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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3화 (13/56)

# 13

13화.

무현을 알아본 사람들 때문에 가게 안이 술렁거린다. 눈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무현이 가볍게 호응하자 정우는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별종이다. 번거로워서라도 피할 만한데 취향인지 신념인지 대중음식점을 찾는 무현은 오랜 시간 변함이 없다. 불판에 고기를 올리던 정우가 물었다.

“선글라스 줄까?”

“숯불에 고기 구워 먹으면서?”

“그래서 바로 가자니까.”

“저녁 안 먹었다며.”

일반인이 찾는 식당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는 무현을 보고 처음엔 이미지 메이킹이다, 뭐다, 기사도 나가고 꽤 시끄러웠다. 하지만 한결같은 모습에 이젠 그러려니 한다.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호기심은 보이지만 일부러 자리에 찾아와 사인을 부탁하거나 불편하게 굴지 않는다. 가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현이 신경 쓰지 않는다. 일행이라고 해 봤자 남자들 아니면 코디네이터뿐이니 감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우는 소주잔을 채워 주고 무현을 살폈다.

“제대로 쉬고 온 거 맞아? 어째 더 무거워 보인다.”

무현은 먹기나 하라며 소주잔을 비웠다. 정우는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머리를 식히고 왔다는 녀석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라도 갔다 온 거야?”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다. 차무현에 관한 건 모조리.”

“관심 꺼.”

“받은 만큼 일하겠다는데 왜 말려?”

무현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펜션으로 연락을 했었다. 숙박 손님이 없다는 말에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잠수를 타더니 열흘 만에 나타나서는 일언반구 설명이 없다. 분명 뭐가 있는데. 정우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정말 할 말 없어?”

“없어.”

“너 나랑 왜 술 마시냐?”

“새삼스럽게.”

무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상하게 정우와는 코드가 맞았다. 특별히 얘깃거리가 없이 술자리를 가져도 편한 녀석. 그가 갖지 못한 가벼움이 부럽기도 하고 단순한 성격도 마음에 든다. 그렇다 보니 정우와 가볍게 소주잔을 기울이는 게 일상이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단 말이지. 냄새가 나.”

“배 다 채웠나 보지? 쓸데없는 말은.”

무겁기 그지없어 보이는 무현의 분위기가 정우의 신경을 깔짝인다.

“차무현, 믿는 도끼에 발등 찍으면 용서 안 한다.”

“너나 잘해.”

“드라마 대본은 검토했어?”

“대충.”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그 작가 거면 거절하는 것도 힘들잖아?”

“곧 결정해야지.”

무현은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시선을 두었다. 그가 생각 없이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어 씹고는 중얼거렸다.

“……다르네.”

“뭐가?”

되묻는 말에 무현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똑같은 숯불구인데 그곳에서 맛봤던 것과 다르다. 찬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구수한 노인의 미소가 있고 깔깔거리는 향기의 웃음이 있던 곳. 똑같은 참숯을 쓰고 있는데 왜 그런 걸까.

서울에 온 지 한 달. 한동안은 ‘아저씨!’ 하는 환청이 들려 황당했었다. 안부 전화를 넣으려다 전화기를 내려놓길 몇 번. 그렇게 불러 댈 땐 언제고 괘씸하게도 문자 한 통이 없다. 산짐승만 한 개들과 잘 지내고 있겠지.

「서울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당연히 결혼하자고 안 했죠!」

맹랑한 말을 하면서도 향기의 뺨이 발그레해졌었다.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려지고. 상견례는 어떻게 됐을까. 오늘도 토끼 밥을 줬을까. 어느새 무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금요일. 퇴근 시간대와 맞물린 한강대로는 좀처럼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2월 말에 눈까지 날린다. 숭례문 방향에서 접촉 사고가 있었다더니 그 때문인가. 조급한 마음에 차창을 내렸지만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도로가 짜증만 부추길 뿐. 길어진 정체에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자 무현은 라디오 주파수를 교통 방송에 맞추고 운전대를 두드렸다.

“하필이면 이런 날…….”

등장 타이밍 한 번 기막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홍보 인터뷰 중이었다. 개인 휴대폰이 울렸고 확인되지 않은 번호라 당연히 무시했다. 그것도 일반전화라 더더욱. 중요한 일이면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제법 끈질겼다. 진동하는 휴대폰이 신경 쓰여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거절 메시지를 보낸다는 게 그만 통화를 누르고 말았는데.

-아저씨?

다짜고짜 튀어나온 호칭에 잘못 걸려 온 전화라 생각했다. 끊으려는 순간 노래라도 하듯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결혼했어요? 안 했으면 그 약속 유효한가, 해서요.

불현듯 여자가 떠올랐다. 아니, 여자라고 호칭하기 애매한 상대방이. 전화가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정적이 흐르자 시무룩해진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잊어버렸으면 어쩔 수 없고요.

문득 서울 번호로 걸려 온 전화라는 게 기억났다.

“어디야?”

-서울역이요. 여기 엄청 넓고 복잡해요.

목소리만 듣고도 커다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려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특종이라도 잡은 듯 매의 눈을 하는 기자를 앞에 두고 선뜻 대처가 어려웠다. 조금은 체념 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담 갖진 마세요. 저는 괜찮거든요.

“일단 끊어 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다시 전화하라고요?

일반 전화라는 게 떠올랐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그렇게 약속을 잡고 인터뷰를 마무리하느라 출발이 40분가량 지연돼 버린 거다.

무현은 깜빡이는 황색 신호를 보고 꼬리 물기를 하며 간신히 유턴했다.

주차를 끝낸 그가 서울역으로 향하다 미간을 좁혔다.

“하.”

어디로 가야 하지. 어처구니없게도 약속 장소를 정한 기억이 없다.

무현은 생소하게 생각될 만큼 변모한 서울역 주변을 느릿한 시선으로 더듬었다. 대학 때 농활을 가느라 와 본 게 마지막. 그게 10여 년 전이다. 그에게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곳인데 서울이 초행길인 여자에겐 오죽할까.

서울역 하면 떠오르던 만남의 명소, 시계탑을 떠올리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시계탑이 남아 있는지조차 헷갈렸다. 공중전화 부스를 찾던 무현은 이내 역사로 향했다.

“도대체.”

기다리라고 한 지 두 시간이 넘었으면 다시 연락을 해 옴직도 한데 휴대폰은 감감무소식이다.

역사에서 미아 찾기 방송이라도 해야 하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가로등에 세로로 길게 걸린 빨간색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얼핏 한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작은 체구에 봄이 코앞인데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패딩을 입고 있었다. 백팩은 방패처럼 앞에, 등에는 기타를 멘 모습이 왠지 평범치 않았다. 특히나 옆에 놓인 커다란 트렁크가 유난히 그의 시선을 잡아끈다. 한참 인영을 응시하던 무현은 눈동자만 내놓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여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향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거리를 재듯 한 발 한 발 움직이며 주문을 외웠다.

“온다, 안 온다. 온다, 안 온다! 이러면 곤란한데.”

노란 선이 끝난 지점을 밟고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점쳐 봐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러다 안 오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나쁜 생각을 물리치려 고개를 잘게 저었다.

“아, 어지러워.”

서울은 정말 사람이 많았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장날만 되면 사람멀미가 난다고 약국부터 찾던 할머니가 바로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나마 광장엔 사람이 많지 않아 숨 쉴 만한데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다. 봄을 앞두고 심술궂게 나리는 눈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얼어 버린다. 위치상으론 고향보다 따뜻해야 하는 서울이 그녀에겐 더 춥게만 느껴진다. 두리번거리던 향기의 시선이 한곳에 못 박혔다.

저것은?

커다란 건물 앞면 전체가 초록색 캔버스 같았다. 그 위에 물감 대신 색색의 불빛이 얼굴 없는 사람들을 그려 내는데,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와.”

고향의 밤은 별빛, 달빛이 다였는데 서울의 밤은 휘황찬란한 불빛 천지다.

“이왕이면 얼굴도 좀 만들지…….”

신기함은 잠시. 고요한 밤에 초록빛을 띠며 둥둥 유영하는 반딧불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니 큰일이다. 향기의 한숨이 깊어질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고개를 들던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저씨!”

구세주라도 만난 양 그를 발견한 향기의 눈이 커다래진다. 하지만 수가지 생각이 엉켜든 무현은 서늘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떻게 찾으라고 여기 있어.”

“찾기 쉬우라고요.”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전화를 했어야지.”

“역사에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찾기 쉽지 않았어요?”

말똥한 눈을 하곤 마치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말투라 무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향기는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무현을 위아래로 쓱 훑었다. 이 밤에 무슨 멋인지 선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옷은 헐벗은 채다. 그리고 늦게 온 사람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향기는 입안에서 맴도는 반갑다는 말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고 다니면 안 추워요?”

누구 때문인데? 겉옷 챙길 정신도 없이 뛰어 나왔다. 어떻게 된 건가 하는 의문 때문에.

“어른 남자는 감기도 안 걸리는 줄 아나. 얼어 죽을 뻔했던 경험도 있으면서.”

혼잣말을 하듯 연신 중얼거리며 향기는 벙어리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를 풀었다. 그리고 발꿈치를 들었지만 무현의 목에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키였다. 내친 김에 손을 뻗어 무현의 어깨를 잡아 당겨 그의 목에 목도리를 감았다.

얼결에 상체를 기울인 무현이 미간을 좁혔다.

“뭐 하는 짓이야.”

“고마운 짓이요. 이젠 따뜻할 거예요.”

야무지게 매듭까지 매 주고 향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무현의 눈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여전히 경계심 없는 향기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전화로 얘기했잖아요.”

“혼자 왔어?”

“그럼 누구랑 와요?”

건성건성 대답하는 향기의 시선이 다시 서울 스퀘어 건물 전면 광고판을 향했다. 무현은 몸을 틀어 그녀의 시선을 차단하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버스 타고 기차 타고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서슬 퍼렇던 성철이 떠올라 무현의 눈에 의구심이 차올랐다.

“아저씨, 우리 여기 계속 서 있어야 해요?”

추운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처럼 코를 훌쩍인다.

무현이 한숨을 내쉬는데 꼬르륵,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배 속에서 일어난 생리 현상이 아니니 향기의 사정일 것이다.

“밥 안 먹었어?”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아저씨 올까 봐 기다렸어요.”

“지금이 몇 신데.”

하, 얘를 어떻게 하지. 무현은 향기의 트렁크를 들고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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