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4화 (14/56)

# 14

14화.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왔는데 하필이면 파스타집이었다. 대신 주문을 해 주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은 이미 때늦은 후회. 향기는 종업원이 당황할 정도로 “이건 뭐예요? 요건요?” 끝이 살짝 올라가는 사투리 억양으로 꼬치꼬치 캐묻는다.

주문을 끝내고도 그녀의 시선이 혼자 분주하다. 그런 향기를 지켜보며 무현의 한숨이 깊어질 즈음 음식이 나왔다.

“와, 오리지널 파스타 처음 먹어 봐요. 읍내엔 제대로 된 파스타 집이 없거든요.”

“…….”

“이게 화덕 피자라는 거예요?”

거름망 없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무현은 얼른 포크를 집어 향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빨리 음식으로 입을 채우고 조용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휴대폰은.”

“새로 살 거예요.”

“왜.”

“오래되기도 했고, 제 인생을 리셋할 거거든요.”

그 리셋에 그도 포함된 것 같아 무현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무슨 뜻인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그 정도는 알아요. 스마트폰 세상에 입덕할 거예요.”

체구도 작고 얼굴이 뽀얀 게 작은 인형 같다. 어떻게 된 게 그녀의 고향에서 볼 때보다도 더 앳돼 보이는 건지.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어질 것 같았다. 무현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밥은 편히 먹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피클을 두 번이나 더 시키고야 파스타 접시가 비워졌다. 그리고 무현은 손도 대지 않은 화덕 피자는 한 조각만 남았다.

무현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일단 집에 연락하고 내일 내려가.”

“저 가출한 거 아니에요.”

“그럼 올라온 김에 서울 구경이나 하고 가든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는 걸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그렇게 소원이던 서울 관광 정도는 시켜 주자 싶었다.

“아저씨, 지금 비행 청소년 선도하는 쌤 같아요. 이럴 거면 전화로 말하지 그랬어요.”

향기는 음료수를 마시고 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비행 청소년도 아니지만 그 말 들으려고 기다린 건 아니거든요.”

마지막 피자를 맛있게 해치운 향기는 여전히 말이 없는 무현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밥은 잘 먹었어요.”

“……?”

“신세질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곤란한 얼굴 안 해도 돼요.”

향기가 발딱 일어서자 무현은 얼결에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여전히 가냘픈 손목을. 향기가 속으로 함박웃음을 짓는 걸 모르고.

향기는 무현에게 잡힌 손목을 쳐다보며 새침한 표정을 했다.

“왜요?”

“뭐 하는 거야?”

“가려고요.”

“어딜?”

무현의 손을 떼어 내고 “친구 집이요.”라고 말하고는 패딩을 입었다.

“친구? 누군데?”

“말하면 아저씨가 알아요?”

무현은 걱정하지 말라며 종알거리는 향기를 그저 바라만 보았고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까짓 약속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생명의 은인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은근히 양심을 찔러 대는데 어쩐다.

“부담 갖지 말라고요. 마음은 언제든 변하는 거니까.”

제 생각을 해 주는 게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무현이 속 깊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따라와.”

마음이 무거운 건지 트렁크가 무거운 건지. 식당을 나서는 무현의 걸음이 느릿하기만 했다.

* * *

대리석 바닥에 긴 현관 복도를 지나자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집이 아니라 럭셔리 리조트 같아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구도 집 안도 자로 잰 듯 반듯반듯, 무현의 잘생긴 외모와 서늘한 성격을 그대로 닮은 집이었다.

“와, 이 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건 아니지요?”

“혼자 살아.”

“정말요?”

향기는 벽면에 걸린 사진과 무현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진짜 유명한 배운가 봐요? 집에다 이렇게 큰 사진도 걸어 놓고.”

잠시 망설이던 무현은 향기가 뭐라 떠들던 그녀의 트렁크를 들고 그의 침실로 향했다. 욕조가 있는 욕실은 그의 침실뿐이었다. 두 시간 넘게 밖에서 떨었던 게 신경 쓰이기도 했고 욕실이 붙어 있는 방이 향기가 쓰기엔 편할 것 같았다.

향기는 무현을 따라 걸으며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저 여기서 자요?”

“겁 없는 건 여전하네.”

“친구네 간다고 했는데 데려온 건 아저씨잖아요.”

“…….”

그러게. 왜 그랬을까. 향기를 친구네 데려다주는 건 그가 내키지 않았다. 호텔에서 재우는 것도. 그래서 호텔 앞까지 갔다가 차를 돌려 결국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사람 무턱대고 믿는 거 아니야. 버릇 고쳐.”

“아무나 믿는 건 아닌데. 아저씨잖아요.”

무한 믿음을 보여 주는 향기가 어이가 없어서 어느새 무현은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말은 참 잘해?”

“칭찬한 거 맞죠?”

본인이 편하게 해석하겠다는데 누가 말릴까. 무현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그의 방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침구를 바꿔 주고 욕실과 미니 냉장고를 열어 보였다. 간단한 간식까지 준비돼 있으니 밖으로 나오지 말아 줬으면 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쉬어.”

“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요. 안녕히 주무세요.”

무현은 대답 없이 침실을 나서며 손잡이의 잠금 장치를 누르고 문을 닫았다. 밖에서 방문 손잡이를 비틀어 문이 잠긴 걸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아예 못 나오게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싶은 심정이었다.

향기는 무현이 방을 나가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하여튼 쌀쌀맞다니까.”

어떻게 얻은 기횐데 포기해? 저를 기다릴 은주가 걱정되지만 우선은 무현의 집에 입성했다는 안도감에 미소가 지어진다.

방 안을 둘러보던 향기는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정말 이상한 아저씨야!”

거실뿐 아니라 침대 위 벽면에도 실물보다 더 큰 무현의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향기는 침대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만 붙이고 앉았다.

“미안해요, 아저씨.”

1년만, 1년만 봐줘요.

* * *

집에 들어서던 무현은 뒤에서 주춤거리는 향기를 보고 서늘한 냉기를 내뿜었다.

“안 들어와?”

“들어가요.”

자동으로 잠기는 현관문 소리에 향기는 움찔했다.

“도대체 그 새벽에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나, 남산에요.”

향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이런저런 근심에 잠이 올 리 없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집을 나섰다. 나갈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들어오려니까 경비가 막아섰다. 무턱대고 무현을 찾아오는 팬이 많다며 지인이라고 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결국 경비실에서 무현에게 연락을 넣었고 그가 내려와 신원 확인을 해 주고서야 일이 해결됐다.

여기가 청와댄가. 집에 들어오는데 무슨 보안?

향기는 주방으로 향하는 무현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달그락달그락.

무현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찬물도 모자라 얼음을 가득 채운 물 잔을 다 비우고야 말했다.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거요.”

무현은 향기가 내미는 작은 노트를 낚아채듯 잡아 펴 보았다. 지도를 프린트한 종이가 붙어 있고 남산에 가는 방법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다음 장도, 그 다음 장도 같은 형식의 메모가 빼꼭했다.

“버스에서 내리니까 바로 전철역이 있던데요. 찾기 쉬웠어요.”

큰일이라도 해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현은 그런 향기를 야단치지 못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케이블카도 운행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걸어서 올라갔어?”

“삼순이 계단인가?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되던데요.”

그 새벽에 계단을 걸어서 꼭대기까지? 곧 향기니까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그의 입술이 삐딱해졌다. 가파른 산길도 다람쥐처럼 날아다니는 여자였다.

“걱정할 사람은 생각 안 해?”

“걱정했어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운동을 가려는데 방문이 반쯤 열려 있고 얼핏 정돈된 침구가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생각지도 못한 향기의 등장에 좋은 얼굴을 할 수 없었는데 혹시 돌아간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던 거다. 다행히 가방과 기타가 있었지만 길도 모르면서 어디를 헤매나 불안했다. 조깅을 핑계 삼아 동네를 다 뒤지다 들어왔는데 마침 경비실에서 연락이 온 거다.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향기는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라는 뒷말은 꿀꺽 삼키고 눈을 반달로 접었다.

침대 머리맡에 무현의 사진이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반겨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서울에서 본 무현은 다른 사람 같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무현은 한숨을 내쉬고 아침 준비를 서둘렀다.

“제가 할까요?”

“앉아 있어.”

낯선 공간이라 더는 나서지 못하고 향기는 냉큼 식탁에 앉아 종알거렸다.

“아저씨는 남산 가 봤죠? 서울은 정말 넓더라고요. 사람도 많고.”

부채를 펼친 듯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촘촘하게 들어찬 건물. 사방으로 뻗은 도로. 끝없이 꽁무니를 잇는 차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미로 같았다. 고향에서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넓었다.

혼자 떠들던 향기는 양손을 올려 엄지와 검지를 엇갈려 맞대 직사각형 프레임을 만들었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한 주방에 서 있는 무현의 모습이 남달라 보였다. 한쪽 눈을 지긋 감고는 카메라라도 되는 양 팔을 접었다 펴며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제대로 된 옷을 입은 무현은 정말 근사했다. 한 컷. 한 컷. 주방과 무현의 뒷모습을 담던 손이 그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잽싸게 내려졌다.

“뭐 하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현은 구운 빵과 샐러드, 베이컨이 담긴 접시를 차례로 식탁에 올려놓았다. 향기의 앞에 주스를 담은 컵을 놓아 주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빵밖에 없어.”

“내일은요?”

또 바짝 다가온다. 무현은 향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저 원래 빵 좋아해요. 할아버지 때문에 밥 먹었던 거지. 내일도 빵 줘도 된다고요.”

“먹기나 해.”

“그런데요. 남산에 아저씨랑 같이 간 거나 다름없어요. 아저씨 사진 붙은 버스를 탔거든요. 너무 신기했어요.”

영화 홍보를 위한 버스 래핑 광고를 본 모양이다. 무현은 그의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 향기가 더 신기했다. 그녀가 나타난 지 만 하루도 안 됐는데 멘탈이 탈탈 털린 기분이다.

“서울 올라 온 이유, 말해 봐.”

“찾아온다고 했잖아요.”

“결혼하려고?”

“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