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5화 (15/56)

# 15

15화.

그녀의 대답에 무현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에 올라온 후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향기 걱정도 되고 그가 당한 일도 황당해서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일이 틀어진 게 다행이다 싶었다. 스물셋. 성인은 됐지만 감정도 판단력도 미성숙한 나이. 나이 먹을 만큼 먹은 그는 특수 상황에서 판단력이 흐려졌던 거다. 향기를 안쓰럽게 본 것도, 제 처지와 빗댔던 것도, 다 그의 잣대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때라면 모를까,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허락하셨어요.”

식사하기를 포기한 무현은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두 손으로 탑을 만들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진짜 묻자. 정말 서울에서 살고 싶어서 결혼하겠다는 거야?”

한참 망설이던 향기가 말했다.

“가수,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무현은 와락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 * *

“다시 말해 봐.”

“가수될 거라고요.”

진짜 헛바람이 든 거였다. 하도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폭탄 맞은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무현은 이마를 짚었다. 가수의 꿈을 꾸는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아니, 향기의 꿈을 지지하고 도와줄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을 담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다니. 그래서 연예인이라는 소리에 성철이 펄쩍 뛰었던 걸까.

“가수되겠다고 가출한 적 있어?”

“가출을 왜 해요? 집 떠나면 개고생인 거 다 아는데.”

천연덕스러운 말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천둥벌거숭이 철부지를 어떻게 한다?

“무슨 방법으로?”

“오디션 볼 거예요.”

“노래 잘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알아요.”

“아니. 네가 아는 것 이상으로 넘쳐.”

무현이 말을 이었다. 매달 크고 작은 기획사에서 오디션을 진행한다고. 직접 찍어 보낸 데모 CD나 동영상 심사만 해도 몇 날 며칠이 걸릴 만큼 지원자가 많다고. 1차 심사를 통과해도 몇 년 동안 죽어라 피나게 연습만 하다 포기하는 이들이 허다하다고.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데뷔하는 친구들은 그런 친구들 중에 1퍼센트도 안 돼. 현실 직시가 안 되나 본데.”

“무슨?”

“결혼까지 했는데 가수가 안 되면?”

사랑하는 남자와 하는 결혼이 아니다. 얼마나 절박한 꿈인지 모르겠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여자로서의 인생을 걸겠다는 얘기였다. 인생 선배로서 현실은 딛고 사는 거지 이고 사는 게 아닌 걸 알기에 쓴소리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노래 배운 적 있어? 기타는?”

“없는데요.”

“그런데 가수가 되겠다고? 전문적으로 배우고 전공하고도 가수 안 되는 애들 천지야.”

“저도 제가 못 배운 거 알아요.”

무현이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향기는 동요 없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래 해 봐.”

“그건 곤란해요.”

“왜?”

“제가 동전만 넣으면 노래가 나오는 노래방 기계는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무현의 입에서 “하.”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향기는 그런 무현을 보고 생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줘서 고마운데요.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그런데 왜 말했어?”

“공범이니까요.”

“공범?”

향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현의 도움을 받으려고 말한 건 아니었다.

“아저씨는 결혼을 할지 말지, 대답해 주면 돼요.”

박사 나셨다. 잘해 보라고 박수라도 쳐 줘야 할 것 같았다. 세상이 순진한 네가 생각하듯 호락호락한지 경험해 보라고. 무현의 입이 여전히 열리지 않자 향기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아저씨?”

“뭐 할 말 있어?”

“방 바꿔 주면 안 돼요?”

“왜?”

“아저씨 사진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

향기의 말에 무현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누구는 그의 사진이 프린팅된 옷을 잠옷으로 입고 잔다. 그것만? 베개 커버를 해서 끌어안고도 자는데 불편하다니.

향기가 채근하듯 말했다.

“아니면 보자기라도 줘요.”

“뭐하게?”

“씌워 놓게요.”

식탁을 치울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아니, 더는 논쟁할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지금 당장은 향기의 말대로 결혼을 할지 말지 생각을 해 볼 때였다. 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나섰다.

* * *

“웬일이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에 다 오고?”

연선은 현관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집으로 찾아가도 얼굴 보기 힘든 아들이 호출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다.

“근처에서 광고 촬영 있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는요?”

“주말이면 온천 가시잖아. 아직 점심 전이지?”

“네. 주세요.”

연선은 부리나케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 연선을 따르며 무현은 쓴 미소를 지었다. 광고 촬영은 핑계. 수시로 그의 집을 찾는 연선이 향기와 맞닥트릴까 봐, 그걸 막기 위해 먼저 움직인 거다. 혼자 어쩌고 있을지. 생각도 정리할 겸 나오긴 했는데 향기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잠시 후 무현은 어머니 연선과 식탁에 앉았다. 대충 차렸다고 하는데도 반찬이 식탁에 한가득했다.

“같이 드세요.”

“난 아침 늦게 했어.”

무현이 좋아하는 반찬을 손이 가기 편한 곳에 놓아 주며 연선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다. 제 자식 예뻐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지만 무현은 그녀에게 특별했다. 무뚝뚝한 거야 집안 내력이니 어쩔 수 없고. 생긴 거 하며 몸가짐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아들이었다. 생선을 발라 주며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니?”

“문제없습니다.”

“맞선만 보면 뭐 해? 결과가 없는데.”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요. 올해 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연선은 느긋하기만 한 아들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무속인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지나가는 개는 쳐다봐도 여자한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들 때문에. 손자를 닦달하는 어머님을 말리지 않는 이유는 무현이 결혼할 나이가 된 것도 있지만 주관이 뚜렷한 성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저러다 정말 독신으로 살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연선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혹시, 너 몸에는 이상 없지?”

“무슨 말씀이세요?”

“연예인들은 파파라치? 뭐 그런 거 때문에 집에서 데이트한다며.”

아들 나이가 몇인 줄은 아시는 걸까. 서른 중반이 다 돼 가는 아들에게 성교육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무현은 못 들은 척 밥을 욱여넣었다.

“요즘은 결혼 전에 동거부터 하는 커플도 많은데. 나는 그거 흉 아니라고 생각해. 선진국에서는 그런 문화가 벌써 정착됐잖니.”

“어머니, 제 나이가 몇인 줄은 아세요?”

“자식이 많아서? 꼴랑 너 하난데.”

“이진이 들으면 서운해해요.”

주인 없는 집에 수시로 드나드는 어머니였다. 그러면서 여자를 데려오길 바라다니. 오던 여자도 발길을 끊지 않겠냐고 묻고 싶지만 쓸데없는 언쟁이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연선은 덤덤하게 구는 아들의 태도가 못마땅해 한숨을 내쉬었다.

“국민 사위 소릴 듣고 영화 백날 찍으면 뭐 해? 남들은 영화 찍다 연애도 잘 하드만, 스캔들 한 번 안 나는데.”

“연예인은 싫다고 하셨잖아요.”

“아무나 데려와. 무조건 데려오라고!”

연예인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던 연선이었다. 그뿐인가.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며느리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분이 하나씩 욕심을 내려놓는다. 고집을 꺾어 준 건 고맙지만 같은 일을 하는 여자는 무현이 만날 생각이 없다.

“이진이는 벌써 애 엄마가 됐는데. 넌.”

“어머니.”

무현의 서늘한 목소리에 연선은 흠칫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철부지가 애를 낳더니 어른이 다 됐다고. 무현은 어른이 되는 기준을 새롭게 재편성하는 연선을 보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애라도 만들어 오면 영웅 취급을 받게 생겼지만 절대 그럴 생각은 없다. 누구처럼 씨 종마 취급받는 건 사양이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눈동자, 피부색 상관없이 국제결혼도 허락할 기센데 어쩐다.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

“걱정되긴 하니? 내가 너 때문에 어머님 얼굴 뵐 낯이 없어.”

“아직도 할머니가 무서우세요?”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네 할머니 예전 같지 않아.”

연선은 삼대독자에게 시집왔는데 아이가 늦게 생겨서 호된 시집살이를 살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심적 중압감이 시집살이였고. 무현을 낳고서야 기를 폈지만 잃은 것도 많은 세월이다.

아들의 젓가락이 한곳에만 닿자 연선이 말했다.

“넌 어떻게 식성까지 네 할머니를 닮니?”

“잘 낳지 그러셨어요.”

“말하는 거 하곤. 겉절이 가져다줄까?”

“일 봐 주시는 분 계시는데 왜요.”

무심결에 말을 뱉은 무현은 아차 싶어 잠시 틈을 뒀다가 말을 이었다.

“주세요. 갈 때 가져갈게요.”

“그럴래?”

연선은 얼른 일어서서 김치를 챙기면서도 의아했다. 뭘 줘도 들고 다니지 않는 녀석이 오늘따라 고분고분한 게 수상쩍었다. 철이 드나.

“너 결혼하면 해 달라고 해도 안 해 줄 거야.”

“집안일만으로도 힘드시잖아요. 다음부턴 하지 마세요.”

무현은 말끝마다 결혼을 들먹이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에 차례 포함 열 번의 제사가 있다. 연선은 조상님들이 후처를 두지 않아서 신위 수가 추가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하곤 했다. 제사상 차리다 등골이 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렇게 층층시하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생할 만큼 해 온 분이 그의 결혼에 안달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너도 당해 봐라.’ 내지는 ‘나도 시어머니 노릇 좀 해 보자.’일까. 조부모야 그렇다 쳐도 어머니마저 그를 닦달하는 게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선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들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결혼하면 네 마누라 시집살이 시킬까 봐 걱정되니?”

“…….”

“그런 걱정은 마. 네 조부모만 돌아가시면 합사할 거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연선은 무현의 식사가 끝나자 식탁 위에 물 잔과 사진을 올려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것 때문에 들르려고 했는데. 대학 교수래. 장소는 같은 곳으로 잡았다.”

무현은 사진도 보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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