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6화 (16/56)

# 16

16화.

툭툭. 툭, 툭툭. 또르르.

책상을 두드리는 만년필이 무현의 손에서 떨어져 구른다. 어머니 연선이 잡아 놓은 맞선이 벌써 내일. 거절하자니 귀찮아질 것 같고 나가자니 향기가 마음에 걸린다.

무현은 기어이 대본을 내려놓고 테라스로 향했다. 창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허전한 목을 휘감는다. 봄 냄새를 잔뜩 묻힌 바람이.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어쩌자고 결혼하자고 했을까.”

그는 절대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곁을 주는 성격도. 그런데 향기에게는 그런 그의 성격이 적용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 차무현으로 봐 주는 부담 없는 시선. 동네 아저씨를 부르는 것 같은 꾸밈없는 목소리. 겁나 잘생겼다고 대놓고 말하는 순수함.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정. 향기는 옷을 여미게 하는 강풍이 아니라, 여름을 코앞에 둔 봄바람처럼 그렇게 그의 경계심을 벗겨 냈다.

숙제처럼 해치워야 하는 결혼이었다. 향기는 할아버지를 대신할 보호자가 필요하고 저는 결혼할 여자가 필요하고. 어차피 감정의 교류 없이 선을 봐서 하는 결혼이라면 향기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회를 주고 싶었다.

무현은 창문을 닫고 서재를 나섰다.

차를 준비한 무현은 향기와 마주 앉았다.

“내일 사람이 올 거야.”

“누구요?”

어울리지 않게 풀 죽어 있던 향기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걸 본 무현은 피식 입술을 늘렸다. 다른 건 몰라도 성격 좋은 건 알아줘야 한다. 과하게 날카롭게 굴었는데 어느새 그의 나무람을 잊은 얼굴이다.

“서울 지리 모르잖아. 가이드해 줄 친구.”

“저 친구 있어요. 나가지 않았던 건…….”

“말 들어. 내가 해 주면 좋은데. 그게 어려워.”

향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무현의 얼굴을 살폈다.

“아저씨, 혹시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래.”

“하고 있구나. 난 또…….”

“그러니까 재미있게 놀다 와.”

삐죽 입술을 내미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관자놀이를 눌렸다.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하고 있다, 너 때문에. 경비에게 붙잡혔던 게 부담됐는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며칠을 그가 준 노트북과 휴대폰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다. 남자라면 같이 움직이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정우에게 사람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브리핑 좀 해 봐.”

“뭘요?”

“너에 대해. 뭘 알아야 생각을 해 볼 거 아니야.”

“우리 선보는 거 같아요. 그렇죠.”

해맑은 모습에 무현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요즘 들어 두통이 자주 생긴다. 향기 때문에. 맞선은 상대방의 기본 정보라도 알 수 있지. 향기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할아버지와 산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린벨트에 묶인 땅이 있다는 것.

「저 땅도 있어요.」

봉우리가 세 개나 되지만 그린벨트에 묶여서 평당 천 원이나 할까? 꽤 심각하게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에 또 웃고 말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어른들이 싫어하시겠죠?”

“뭘?”

“엄마만 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고요. 그 뒤로 쭉 할머니 할아버지랑 살았어요.”

대충 사정은 짐작하고 있었다. 성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 그녀의 집 안 어디에도 향기와 그녀의 어머니 사진만 있을 뿐 남자 사진은 없었다.

“어떤 분이셨어?”

누군가에게 엄마 얘기를 언제 해 봤더라. 맑기만 하던 향기의 눈빛이 아련해진다.

“예뻤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클수록 엄마랑 똑같이 생겼대요.”

“너도 예쁘다?”

“저 인기 엄청 많았거든요!”

무현은 발끈하는 향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뽀얀 피부에 작은 얼굴.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제법 귀엽다. 옷걸이도 나쁘지 않다. 다만 볼륨감, 섹시, 그런 말을 대입하기에는 왠지 죄짓는 느낌이랄까. 향기 또래 후배들과 작품을 꽤 많이 해 왔다. 카메라 앞이라 그랬는지 그 순간만큼은 그녀들이 이성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아무리 일반인이라고 해도 향기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어려만 보인다. 십 년의 나이 차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잘생긴 아저씨만큼은 아니지만.”

“네 말대로 겁나 잘생긴 아저씬데. 난 당연히 못 쫓아오지. 안 그래?”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또 미소 짓고 만다. 네 결핍이 무엇이기에 사랑 듬뿍 받은 얼굴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은근히 자신감도 넘치고 성격도 야무진데.

“결정을 하는데 그런 건 아무런 제약이 안 돼. 그건 알아 둬.”

“정말요?”

“그래.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고?”

“……편해요.”

그럴 리가. 무현이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척할 뿐이다. 머릿속은 지뢰밭이겠지. 씩씩한 척하는데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흠칫 놀라곤 한다. 같이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생각 없는 여잔 아니었다.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할 뿐이지.

어쨌든 묘하게 향기와 지내는 게 불편하지 않다. 마치 시골에서의 시간이 연장된 듯. 그거면 된 건가. 향기를 바라보는 무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 * *

혼자 걷기도 좁은 골목. 그곳을 음식을 가득 올린 쟁반을 층층이 쌓아 머리에 인 사람들이 마치 묘기를 부리듯 누빈다. 식당 안팎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작은 테이블에 머리를 맞댄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밖에는 기다리는 줄이 길다. 그들의 순서가 돼 테이블을 잡자 정진이 주문을 하고 물었다.

“만둣국 전문인데 맛있어요. 정신없죠?”

향기는 촌티를 제대로 냈다는 생각에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무현의 말대로 집으로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을 이정진이라고 소개했고 그를 따라 나섰다. 강남 거리를 구경하고 다음으로 찾은 곳이 남대문. 그동안 사람 구경은 읍내에 장이나 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녀 보긴 난생처음이라 마냥 신기하고 정신이 없었다.

“고마워요. 여기 혼자 왔으면 길 잃을 뻔했어요.”

어느새 나온 만둣국은 정말 맛있었다. 사람들이 바삐 먹는 모습에 덩달아 숟가락질이 빨라진다.

“남대문이 관광객 필수 코스라 그래요. 특히 중국 사람들.”

“시장 같지 않아요. 거대한 보물 창고 같아요. 먹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고.”

정말이라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워 정진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어제 사촌 형인 정우의 부탁을 받고 심드렁했었다. 더구나 차무현과 연관된 여자라니. 기자들과 대중의 시선이 늘 따라붙는 공인이라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향기와 반나절 같이 다녀 보니 그런 생각들이 싹 사라지고 오히려 고마웠다.

서울이 처음이라고 해서 어리바리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 가고 싶은 곳이라며 메모한 것을 보여 주는데 혼자 다녀도 될 만큼 상세했다. 하여튼 그가 알던 여자들과는 다른 예쁨이 있는 향기였다. 무엇보다도 솔직해서 그런지 같이 다니면서 유쾌했고.

“언제 내려가요? 향기 씨, 서울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자주 만나게.”

“아직, 몰라요.”

서울 나들이나 다닐 때가 아니었다. 거절하면 무현이 신경 쓸 것 같아 정진을 따라 나섰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미 생각이 바뀐 무현에게 떼를 쓰는 것 같아 불안한 데다 무현이 뭔가를 해 주려고 하면 할수록 대가를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향기는 새로 장만한 휴대전화를 보고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이걸로 써. 꼭.’

괜찮다고 했지만 카드를 주는 무현의 눈빛이 너무 서늘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마지못해 받아왔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정진이 무현의 카드로 계산을 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도로 무르고 싶다.

정진은 생각에 빠져 있는 향기를 보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일은 어디 가고 싶어요?”

“안 바빠요?”

“전혀요. 내 번호 저장했죠? 가고 싶은 곳 찾아보고 늦어도 되니까 메시지 줘요.”

처음 계획은 오늘만 가이드를 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향기를 더 만나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진은 뒷덜미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차무현 선배와 어떻게 되는 사인지 물어보면 실롄가요?”

“네. 실례예요.”

똑떨어지는 대답에 정진은 머쓱해졌다. 정우가 되도록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점점 향기가 궁금해진다.

“차무현 선배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 향기 씨가 처음일걸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팬들은 나이 가리지 않고 오빠라고 부르거든요.”

“나는 아저씨가 배우인 줄도 몰랐어요.”

저를 천연기념물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는 정진이 이해돼 향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서울에 와 보고서야 무현이 한류 스타의 계보를 잇는 대스타라는 걸 알게 됐다. 버스 정류장에도 건물 옥외 광고에서도 무현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마치 같이 다니는 거처럼. 그런 사람에게 유명하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결혼까지 해 달라고 했다. 무현이 대단한 사람일수록 향기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차무현 선배님이 배우인 줄 몰랐다고요?”

“네. 처음 봤을 때는요. 지금은 알아요.”

정진이 크게 웃고는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식사 끝났으면 좀 걸을래요?”

“또 갈 데 있어요?”

“혹시 음악 듣는 거 좋아해요?”

향기가 눈을 반짝이자 정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홍대 버스킹이 볼만하거든요.”

“너무 늦지 않을까요?”

“거긴 저녁때 가야 좋아요. 트렌드도 한눈에 볼 수 있고요.”

망설이던 향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진의 뒤를 따랐다.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홍대 거리에 향기는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화려했다.

“다른 세상 같아요. 멋쟁이도 많고 예쁜 여자도 많아요.”

“향기 씨도 예뻐요.”

“알아요.”

환하게 웃으며 눈을 접는 향기를 보고 정진은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가식이 없다. 자신의 입으로 예쁜 걸 인정하다니.

정진은 금요일이라 볼거리가 더 풍성할 거라고 말하고 향기를 중심가로 이끌었다.

향기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꽃샘추위도 아랑곳 않고 사람들이 끝도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게 신기했다.

분명 하루를 끝내는 저녁인데 마치 아침을 여는 분위기랄까. 적응이 안 되면서도 묘하게 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우리 시골에서는요, 해 떨어지면 캄캄해요.”

“나도 중학교까지는 시골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잘 알죠.”

“여긴 지금 막 아침이 된 것 같아요.”

“봄부터 가을까지는 더해요. 새벽까지 놀아요.”

정진은 인파에 치이는 향기가 걱정돼 몇 번이나 손을 내밀다 멈칫했다.

“혹시 술 마실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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