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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2화 (12/56)

# 12

12화.

Chapter. 3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향기는 멈칫했다. 오전부터 비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불더니 기어이 빗방울을 떨어트린다. 기온이 떨어졌으면 눈이 내렸을 텐데 날이 풀려 비를 뿌리는 것 같았다. 향기는 잠시 망설이다 어깨에 짊어진 기타를 집 안에 두고 나왔다. 우산을 받쳐 든 그녀가 작게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대중가요 가사가 이 정도면 명곡 반열에 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 이 노래를 듣고 가사가 어찌나 제 처지와 톱니바퀴 물리듯 딱 들어맞던지. 폭풍 이입이 됐었다. 그녀의 입에서 포옥, 한숨이 흘러나온다. 차라리 비가 세차게 쏟아졌으면 좋겠다. 복잡한 머릿속이 깨끗이 쓸려 내려갈 수 있게. 향기는 사방을 둘러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변한 건 없는데…….”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애들을 챙기고, 간간이 마을에 내려간다. 아무튼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지내는데 흥이 나지 않는다. 굳이 원인을 꼽자면, 무현이 떠난 것? 그녀의 눈치를 보는 할아버지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은데 멍할 때가 많아졌다. 덕분에 결혼 얘기는 쏙 들어갔지만. 그가 머물렀던 열흘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었던 걸까. 그가 떠난 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문득문득 어이없다는 듯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세 사람 몫의 수저를 챙기고. 무현은 어떨까.

“……다 잊었을 거야.”

무현이 결혼을 해 준다고 했을 때 어벙한 얼굴을 하자 사대독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맞선을 보고 있다고.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자 무현이 꽤 구체적으로 말했다.

「부부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민 줄 알아?」

남자와 같은 침실을 쓰고 한 침대를 사용하는 거라고 했다. 현수라는 남자와 그럴 수 있냐고 묻는 그가 조금은 이상했다.

「아저씨하고는 뭐가 달라요?」

「그럴 일 없어.」

양쪽 집안 어른들 바람대로 결혼은 하되 두 사람은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목숨을 구해 줬다고 결혼을 해 준다니. 안 될 말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분명 욕심인 걸 아는데 용기를 내 보고 싶었다. 무현은 자신이 여자들이 싫어하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남자여서 결혼이 쉽지 않다고 했다.

“거짓말쟁이.”

시골 산다고 내가 바본 줄 아나. 결혼할 여자들이 줄을 설 남자였다.

「정말 서울에서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결혼을 하더라도 두 사람은 양쪽 집안을 감쪽같이 속이는 공범일 뿐.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무현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말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거듭 든다.

“동정받는 건 싫으니까.”

책임감 없이 던지던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아직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학교에 다니고부터 동네에서 TV 없는 집은 그녀의 집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형편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다. 장난감이며 책이며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었으니까.

“할머니, 향기도 텔레비전 사 줘요. 컴퓨터도.”

“그런 건 못 써.”

“왜요?”

“바보상자 보면 바보 되는 거야.”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던 할머니는 세상과 연결되는 물건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계속 조르지 않았던 건 저만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솜사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기야, 이리 와. 엄마가 대신 노래 불러 줄게.”

TV나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아도 엄마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다.

향기는 굵어진 빗줄기에 흔적이 지워지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읊조리듯 노랫말을 외웠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몸이 약했던 엄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할머니는 이 노래 가사를 아는 사람처럼 똑같이 말했었다. 그리고 서울은 사람 잡아먹는 곳이라고, 그러니 그곳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제가 커 갈수록 외지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할머니가 의아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향기는 할머니 옆에 있을 거지?”

“네. 걱정 마세요.”

딸을 잃고 슬퍼하는 분의 걱정을 덜어 드리는 게 우선이었다.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날을 수 있어요.〉

그래, 거위야. 너라도 꼭 날아라. 못 날면 내가 라이트 형제는 아니지만 티타늄 날개라도 만들어 줄게. 그렇게 거위도 꾸는 꿈을 사람인 그녀는 곱게 접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모든 의문이 풀렸다. 병문안을 핑계로 작은할아버지가 찾아왔었다. 마침 할아버지가 집을 비운 상태였고 작은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작년에 배추가 흉작이라 망했어요. 나도 형님처럼 특용 작물을 재배했어야 했는데.”

“…….”

“농협에서 대출받은 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손을 벌리는 일이 잦은 작은할아버지였다. 할머니가 반응이 없자 목소리를 높였다.

“향기 엄마 위약금이 그때 꽤 됐었죠?”

“서방님.”

“천가 그놈은 잘 삽디다. 텔레비전에 얼굴도 나오고.”

“서방님! 제발 조용히 해요.”

“향기 없는 거 확인했어요. 하여튼 이놈의 집구석은 다 향기, 향기야.”

작은할아버지는 “그놈은 결혼해서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속앓이하다 죽은 향기 엄마만 불쌍하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단속하면 뭐 합니까. 어차피 도시로 나갈 텐데.”

후년이면 당장 대학에 갈 것 아니냐며 아픈 할머니를 조롱하듯 비웃었다. 할머니가 말려도 작은할아버지의 독설은 이어졌다. 기어이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올 때까지.

생소한 얘긴 아니었다. 다만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건 충격이었다.

아빠 없는 아이.

어려서부터 듣던 말. 할머니가 아무리 차단을 해도 사람들과 섞여 사는 동네였다. 다른 집과 가족 구성원이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았다.

“쟨 커 갈수록 지 엄마랑 똑 닮았네?”

“향기 엄마 아프다는데 사실이야?”

“아프긴? 처녀가 애를 낳았는데 나돌아 다닐 수 있겠어?”

“하긴. 나 같아도 창피해서 얼굴 못 들고 다니지.”

저도 생각이 있으니 숨어 사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엄마는 몸이 약했다. 마을에서 살다가 거처를 옮긴 이유도 건강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말들을 할까.

“가수 한다고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는 서울 가더니 저 꼴로 왔는데, 부모 가슴에 대못 박고 저라고 마음이 좋겠어?”

아, 그래서 엄마가 노래를 잘 불렀구나. 할머니는 노래라면 질색을 하고.

“에휴. 애비 없는 자식을 왜 낳았는지 몰라.”

엄마가 해 주던 얘기와 너무 달랐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네 아빠가 우리 향기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어린 마음에도 왠지 상처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얘기들이 자동으로 해석이 가능해져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사실을 알게 됐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화를 내기에는 마음이 훌쩍 커 버렸고 엇나가기에는 받은 사랑이 너무 컸으니까. 그래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였다. 제 존재도 모르는 그에게 저주든 미움이든 감정을 쏟는 덴 한계가 있었다. 깨끗이 잊어 주자. 지금까지 그래 왔듯 할머니와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며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살자. 서울로 유학 간 친구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면서 그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도시는 그저 그녀의 마음속에 유토피아쯤으로 두고 말이다.

그런데 봐 버렸다. 첫사랑을 운운하며 가족과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그의 가족들과 인터뷰한 기사를. 그래서 사람 잡아먹는 서울에 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던 ‘엄마의 남자’가 보고 싶었다. 향기는 어느새 질척해진 땅에 발이 푹푹 빠지자 몸을 돌렸다.

“아, 배고프다.”

* * *

“벌써 일어나셨어요?”

“낮잠을 종일 자? 와서 밥이나 먹어.”

“비 오는 날은 칼국수가 딱 인데.”

향기는 냉큼 겉옷을 벗고 식탁에 앉았다. 버섯 찌개를 식탁에 올려놓으며 성철이 물었다.

“해 먹을까? 먹고 싶어?”

“버섯 찌개도 먹고 싶었어요.”

비 오는데 어디 갔다 오냐는 성철의 물음에 향기는 애들 사료를 챙기러 나갔었다고 얼버무렸다. 성철은 생글거리는 향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정을 많이 빼앗긴 것 같았다. 저녁 시간에는 밖을 찾지 않던 녀석이 나가는 기척이 잦아졌다. 먹는 것도 전만 못 하고 웃는 것도 줄어들었다. 정말 인연이었던 걸까. 그가 없을 때 집에 찾아든 것도, 향기가 목숨을 구해 준 것도 예삿일은 아닌데 성급했나 싶다. 성철은 두어 번 수저를 움직이다 물었다.

“우리도 마을에 내려가서 살까.”

“마을에요? 심심하세요?”

인석아, 너 때문이지. 그렇게 코를 빠트리고 있으니까. 성철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타운 하우슨가 뭔가 짓던데. 읍내 다니기도 좋고. 네가 지내기 좋을 것 같아서.”

“에이. 할아버지는 거기서 못 살아요. 낮에 여기 오느라 힘만 들지.”

성철은 예쁜 손녀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어려서부터 저렇게 속이 깊었다.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도 그를 위해서고, 괴팍한 제 할머니 비위도 척척 맞추던 향기였다. 저 하고픈 걸 포기하고 살아온 녀석이라 더 좋은 짝을 찾아 주고 싶었다.

성철은 지나가듯 물었다.

“선볼텨?”

“…….”

반찬만 집었다 놓는 향기를 보고 성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좋아?”

“뭐가요?”

“그 녀석 말이야. 서울 놈.”

성철의 목소리가 떨떠름했다. 그의 눈에도 보기 드문 번듯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순진한 향기의 눈엔 오죽할까. 유별난 제 할머니 등살에 연애 한 번 못 해 본 숙맥이었다. 낯선 사람이라면 경계부터 하던 아이가 졸랑졸랑 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손녀의 마음을 홀라당 가져가 버린 녀석이 괘씸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성철은 말없이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향기에게 물 잔을 밀어 주었다.

“흠. 할아비도 생각해 볼 테니까 너도 신중히 생각해 봐.”

방으로 들어가는 성철의 뒷모습을 좇는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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