게 돈으로라도 보상을 해 주고 싶었던 거다. 무현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눈물 맺힌 향기의 눈동자가 먼지 한 점 허락하지 않는 잘 닦인 투명 유리 같았다. 그런 눈을 하고 환하게 웃는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울지 말라고 다독여 주고 싶은데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무현은 고마웠다는 말도, 건강하라는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